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2 3장 로마노프령에서 온 편지 =========================================================================
3장 로마노프 령에서 온 편지-2
읽어볼 가치도 없는 일이라 생각한 린덴은 편지를 찢어버리려 했다. 누굴 빌려줘?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데 막 종이를 찢으려는 순간, 한 문구가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숙부께서 위독하셔.
“……!”
린덴은 멈칫했다.
숙부. 선황인 민체스터의 동생이자 현 로마노프의 대공을 뜻한다. 최근 미하일은 로마노프 령에 머물며 대공의 업무를 도와주고 있었다.
“…….”
린덴은 책상을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다 시종장 란돌에게 말했다.
“황후를 불러와라.”
병원으로 나갈 채비를 하던 엘리제가 도착했다.
“폐하?”
“엘리제.”
린덴의 얼굴이 좋지 않아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에요?”
“잠깐 앉지.”
그는 그녀에게 미하일에게서 온 편지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면 대공께서…….”
“그래, 많이 위독하신 모양이야. 나야 의사가 아니어서 봐도 정확한 상태를 모르겠지만.”
편지에는 대공의 주치의가 보낸 소견서가 들어 있었다.
엘리제는 말없이 소견서를 살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갈 수록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린덴이 주저하다 말했다.
“어떻게 하겠는가?”
“…….”
“난 솔직히 말해 그대가 안 갔으면 좋겠어.”
그건 린덴의 진심이었다.
그녀가 의료적인 문제로 황궁을 잠시 떠나는 것도 끔찍이 싫은데, 로마노프 령이라니. 도대체 몇 날을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가?
떨어져 있는 것도 싫지만 그녀가 대해를 건너야 하는 것도 싫었다.
별일이 있을 확률은 낮겠지만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겠지?”
그녀가 안 갈 리가 없겠지. 그녀는 의사니까.
엘리제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철혈의 의사를 사랑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
여행 준비는 빨리 마무리되었다. 황후의 행차이긴 하지만, 대공의 상태가 급박해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출항하는 날, 항구까지 엘리제를 배웅하러 온 린덴은 연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꼭 조심히 다녀와야 한다. 알았지?”
“네, 폐하.”
“꼭 조심해야 해. 그대는 몸이 약하니 절대 무리하지 말고. 밥도 거르지 말고, 피로하지 않게 꼭 명심해라.”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걱정을 들으며 엘리제는 어색하게 웃었다.
남편은 자신을 갓난아기 대하듯 걱정한다. 자신은 정말 괜찮은데.
“내가 같이 가야 하는데.”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것, 자신이 직접 그녀와 같이 로마노프 령에 다녀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비서관, 행정부 부장, 외무대신 등 수많은 사람이 그를 뜯어말렸다. 국내외 여러 현안 때문에 절대 안 된다고.
린덴도 고집을 부렸으나 그들의 주장을 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최근 여러 복잡한 문제가 많아 황제인 그가 대해 너머에 있는 로마노프 령에 가는 것은 무리였다.
‘마음에 안 들어.’
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뻣뻣이 서 있는 장년의 남자를 바라봤다. 제국 2함대의 사령관 갤런 제독이었다.
“잘 부탁하네, 제독.”
“네, 폐하! 염려치 마십시오. 우리 2함대의 모든 것을 걸고 안전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제국, 아니, 세계 최강의 화력을 가진 2함대가 함께 하기로 하였지만 린덴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녀와 떨어지니 그냥 불안한 것 같았다.
‘다른 환자면 가지 말라고 하겠는데.’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로마노프 대공은 높은 직위도 직위이지만, 린덴의 숙부였다.
“꼭 조심히. 무리하지 말고…….”
린덴이 다시 한 번 걱정의 말을 할 때였다.
엘리제가 살짝 발을 들어 그를 껴안았다. 갑자기 확 다가온 그녀의 느낌에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폐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다녀올게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래.”
“에드워드를 잘 부탁해요.”
그 말에 린덴은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만 보면 우는 아들이 떠오른 것이다.
엘리제는 다른 것보다 아들과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싶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렇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제는 배에 올라탔다. 증기선이 높은 고음을 내며 떠날 준비를 할 때, 린덴이 말했다.
“엘리제.”
“네, 린덴?”
린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미하일, 그놈에게 안부 전해 줄 수 있겠나?”
엘리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
철갑을 두른 함선들이 푸른 바다를 갈랐다. 엘리제를 호위하는 2함대였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규모의 기함 선미에 인형같이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이 서 있었다.
‘내가 치료할 수 있을까?’
엘리제는 소견서에서 본 로마노프 대공의 상태를 떠올렸다. 짐작하건대 폐암 말기의 상황으로 보였다.
‘어렵겠지. 아무리 나라도.’
폐암 말기면 현대 지구에서도 완치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그녀가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어도 무리일 것이다.
‘그래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그녀가 이렇게 배를 타고 직접 로마노프 령으로 향하는 것은 지금 대공에게 온 급성 합병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이 급성 합병증을 해결해 주면 완치는 불가능하더라도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엘리제는 소견서를 품 안에 집어넣고, 바다를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상트부르로 가는 것도.’
배는 현재 발토해를 지나고 있었다. 곧 머지않아 로마노프 령의 중심지인 상트부르 항에 입항할 예정이다.
군함을 타고 상트부르 항에 가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 크림원정에 참전할 때도 이렇게 발토해를 지났었다.
‘그때는 밀이 날 많이 챙겨 주었었는데.’
배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곁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주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정권 다툼 후 미하일이 론도를 떠난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어떻게 지냈을까? 잘 지냈는지, 변한 건 없는지 궁금했다.
‘이제 곧 볼 수 있겠구나.’
증기선이 연기를 뿜어내는 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엘리제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고 싶네, 밀.’
머지않아 함대는 상트루브 항에 도착했다.
서대륙 북단에 위치한 로마노프 령은 단순히 황제 직할령이라 칭하기에는 굉장히 광활한 지역이었다. 직할령 자체의 국력도 어지간한 열강에 못지않았다.
브리티아 본섬과는 인종도 다르고, 문화, 기후 등 모든 것이 다른, 사실상 다른 나라나 다름없는 곳.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로마노프 가문을 섬긴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로마노프 령을 다스리는 대공은 황제의 형제 중 한 명이 역임하곤 했다.
‘원래 전통대로라면 다음 대 대공은 밀이 맡는 것이 맞지만…….’
이전 정권 다툼 문제가 걸리고, 무엇보다 미하일이 대공 자리를 원할지 의문이었다.
‘밀이 대공이라. 안 어울려.’
엘리제는 미하일이 대공이 된 모습을 떠올려 봤다. 아무래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타앙! 타앙!
그녀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항구에서 축포가 울려 퍼졌다. 황후의 입항을 환영하는 축포였다.
“와아!”
“로마노프 황제 만세! 황후 만세!”
“성(St). 엘리제 만세!”
수많은 시민이 항구에 몰려 와 그녀를 향해 환영의 함성을 질렀다.
비록 브리티아 섬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로마노프 령의 시민들도 성녀라 불리는 그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제는 자신을 향한 환호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와아!”
“대공 전하를 꼭 치료해 주세요!”
그렇게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배가 정박했다.
로열 가드의 호위를 받으며 배에서 내려온 엘리제는 순간 멈칫했다.
수많은 시민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본 것이다.
‘아……!’
화사한 금발, 부드러운 눈매, 어딘지 장난기 어린 입가.
‘그’였다.
미하일 드 로마노프. 바로 그녀의 소중한 친구. 그가 자신을 마중 나와 있었다.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소중한 친구의 모습에 감정이 뒤엉켰다.
미하일이 시민들 사이를 헤치고,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그녀의 가슴이 두근 뛰었다
이윽고 그녀의 앞에 다가온 그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미하일 드 로마노프가 브리타이 제국의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격식을 차린 인사. 하지만 엘리제는 그 예의 속에서 이전과 같은 장난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다. 5년의 세월을 넘어 밀이 자신이 앞에 있다. 그 사실에 엘리제는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껏 하고 싶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명멸하기를 반복했다.
잘 지냈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느냐. 힘들진 않았느냐.
그 수많은 말 중 하나를 엘리제는 간신히 끄집어내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안녕히 지내셨나요, 전하?”
그 물음에 미하일이 고개를 들었다.
5년 전, 헤어질 때 보여주었던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안녕히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며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린덴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떠돌아다녀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그가 다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어두운 얼굴을 했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다른 거는 다 괜찮았습니다. 여행도 즐거웠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반가웠고, 이 로마노프 령의 생활도 편안하고요.”
“그러면……?”
“단 하나.”
미하일이 미소 지었다.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마마를 뵙지 못해서 슬펐습니다.”
그가 엘리제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이전처럼 편하게 밀이라 불러주십시오.”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네,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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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