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0 종장 =========================================================================
종장
그 뒤로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놀이도 했다.
황제와 예비 황후가 물놀이라니, 상상이 안 가는 일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됐다.
엘리제가 해변가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물을 끼얹은 것이다.
“꺄악!”
깜짝 놀란 엘리제가 비명을 질렀고, 한창 즐겁게 놀던 어린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
그 모습을 보며 린덴이 눈에 불꽃을 튀긴 것은 당연한 일. 엘리제가 말렸으나 그는 처절한 복수를 해주었다.
무려 초상 능력을 이용한 물놀이! 해변가는 그에 의해 평정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 그와 그녀 모두 쫄딱 젖은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물에 젖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전 토마토 축제가 생각났다. 즐거웠다.
맛있는 식사도 했다.
바닷가에서 바로 잡힌 해산물 요리였다.
“와아.”
싱그러운 왕새우와 게, 바닷가재. 거기에 최고급 화이트 화인까지.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하는 식사는 행복했다.
어둠이 깔리자, 해변가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항구 사람들이 모여, 기분 좋게 악기를 연주했다.
둘은 같이 그 음악을 감상했다.
린덴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행복하군.”
“……!”
그 말에 엘리제는 놀라 그를 바라봤다.
처음이다.
그가 행복하다는 말을 한 것은.
린덴이 그녀를 돌아보고 잔잔히 웃었다.
“그대와 있으니 행복해.”
“……저도요.”
엘리제는 중얼거렸다.
그녀도 행복했다. 이렇게 그와 같이 있는 것이. 시간이 멈추었으면 할 정도로.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밤이 깊어져 둘은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황궁 시종장이 된 란돌이 예약한 최고급 호텔이었다.
조용한 여행을 할 것이라고, 소란 없도록 하라고 미리 단단히 이야기해둔 덕에 큰 소요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란돌, 이 시종 놈이 또 방을 하나만 예약한 것이다.
‘음…….’
린덴은 신음을 삼켰다.
이를 어쩌지?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그녀와 한방에서 밤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한방에서 밤을 지새우면 참을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지금도 이렇게 그녀를 가지고 싶은데, 옆에서 누워 있는 것을 보고도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도 그토록 괴로웠는데, 이번에는 절대 불가능이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두고 보자. 결혼만 하면.’
그는 순백한 엘리제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까지의 괴로움을 수백 배로 해서 돌려주리라. 침대에서 놔주지 않을 것이다.
“방을 하나 더 준비하도록.”
“하나 더 말입니까?”
“그래.”
호텔의 대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의 앞이라고 의문을 표하겠는가. 화급히 또 다른 최고급 방을 정리시켰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이 있긴 있군.’
그런데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엘리제가 그의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 같은 방에서 자면…… 안 돼요?”
“……!”
린덴은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이지?
그녀는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냥…… 오늘은 같이 있고 싶어서요.”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린덴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 여자가! 오늘 나를 또 얼마나 고문하려고!
***
그렇게 둘은 같은 방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방에 들어오자마자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저 방에 들어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가슴이 세게 뛰었다.
깊은 밤. 한 공간에 그녀와 단둘이 있다니.
‘바늘도 안 가져왔는데. 어떻게 참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고 싶었다, 그녀를. 진정으로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온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의 품에서 영원히 가두고 싶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그녀를 향한 갈망이 타오르는데, 오늘 밤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엘리제가 말했다.
느낌일까? 왠지 그녀도 긴장한 듯했다.
“씻으시겠어요? 아니면 먼저 씻을까요?”
“아, 그대 먼저 씻도록.”
“네, 금방 씻고 나올게요. 쉬고 계세요.”
욕실 안에서 그녀가 씻는 소리가 들렸다.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놈의 호텔들은. 왜 방음이 하나도 안 되는 거야!’
물론 싫은 것은 아니지만. 아니, 좋지만…….
그래도 참기 너무 괴로웠다.
‘양 하나, 양 둘, 양 셋…….’
그렇게 세계 최강국의 황제 폐하는 궁상맞게 양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물론 늘 그렇듯, 별 효과는 없었다.
그렇게 서로 씻고, 잘 시간이 다가왔다.
발칙한 시종, 란돌의 모략일까? 누워 잘 수 있는 침대는 단 하나였다. 심지어 큰방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사이즈였다.
나란히 누운 상태에서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그녀의 살결이 스쳤고, 그때마다 그는 그녀를 향한 갈망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계속해서 갈등하는 마음.
결혼 전이니, 그녀를 지켜주어야 한다.
아니, 그런 것과 상관없이 갖고 싶다. 하나가 되고 싶다.
‘사랑하니까. 그리고 이제 곧 결혼할 것이니,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누워 있던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린덴, 자요?”
“……아니.”
린덴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대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그때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저…… 린덴.”
“왜 그러지?”
“사랑해요.”
“……!”
“사랑해요, 정말로.”
왜일까. 그 말이 그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마워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 사랑스러운 말에 결국 린덴은 이성이 뚝 끊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읍? 리, 린덴?”
그녀는 당황해 피하려 했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집요하게. 한 손으로 그녀를 가두고, 입안을 농락했다.
“아…….”
그 강렬한 키스에 엘리제는 곧 몽롱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귓가를 어루만지고, 목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마다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듯 움츠렸다.
이윽고 그녀의 쇄골을 어루만지며 그가 말했다.
“리제.”
“……네, 린덴.”
그와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 금색 눈동자에 타오르는 갈망을 느끼고, 엘리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 너를 가지고 싶다.”
“……!”
그 직접적인 말에 엘리제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린덴은 긴장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싫은가?”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이 바보 남자.
“그런 걸…… 말로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이 바보.”
하지만 역시 연애 바보, 동정 린덴.
그녀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시, 싫은가……?”
그녀는 민망함에 더욱더 얼굴을 붉혔다. 아, 진짜 바보. 그녀는 고개를 아예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시, 싫지…… 않아요. 사,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 말이 끝난 다음이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
놀라 보니, 그가 타오르는, 정말 불처럼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잘못 듣지 않은 거지?”
“…….”
엄마야. 그녀는 지금이라도 말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했다. 눈빛만으로도 잡아먹히는 것 같다.
그가 그녀의 옷을 벗겨 내렸다. 워낙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떨려 간단한 침의를 벗기는 데 자꾸 헛손질했다.
“사랑한다…… 사랑해, 내 엘리제.”
“……저도요.”
그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윽고. 하얀 나신이 완전히 드러났다.
린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름다웠다. 달빛에 새하얀 살결이 빛났다.
엘리제는 민망함에 몸을 가렸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그는 그녀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둘 모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윽고 운명의 시간.
그가 걱정스레 물었다.
“처음에…… 아프다던데…….”
그녀를 가지고 싶지만, 그녀가 아픈 것은 싫었다.
하지만 엘리제가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괘,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부끄러움으로 떨렸다.
“당신이니까…….”
“……!”
그렇게 그날 밤, 둘은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길고 긴 밤이었다.
***
다음 날, 정오가 가까운 늦은 아침.
엘리제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파.’
전신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 온몸 여기저기가 울긋불긋했다.
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엘리제는 얼굴을 붉혔다.
‘하여튼 미워.’
그간의 괴로움을 복수한 것일까? 밤새 얼마나 괴롭히던지. 정말 미웠다.
그때,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나?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지.”
그녀와 다르게 맑은 목소리.
그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미워요.”
“뭐가?”
“몰라요. 전부 다. 미워요.”
그 말에 린덴은 쿡쿡 웃었다. 확실히 자신이 생각해도 지난밤, 너무 괴롭히긴 했다.
‘하지만 네 책임이야.’
린덴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자신이 어떻게 멈추겠는가? 그러니 어젯밤의 일은 전부 그녀의 책임이었다.
‘이제 같이 살기만 해봐라.’
궁을 따로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계속 같이 지낼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사랑한다.”
“몰라요.”
“몰라? 어젯밤 사랑이 부족했나?”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짐승을 보듯 그를 바라봤고, 그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비해, 참 많이 능글맞아진 그다.
결국,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사랑해요.”
“목소리에 사랑이 부족한데. 역시 어젯밤 사랑이 부족해서…….”
“충분했거든요!”
그녀가 화를 내자, 린덴은 다시 쿡쿡 웃었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정도로.
그는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어젯밤 기억이 나 그녀는 바동거렸다.
“이거 놔요.”
“또 사랑할까?”
“그만해요! 결혼해도 당분간은 금지예요!”
“뭐? 그건 안 돼. 황명이다.”
대제국의 황제님은 기존 자주 사용하던 말투인, ‘명령이다’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황명이다’를 사용했다.
그렇게 아옹다옹 투닥거리다, 오전이 지났다.
둘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호텔에서 준비한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원래는 점심 기차를 이용해 론도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그녀의 몸이 좋지 않아 하루 미뤘다.
“오늘 올라가야 하는데…….”
“괜찮아. 하루 늦어도 된다. 어차피 급한 일은 다 하고 왔잖아?”
“저야 그렇긴 하지만…… 국정은 괜찮아요?”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안 괜찮았지만, 대신들이 난리 치겠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크리스, 그놈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렇게 둘은 미항에서 하루 연장된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몸이 안 좋아, 주로 호텔에 머물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둘이 같이 있었기에.
저녁이 되었을 때, 엘리제의 몸이 많이 나아져 그들은 간단히 산책하러 호텔을 나섰다.
시간이 늦어, 이미 짙게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밝은 달빛과 바닷가에 늘어선 건물의 불빛 덕분일까? 산책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오히려 고즈넉한 느낌이 좋았다.
둘은 가만히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걸었다.
말없이. 서로를 느끼며.
기분 좋은 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항구의 만에 도착했다.
달빛을 받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에 그녀는 탄성을 토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나들이를 오지. 더 좋은 곳도 많이 가고.”
엘리제는 웃었다.
“또 납치하시게요?”
“그래, 매일매일 납치해서 살아야겠어.”
그 말에 쿡쿡 웃은 엘리제는 그의 품에 기대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의 순간.
그를 밀어내던 기억들.
크림 반도에서 그와 함께한 시간.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한 후의 시간.
그 밖에 함께 걸은 순간순간들.
모든 것이 소중했다.
린덴이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소중히…… 정말 소중히 말했다.
“사랑한다, 내 엘리제.”
“네, 저도요.”
“앞으로…… 놔주지 않아. 영원히 함께할 거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네.”
앞으로 그들은 함께 길을 걸을 것이다.
그 길의 순간순간들은 어떨 때는 기쁘고, 어떨 때는 아프기도 하며, 슬플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니까.
영원히.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