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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86화 (186/194)

00186  외전1 길거리 데이트  =========================================================================

1장 길거리 데이트-4

“병원 일은 힘들지는 않은가?”

“괜찮아요.”

“하여튼 다른 의사 놈들이 빨리 실력이 늘어야 그대가 편해질 텐데.”

린덴은 혀를 찼다.

내명부의 일을 같이 담당하느라 병원 업무를 많이 줄인 상태이지만 여전히 일이 많았다. 그녀만 할 수 있는 수술이 아직도 많았기 때문이다.

늘 피곤해하는 그녀를 보면 다 때려치우고 쉬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이니 또 그러지도 못했다.

해결책은 빨리 다른 의사들의 실력이 느는 것이었지만 최고 고난도 수술의 경우는 아직도 지지부진했다.

‘그레이엄, 그놈을 또 닦달해야겠군.’

희망은 그레이엄, 재수 없게 생긴 그놈밖에 없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나마 제일 나으니.’

끝없이 최선을 다하는 그레이엄의 노력은 그를 엘리제 다음 가는 명의로 만들었다. 피터 교수에 이어 차기 황궁 어의로 낙점된 상태였다.

“병원 일 말고, 특별히 신경 쓰이는 일들은 없고?”

“아, 특별히는 없는데 지난번에…….”

그렇게 식사를 하며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엘리제가 이야기하고, 린덴이 듣는 편이었다.

‘좋군.’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극장에서 크리스, 그 얄미운 놈 때문에 방해받았던 시간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애피타이저를 먹는 중이었다. 엘리제가 린덴의 등 뒤를 보고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어?”

린덴도 고개를 돌렸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보도(寶刀)와도 같이 냉막한 아름다움의 남자, 렌이었다.

변장하고 있었지만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렌도 그들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폐하, 마마?”

주변을 의식한 작은 목소리.

엘리제가 물었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오라버니?”

렌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약속이 있어서.”

“약속이요?”

“로잔 가문의 영애와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렌은 황후가 된 동생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로잔 가문이요?”

엘리제와 린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로잔 백작가는 중부의 전통 깊은 명가였다. 하지만 총기사단의 단장인 렌과 특별한 인연이 있을 법한 곳은 아닌데?

렌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소개로 한번 만났었습니다.”

“아.”

그제야 엘리제는 렌의 용무를 깨달았다. 구제불능의 노총각인 아들을 위해 엘 후작이 소개를 주선한 것이다.

‘큰오라버니…….’

엘리제는 안쓰러운 눈으로 큰오라버니의 무뚝뚝한 얼굴을 바라봤다.

‘이번엔 제발 잘되어야 할 텐데.’

그녀는 몇 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렌의 수난사(?)를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이었다.

그들의 아버지 엘 후작은 가문을 이어야 할 큰아들을 불러놓고 잔소리를 하였다.

‘넌 도대체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일만 하다 늙어 죽을 생각이더냐?’

엘은 아들을 보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늘 반복되는 잔소리였다.

아무리 총기사단의 단장이자, 젊은 장성, 차후 군부의 실권자 불리면 뭐하는가? 일만 하다 늙어 죽을 것도 아니고!

다른 가문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뛰어난 아들을 둔 것을 부러워하지만 엘은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네 나이 때는……! 레이디들을! 크윽!’

자신의 리즈 시절 화려한 경험들을 이야기하려다 부인에게 꼬집힌 엘은 신음을 삼켰다.

후작 부인은 남편을 흘겨보더니 렌에게 물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논지는 엘과 같았다.

나이가 찼는데,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냐고.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지만 렌은 이렇게만 답할 뿐이었다. 중매라도 시키려 했으나 그건 또 완강히 거절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렇게 렌은 집에 들어올 때마다 구박받았다. 가문의 자랑스러운 장남에서 한순간에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집 안에서 렌의 편인 것은 그와 별다를 것 없는 처지인 크리스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엘 후작이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서 누구라도 좋으니, 아무라도 데려오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렌이 폭탄선언을 하였다.

‘마리와 결혼하겠습니다.’

‘……?!’

모두가 경악했다.

마리? 우리가 아는 그 하녀 마리? 갑자기 웬?

후작 부부도 놀라고, 크리스도 놀라고, 엘리제도 놀라고, 가문 모두가 놀랐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마리 본인이었다.

‘……저요?’

마리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깜빡거렸다. 사람을 착각하셨겠죠? 란 얼굴이었다.

렌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모두가 알다시피 렌은 론도의 대표적인 천연기념물이다. 그의 무뚝뚝함은 또 다른 천연기념물이었던 황태자를 아득히 능가했다.

그는 놀란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인지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어느 순간부터 좋아졌다고. 결혼해 달라고.

‘…….’

그 낭만과 분위기라고는 먼지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고백을 들은 마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저 차가운 큰 공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정말로? 믿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죄송해요.’

고민도 없는 깨끗한 거절. 난생처음 한 고백에서 완벽히 차인 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마리는 의외로 단호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요. 죄송해요. 전 공자님께 특별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어요.’

애초에 그녀에게 렌은 존경하고 어려운 공자일지언정, 이성으로 생각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렌이 이렇게 다짜고짜 폭탄선언을 하지 않고 부드럽게 접근했다면, 그녀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벽창호 렌이 그런 부드러움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마리에게 차인 렌은 실의에 빠졌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낙심한 채 지냈다.

겉에서 보기에 티가 나진 않았지만 엘리제는 동생으로서 그가 많이 힘들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후 시간이 지난 후, 마음을 추린 그는 부모님이 주선해 주는 선 자리에 여러 번 나갔으나, 결과는 매번 좋지 않았다.

‘죄송해요, 남작님. 남작님과 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죄송해요. 좋은 여성 만나세요, 남작님.’

객관적으로 볼 때 렌은 그 누구 못지않은 1등 신랑감이다. 뛰어난 능력, 가문, 잘 생긴 외모까지.

하지만 그 모든 장점을 무시해 버릴 만큼의 무지막지한 무뚝뚝함이 문제였다.

소개를 받은 레이디들은 몇 번 만남을 가지기도 전에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뚝뚝함에 두 손 두 발 들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원체 잘났으니, 조금만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면 넘어갈 여자가 한 아름은 넘겠지만 그의 무뚝뚝함은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회상을 마친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큰오라버니도 알고 보면 좋은 남자인데.’

물론 그녀도 오라버니의 성격이 심하게 무뚝뚝한 것은 알고 있지만 매번 레이디들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로잔 영애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거예요, 오라버니?”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났는데, 안 오는군요. 뭐, 곧 오겠지요.”

엘리제는 속으로 응원했다.

‘이번엔 꼭 좋은 결과 있길. 화이팅, 오라버니.’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렌과 약속한 로잔 영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엘리제는 조심히 물었다.

“저…… 오라버니, 이곳에서 약속한 게 맞나요? 아니, 로잔 영애가 나온다고 했었나요?”

“……거절의 답장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나온다는 답장은……?”

힐끗 눈치를 보니 없었던 것 같다. 왠지 또 차인 것 같았다!

“…….”

그때, 옆에서 스테이크를 씹던 린덴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친우도 마음에 안 들었고, 하필 이곳에서 차여 자신과 엘리제와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다시 레이디에게 차인 친우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어, 린덴은 위로의 의미로 술잔을 들었다.

“술이나 한잔하겠는가?”

“……맥주 말입니까?”

“아니, 위스키로.”

“……사양하겠습니다.”

***

식사를 마치니 어느덧 거리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결국, 로잔 영애는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라버니, 파이팅. 꼭 좋은 여자 만날 거예요. 기도할게요.’

엘리제는 떠나는 오라버니의 등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서 큰오라버니도 좋은 짝을 만났으면 좋겠다.

렌과 헤어진 그들은 테즈 강 인근으로 향했다.

오늘의 마지막 데이트 코스인 강변 산책이었다.

강변을 보며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둘이 되었군. 이제 훼방 놓는 놈은 없겠지?’

간만에 거리 데이트인데! 자나 깨나 기대했건만 가는 곳마다 아는 사람이 나타나 그는 침울했다.

‘이제는 누가 나타나도 무시한다. 이제 더 이상의 방해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어.’

강변 산책이 끝나면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로 너무 바빠서 얼마나 기다려야 또 데이트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그러니 린덴은 남은 시간이라도 그녀와 단둘이 오붓하게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일이 안 풀리려는 것일까?

또 아는 사람을 만나버렸다.

“선생님?”

“……!”

린덴은 팍 인상을 찌푸렸다.

까칠한 인상의 미남이 자신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폐하와 마마를 뵙습니다.”

엘리제의 스승이었던 그레이엄 드 팰론이었다! 옆에는 밝은 인상의 여인, 레이디 제이도 함께였다.

엘리제는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이 밖에서 웬일이지?

황실십자병원에서 두 사람은 도제 관계였긴 했지만, 겉에서 보기에 별로 사근사근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같이 산책하시는 거세요?”

“아, 네. 마마.”

그레이엄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두 분께서도……?”

그러며 린덴을 바라본 그레이엄은 흠칫 놀랐다.

황제의 강렬한 눈빛을 본 것이다. 그의 금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고 갈 길 가라!’

그레이엄은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저희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그러며 그는 레이디 제이의 손을 잡고 급히 사라졌다.

“아…….”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모습에 엘리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린덴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엘리제.”

“네, 린덴?”

“다른 놈 신경 쓰지 말고 나만 바라봐.”

그 말에 엘리제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자꾸 데이트를 방해받아 그가 살짝 삐쳤음을 눈치챈 것이다.

브리티아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고 있는 명군인 공제가 고작 이런 일로 삐치다니. 남들이 들으면 절대 믿지 않겠지만 원래 황제는 그녀와 관련된 일에는 지극히 유치해졌다.

“네, 사랑해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린덴도 말했다.

“나도. 나도 사랑한다.”

이마에 와 닿는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그의 입술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엘리제는 그의 손을 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예뻐요.”

“그렇군.”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걸을까?”

“네, 좋아요.”

그렇게 둘은 나란히 서서 강변을 산책했다.

그 뒤 데이트는 즐거웠다.

중간에 간식도 사 먹고, 힘들 때쯤 찻집에 들어가 커피도 마시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거듭된 훼방으로 시무룩했던 린덴의 마음도 조금 달래졌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아…… 벌써 시간이.”

엘리제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쉽나?”

“네.”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투정부리듯 말했다.

“좀 더 이렇게 같이 있고 싶어요.”

린덴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국정은 때려치우고, 이렇게 그녀만 바라보며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도.

“이제 들어가야지. 그대와 중요하게 할 일이 있으니까.”

“중요한 일이요? 저랑요?”

“그래, 아주 중요한 일.”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린덴이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아기 만들어야지.”

“……!”

엘리제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또, 또 밤늦게까지 힘들게 하려고.”

“응? 난 국가적으로 중요한 대사를 치르는 것인데?”

“지, 짐승.”

“뭐가?”

“……아니에요.”

린덴은 작은 목소리로 짓궂게 물었다.

“싫나?”

“……모, 몰라요.”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감싸 안으며 쿡쿡 웃었다.

“어쨌든 이제 들어가지.”

“네.”

그렇게 둘은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잠시 말없이 창밖을 보던 엘리제가 말했다.

“린덴.”

“왜 그러지?”

엘리제는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잠시 주저했다.

“우리…… 아기 생기겠죠?”

린덴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길 거다.”

“그렇죠?”

“그래.”

그 흔들림 없는 답에 엘리제는 미소를 지었다.

“네, 고마워요.”

============================ 작품 후기 ============================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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