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3 3장 로마노프령에서 온 편지 =========================================================================
3장 로마노프 령에서 온 편지-3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엘리제는 미하일과 함께 로마노프 령의 궁전으로 향했다.
“숙부님께서 직접 마중 나오지 못해 사죄드린다고 전해 달라 합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환자인 로마노프 대공이 직접 못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몸 상태가 어느 정도로 안 좋으신가요?”
“원래도 기력이 없으셨는데, 최근에는 거의 침상에서 일어나시질 못하고 있습니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로마노프 대공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조카인 미하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로마노프 대공의 상태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네, 고마워요. 그러면 밀은 대공 전하의 일을 보필하고 있는 건가요?”
“조금씩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미하일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엘리제는 그 미소를 보고 입을 잠시 다물었다.
‘밀이 존댓말이라니.’
자신에게 예를 차리는 그가 어색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일개 귀족이 아닌 제국의 황후였으니까. 아무리 황족인 그라도 예를 다해야 했다.
‘변한 건 없어 보이네.’
여전히 꽃같이 화사한 외모, 밝은 웃음. 5년 전 헤어졌던 밀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얼굴.
하지만 그냥 느낌일까? 이전과 똑같아 보이는 미소 끝에 어딘지 모를 아픔이 느껴졌다.
“밀.”
“네, 마마.”
엘리제는 주저하다 입을 다물었다.
“마마?”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젓고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론도와는 다른 느낌의 건물이 즐비한 상트부르 시내가 지나가고 있었다.
‘밀, 정말 잘 지냈나요?’
그녀는 원래 꺼내려고 했던 물음을 속으로 삼켰다.
***
오랜만에 재회한 미하일과 조금 더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생사의 고비를 오가는 대공을 치료해야 했던 것이다.
궁전에 도착한 엘리제는 곧바로 대공을 만나 진료를 시작했다.
“황후…… 마마…… 를 뵈옵니다.”
“그냥 편히 누워 있으세요. 예는 괜찮습니다.”
시체같이 병색이 완연한 상태에서도 몸을 일으켜 예를 표하려는 대공을 만류하며 엘리제는 대공의 몸 상태를 살폈다.
“언제부터 이렇게 상태가 악화하신 거죠?”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호흡곤란이 악화하시더니, 손발이 붓고, 얼굴도 부기가 빠지지 않고…….”
대공의 주치의가 상태를 설명하였다.
엘리제는 가만히 대공을 살피며 추정 진단을 떠올렸다.
‘상대정맥 증후군이야. 폐의 종괴가 심장으로 가는 혈관을 틀어막았어.’
상대정맥 증후군(SVC syndrome)!
폐암 환자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합병증으로 심장에 인접한 폐의 종괴가 대혈관을 틀어막아 혈액 순환을 막는 상태다.
‘막힌 혈관을 뚫어주지 않으면 결국 사망하게 돼. 응급 수술을 해야 해.’
현대 지구라면 방사선 치료를 했겠지만 불가능하니 수술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장기로의 전이는 심하지 않아 이 합병증만 해결해 주면 생명 연장이 가능해.’
아예 폐암 자체를 해결해 주면 좋겠지만 시기가 늦어 그건 불가능했다.
“다른 합병증은 현재 없나요? 다른 부위의 장기 손상이나 혈액 검사상 이상은?”
“괜찮습니다.”
판단을 끝낸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이요?”
주치의가 놀라 물었다.
“네, 이런 수술은 최대한 빨리 할수록 경과가 좋아요. 이미 조금 늦은 감이 있어서 서둘러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 도착하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치의가 조심히 물었다.
그녀는 방금 막 대해를 건너왔다. 그런데 조금의 휴식도 없이 수술이라니. 저 연약해 보이는 몸으로 괜찮을까?
‘겉으로 보기엔 피 한 방울도 못 볼 것 같은 인상인데.’
기적과도 같은 일화를 수없이 들었지만, 저 여린 몸으로 험한 수술을 해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진면목을 몰라서 하는 생각이다.
엘리제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괜찮아요.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곧바로 응급 수술이 진행되었다.
상트부르 최고의 시설을 갖춘 로마노프 병원으로 대공을 이송 후 그녀는 수술복을 갈아입었다.
“준비되었습니다, 마마.”
어시스트를 서기로 한 의사들이 공손히 그녀에게 말했다.
로마노프 령에서 최고의 수술 실력을 지닌 의사들로 대륙, 아니, 세계에서 최고의 외과의사라 불리는 그녀에게 경의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엘리제는 수술 장갑을 낀 후 메스를 잡았다.
“오픈(Open)합니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
쉽지 않은 수술이었지만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다. 모두 그녀의 뛰어난 수술 실력 덕분이었다.
로마노프 령의 의사들은 말로만 듣던 황후의 수술 실력에 경탄을 보냈다.
“하, 역시 대단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 뵈었을 때는 전해진 이야기들이 과장된 게 아닌가 했었는데, 오히려 반도 제대로 표현 못한 거였습니다.”
“혈압이 떨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손놀림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인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엘리제의 치료를 목격한 의사들은 브리티아 섬으로 가서 연수를 받아와야겠다느니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론도의 의사들이야 그녀의 수술을 종종 볼 수 있어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알던 패러다임이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단순히 수술 실력뿐이 아니지요. 그 뒤의 치료나, 환자를 대하는 태도도 정말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누구보다 존귀한 분이신데,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봉사하듯 환자를 대하시니. 왜 그분이 성녀라 추앙받는지 알 것 같습니다.”
수술한다고 곧바로 상태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몸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보존적인 수술 후 처치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녀는 곧바로 론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상트부르에 더 머물기로 했는데, 소문을 들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모두 지금껏 치료가 힘들다고 이야기 들었던 난치 환자들이었다.
깜짝 놀란 상트부르의 귀족들이 ‘어딜 감히!’ 하며 내쫓으려 했으나, 엘리제는 고개를 젓고, 신분에 상관없이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
황후가 평민을 치료하다니!
브리티아 섬에 비해 다소 신분제가 경직된 분위기인 로마노프 령에서 그건 가히 혁명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황후 마마, 그렇게 무리하다 건강이 상할까 염려되옵니다.”
귀족들이 만류하였으나 엘리제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론도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무리하는 것도 아닌 걸요.”
빈말이 아니었다.
일중독인 그녀에게 이 정도는 별로 부담되는 업무량이 아니었다.
론도에 있을 때는 수술하랴, 의대 강의하랴, 보건 정책 검토하랴, 논문 쓰랴, 내명부 일 살피랴, 육아하랴, 등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으니까.
덕분에 그녀의 명성이 로마노프 령에서도 높게 울려 퍼졌다. 로마노프 령의 시민들은 앞다투어 그녀를 칭송했다.
물론 엘리제가 환자만 보며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의사인 동시에 제국의 황후.
황제 직할령인 로마노프 령을 방문했으니, 마땅히 황후로서 중요한 행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고, 주요 귀족들과의 만남도 가졌다.
그렇게 그녀는 의사로서도, 황후로서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흠잡을 것 없는 로마노프 령의 생활 중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마?”
궁의 회랑을 걷던 중 발걸음을 멈춘 엘리제를 보며 한 귀족 부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딘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 끝에 근위대를 훈련시키는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밀.’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 일.
그건 다름 아닌 미하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상트부르에 머물며 그녀는 미하일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소중한 친구이기도 했고, 이곳 로마노프 령의 인물 중 대공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신분의 인물이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밝게 웃고 있지만, 왠지 모를 어둠이 담겨 있다고 할까?
‘특별히 지내는 데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이곳에 머물며 살핀 바로 특별히 그에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걱정하던 것과 다르게 매우 잘 지내고 있었다.
린덴에게 편지로 투덜대던 것과 달리 대공의 업무 대행도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었고, 시민들과 귀족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하지만 그 어둠은 무엇일까? 어머니를 잃은 슬픔일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근거는 없지만 느낌이 그랬다. 분명 무언가 다른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듯했다.
‘도대체 뭘까?’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녀 옆에서 걷던 한 시녀가 미하일을 보더니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멋져.”
“……?”
엘리제가 자신을 보자, 시녀가 얼굴이 시뻘게져 당황했다.
“아, 아. 죄, 죄송합니다, 마마. 저도 모르게…….”
엘리제는 슬쩍 웃었다.
“괜찮아요. 미하일 전하 멋지죠?”
“아, 아…… 네.”
시녀는 사과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눈치를 보니 미하일을 연모하고 있는 눈치였다.
‘혹시 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있을까?’
엘리제는 주저하다 물었다.
“저.”
“네, 마마.”
“혹시 미하일 전하께 최근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그 물음에 시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좋은 일이라면……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
“아니, 특별한 건 아니고요. 최근 미하일 전하의 얼굴이 계속 안 좋은 것 같아서요.”
시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특별한 일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전하께서 맡고 계신 일들도 모두 순조로우시고…….”
그러며 시녀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미하일 전하의 얼굴이 안 좋은 것 같기는 해요. 이전에는 안 그러셨는데…….”
“이전에는 안 그러셨다고요?”
“네, 최근 들어 갑자기 조금 어두워지신 느낌이긴 하세요.”
그 말에 엘리제는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전에는 안 그랬는데, 최근 들어 그렇다고?
도대체 뭐지?
***
다시 며칠이 지났다.
수술을 받은 대공의 상태도 점차 좋아져 간단한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마.”
대공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근본적인 병이 치료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급한 고비를 넘겼으니 어느 정도 생명이 연장될 것이다.
‘이제 떠날 때가 됐구나.’
엘리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상트부르에서 보냈다. 린덴도 에드워드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밀. 도대체 무슨 일일까.’
엘리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떠나려니 미하일이 걸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이니까.
‘오늘은 꼭 제대로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이제 곧 출발해야 하니,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녀는 오늘 밤 연회에 기회를 봐서 미하일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결심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