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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79화 (179/194)

00179  종장  =========================================================================

종장

***

이번엔 엘리제도 저항을 하지 않았다.

사실 둘은 이미 미리 이야기가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계속 그렇게 바쁘게만 지내면 납치해 버린다?’

얼마 전, 린덴이 그렇게 말했었고.

‘안 돼요.’

‘해야 할 일은 대부분 정리되지 않았나?’

‘그렇기야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도 특별히 싫지 않은 눈치라 린덴은 눈을 빛냈다.

‘어디로 납치당하고 싶지?’

‘그게 뭐예요.’

‘골라, 특별히 납치될 장소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지.’

그 말에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납치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그러면…….

‘바다가 보고 싶어요. 아, 그렇다고 납치를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요.’

‘알겠다, 바다. 바다.’

린덴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늘의 납치가 일어났다.

자신을 태우고 론도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마차를 보며, 엘리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또 납치당했네요.”

“싫나?”

린덴은 웃으며 물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젓고, 옆에 앉은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안 싫어요, 납치범님.”

“왜?”

“제가 납치범님을 사랑하니까요.”

그 말에 린덴은 어깨에 기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도 그를 바라봤다.

이어지는 사랑이 담긴 입맞춤.

서로의 혀가 느껴지고, 타액이 섞였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강렬한 느낌에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제.”

“네?”

“오늘 너무 자극하지 마.”

“네? 네?”

“오늘 밤 참기 힘드니까.”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여행, 아니, 납치당했으니 오늘 밤은 그와 함께 같은 방에서 보내야 한다.

‘설마?’

그 생각을 하자 심장이 주책 맞게 뛰었다. 지난번 납치당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가 지켜주었지만 이번에는?

슬쩍 그의 얼굴을 보니, 왠지 그의 얼굴도 살짝 붉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심장이 더욱 뛰었다.

“…….”

그렇게 마차는 둘을 태우고 가도를 달렸고, 곧 기차로 갈아탔다.

기차가 향한 곳은 론도 남부의 항구 도시, 브이튼.

브리티아 해협과 접해 있는, 미항이었다.

***

가을이 다가오는지 하늘은 높고 날씨는 선선했다.

기차에서 먼저 내린 린덴은 손을 들어 그녀가 내릴 수 있도록 에스코트해 주었다.

“와, 바다 냄새 나요.”

“좋나?”

“네, 시원해요.”

그 말에 린덴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의 따뜻한 미소를 보니, 엘리제는 알 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권 다툼을 끝낸 후, 귀족파의 인원들을 용서한 이후 그는 조금 변했다.

뭐랄까. 조금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무뚝뚝한 성격은 여전했지만, 날 선 면이 사라졌다. 그리고 괴로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

‘정말 다행이야.’

이전 삶과는 정반대의 변화였다. 그때는 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날카롭게 변했으니까. 그와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 피의 비극 이후부터였다.

그전까지는 그저 무뚝뚝하게 그녀를 대했다면, 마음이 망가진 이후부터는 철저히 그녀를 냉대했다. 그 냉대를 못 견디고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었다.

그때, 린덴이 말했다.

“조금 더 좋은 미항에 갔으면 좋을 텐데. 시간이 워낙 없었으니.”

“여기도 충분히 아름다운 걸요. 좋아요.”

그는 옆에 선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껴안았다.

“그대와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 같이 가주겠나?”

허리에서 느껴지는 그의 느낌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가고 싶은데요?”

“그대가 바다를 좋아하니, 브리티아 섬의 아름다운 항구들, 리버항, 휘니항도 가고 싶고. 그렇게 아름답다던 니스 항도 가보고 싶군.”

“니스 항이요? 거긴 적국인 프랑소엔의 항구잖아요.”

“뭐, 밀입국하면 되지. 아니면 점령해 버리거나. 요즘 혁명이다 뭐다 해서 정신없어 보이던데, 1함대로 미리 점령해 놓을까?”

참고로 1함대는 브리티아에 주둔하는, 전 세계 최고의 화력을 가진 최강 함대였다.

엘리제는 그의 농담에 쿡쿡 웃었다. 참, 황제니까 할 수 있는 농담이다.

“같이 가줄 건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어디든, 어디라도. 함께 가요.”

그 말에 린덴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든, 어디라도.

이제 그와 그녀는 그렇게 영원히 하나의 길을 걸을 것이다.

“조금 걷지.”

“네.”

브이튼은 조그만 항구였다.

역 옆으로 아기자기한 예쁜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길 끝에 푸른 바다와 항구가 보였다.

둘은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었다.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서로를 느끼며 풍경을 감상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린덴.”

“왜 그러지?”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린덴은 답했다.

“그대 생각?”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농담하지 말고요.”

“농담 아니다. 진짜야.”

린덴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 목숨보다도.

자신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바로 그녀가 아닐까.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삶에 의미가 있었을까.

그때, 엘리제가 조심히 물었다.

“그때…… 많이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그 물음에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귀족파를 용서해 주었을 때 이야기다.

“조금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잘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요?”

“그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용서 이후, 짐을 내려놓은 탓일까. 더 이상 어머니와 누이는 그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도 그들을 놓아줄 수 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토록 원하던 복수를 포기했는데, 마음이 평안해지다니.

피로 복수를 했어도 이렇게 마음이 평안했을까? 글쎄, 모른다. 하지만 린덴은 왠지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그때 주제넘게 나선 것은…….”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알고 있다. 그녀가 뒤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암셀이 뒤늦게나마 죄를 뉘우친 것은 다 그녀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그녀가 그런 일들을 했던 것은 분명 주제넘은 이긴 했다.

하지만…….

“사과하지 마라.”

“네?”

“조금 주제넘으면 어떤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

“나도 그대에게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대를 위해 주제넘게 나설 것이다. 그러니 사과하지 마.”

그 말에 엘리제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고마워요.”

린덴은 생각했다.

그날의 용서는…… 그래, 사실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게 잘못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그녀와 길을 걷는 게 이렇게 행복하니까. 그러니 됐다.

린덴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말했다.

“사랑한다.”

“네…… 저도요.”

그렇게 둘은 해변가에 도착했다.

푸르게 펼쳐진 바다에 엘리제가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볼만한가?”

“네, 예뻐요.”

“더 좋은 곳도 많다던데. 이번에는 워낙 시간이 없어서.”

이번 1박 2일도 간신히 만든 것이었다.

돌아가면 대신들이 얼마나 그를 들들 볶을지 모른다.

“잠깐 앉을까?”

“네.”

그들은 해변가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아직 날이 따뜻해서 그런지, 바닷가에는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해변가와 사람들을 구경하다, 문득 무언가를 생각한 엘리제가 가방을 뒤졌다.

“시장하지 않으세요?”

“아, 조금은. 그대는?”

“저도 조금요. 그래서…….”

엘리제는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녀가 꺼낸 것을 본 린덴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저…… 드셔 보실래요?”

“그대가 직접 만든 건가?”

“네, 좋아하신다고 해서…….”

엘리제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샌드위치였다. 이전 그가 말한 취향대로 만든. 오늘 납치한다고 해서 직접 싸온 것이었다.

린덴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정말요?”

“응. 황궁의 메인 쉐프가 만드는 것보다 훨씬 맛있군. 그대에게 배우라고 해야겠어.”

그 말에 엘리제는 미소를 지었다. 빈말인 것은 알지만 기분이 좋았다.

린덴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이 소녀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간단히 요기를 마친 그들은 가방에서 다른 무언가를 꺼내었다. 부스럭부스럭 뒤져 나온 것은 사진기였다.

같이 여행을 온 것을 기념하러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다.

“이걸 찍으면…… 영상이 남는 것인가?”

린덴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진기가 서대륙에 도입된 지 이제 겨우 2년째였다. 크림전쟁 때 최초로 사용되었고, 이제 웬만한 신문사에서는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린덴은 커다란 사진기를 이리저리 살폈다.

대충 설명을 듣긴 했지만, 처음 보는 신식 도구인지라 익숙하지가 않았다.

반면 엘리제는 아주 익숙한 물건이었다. 초기 형태의 물건이지만, 곧 사용법을 파악하고 린덴에게 알려주었다.

“저기 서보세요. 제가 찍어드릴게요.”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됐고. 그대가 저쪽에 서봐라.”

그러며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대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영원히.”

그 말에 엘리제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눈에 담긴 사랑 때문일까?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찰칵! 찰칵!

린덴은 해변을 배경으로 그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진을 찍고, 엘리제가 말했다.

“우리 같이 찍어요.”

“같이?”

“네.”

그러며 그녀는 대신 찍어줄 사람을 찾았다.

마침 항구에 정박해 있던 해군 함선의 장교가 해변가를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실례지만……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네?”

젊은 장교는 웬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그리고 곧 뒤에 서 있는 린덴의 얼굴까지 보고 화들짝 경악했다.

“추, 충성! 폐, 폐하를 뵙습니다!”

아니, 황제와 예비 황후가 왜 이 작은 항구에?!

린덴은 쓸데없는 예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기 사진이나 찍어주도록.”

“네,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엘리제는 사진기의 조작법을 알려주었다.

“이걸 이렇게 조작하면 돼요. 어렵지는 않아요.”

“네, 알겠습니다!”

젊은 장교는 평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열심히 그 설명을 숙지했다.

“찌, 찍겠습니다.”

워낙 긴장한 모습에 린덴이 혀를 찼다.

“손 흔들린다. 이상하게 나오면 안 돼.”

“아! 죄,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와 그녀는 하얀 백사장을 배경으로 섰다. 푸른 바다가 싱그럽게 철썩였다.

린덴은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엘리제는 그를 슬쩍 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사진 찍으니 앞에 보세요.”

“그래. 그대도.”

엘리제는 그에게 살짝 몸을 기대었다. 그는 조금 더 힘을 내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찍습니다!”

찰칵!

둘의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밝게 웃고 있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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