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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94화 (외전 완) (194/194)

00194  3장 로마노프령에서 온 편지  =========================================================================

3장 로마노프 령에서 온 편지-4

그날 밤의 연회는 엘리제의 귀국을 배웅하는 행사였다. 화려한 것을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상 휘황찬란한 연회는 아니었지만 로마노프 령의 중요 인사들은 대부분 참석했다.

실질적으로 대공의 일을 대행하고 있는 미하일도 주최자로 참석했다.

“이대로 돌아가신다니 너무나 아쉽습니다, 마마.”

“다음에 폐하와 더불어 꼭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귀족들이 그녀에게 몰려와 인사를 올렸다.

엘리제는 부드럽게 웃으며 하나하나 인사를 받았다.

“네, 다음에 폐하와 함께 다시 한 번 방문하겠습니다.”

특별히 춤을 추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인사를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엘리제는 정신없이 바빴다.

모든 인물이 그녀와 한마디의 대화라도 나눠보기를 바랐던 것이다.

대공을 치료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는 사람, 고귀한 신분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그녀에게 감탄하는 사람, 로마노프 황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사람, 심지어 차후 브리티아 섬에 방문해 그녀에게 수술을 배워보고 싶다는 의사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웃음을 띤 채 하나하나 그들에게 답해 주며 엘리제는 시선을 돌렸다.

‘밀은?’

처음에 자신 옆에 있다가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연회장을 살펴보니 그는 홀 구석에서 홀로 서서 창밖을 바라고 있었다. 영애들이 흠모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훔쳐보고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듯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마침 고개를 돌린 미하일의 눈이 그녀와 딱하고 마주쳤다.

“……!”

엘리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과 마주친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던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했다.

‘내가 잘못 봤나?’

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왜?’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밀이 왜 자신을 보고 얼굴을 굳힌단 말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던 미하일은 조용히 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일이 또 있었다. 홀을 빠져나가기 전, 그가 다시 한 번 자신을 바라본 것이다.

‘뭐지?’

그냥 슬쩍 본 것은 아니었다. 어색함을 느낄 때까지 자신을 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홀 밖으로 사라졌다.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봤는지는 거리가 멀어 확실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상 오늘이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밤이었다.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꼭 들어봐야겠어.’

그렇게 결심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미하일을 향해.

***

미하일은 연회장 근처의 성벽 위에 상트부르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궁전을 감싸고 있는 성벽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시내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그를 뒤따라온 엘리제는 잠시 머뭇거렸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왠지 모르게 아릿했던 것이다.

“……밀?”

“아, 마마.”

미하일이 엘리제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예를 차렸다.

“여기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밀을 따라왔죠. 무얼 하고 있나요?”

미하일은 와인 병을 들어 흔들었다.

“술을 마시려 하고 있었습니다.”

“술이요? 여기서 혼자?”

“네, 그냥 갑자기 당겨서요. 야경이 멋지지 않습니까?”

엘리제는 그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과연 론도, 파리스에는 못 미칠지라도 서대륙 최고의 도시 중 하나라는 상트부르답게 멋진 야경이었다.

그녀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마마?”

“멋진 야경을 보니, 저도 한잔하고 싶네요. 부탁해요.”

“하지만…….”

엘리제는 곤란해하는 미하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전에 술 한잔 하기로 했잖아요. 설마 잊어버린 거예요?”

“……!”

이전, 그가 브리티아 섬을 떠나기 전을 뜻한다.

미하일의 눈동자가 잠시 추억을 더듬듯 아련해졌다.

“네, 알겠습니다.”

그가 잔을 구해와 그녀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 붉은빛의 와인이 달빛을 받아 넘실거렸다.

“프랑소엔 산인가요?”

“네, 아무래도 브리티아 산 와인은 제대로 맛이 안 나니까요.”

엘리제는 유리잔에 찰랑거리는 와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전 생각나네요.”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저희 처음 만났을 때요.”

“아…….”

미하일은 엘리제가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당시 그녀는 하버 공작부인을 기관절개로 구한 후, 황족 시해라는 누명을 쓰고 갇혔다가 우연히 미하일을 만났었다.

“그때도 프랑소엔 산 와인을 마셨었죠.”

당시 그녀가 몇 잔 마시지 못하고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나 미하일은 웃음을 지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와인을 들이켰다. 한 모금 맛을 보더니, 쭈욱.

“마마?”

“밀.”

한 번에 술을 들이켠 탓일까? 그녀의 하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 서운해요.”

“네?”

“서운하다고요, 저.”

“어떤……?”

엘리제가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전 밀을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밀은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저에게 거리를 두는 거예요? 힘든 일이 있으면서 말해주지도 않고.”

“힘든 일 없습니다.”

미하일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하지 마요. 계속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으면서! 난 계속 걱정되는데, 무슨 일인지 말도 해주지 않고.”

그녀는 그의 손에서 와인 병을 낚아채 자신의 잔에 따랐다. 그리고 다시 쭈욱 들이켠 후 말했다.

“저에게 밀은 정말 소중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

그 말에 미하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하일은 엘리제를 바라봤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이 눈치 없는 여자.’

미하일은 속으로 한탄했다.

자신의 얼굴이 왜 안 좋았겠는가. 왜 일부러 거리를 두었겠는가. 모두 그녀 때문이거늘.

‘하아. 역시 안 되는구나.’

지난 5년간 그녀가 보고 싶었다.

저 하늘을 나는 새처럼 그토록 원하던 여행을 할 때도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잊으려고 노력했으나 잘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많이 마음을 추슬렀다고 생각했는데. 5년이나 지났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5년 만에 그녀와 재회한 순간, 잔잔하던 마음은 다시 해일을 만난 듯 흔들렸다.

그리움이 쌓인 탓일까? 오히려 이전보다 더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감정이 조절되지 않아 이전처럼 친근하게 그녀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서운할 거로 생각했지만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밀은 저를 소중하다 생각하지 않는 건가요?”

그 물음에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아닙니다. 저도 마마를 소중한 친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그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소중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전혀.

“그런데 왜…….”

“사실 고민이 있었습니다.”

미하일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고민이요?”

“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거든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거짓말이다. 그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고 있다. 남은 삶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려 시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서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가요?”

엘리제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미하일은 맞는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네, 그래도 마마가 걱정해 주신 덕분인지 마음이 한결 낫군요. 역시 기적의 명의, 등불을 든 여인답습니다.”

그러며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정말 다른 문제는 없는 거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이래 봬도 검제입니다. 나름 엄청 멋진 놈이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하니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얼굴의 어두운 기색이 덜해졌다. 이전의 밀과 같았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주세요. 저희는 친구니까요.”

그 말에 밀이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마마.”

“네?”

“저희는 친구이지요?”

“당연하죠.”

“그러면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

그런데 그의 부탁은 생각지 못한 의외의 것이었다.

“저와 함께 춤을 한번 춰주시겠습니까?”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웬 춤?

“춤이요?”

“네.”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등불을 든 여인과 춤을 추면 그 기운을 받아 뭐든지 잘 될 것 같아서요.”

“그게 뭐예요.”

“어쨌든 안 되겠습니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춤이야, 어려울 것 없었다.

“그러면 연회장으로 돌아가서.”

하지만 미하일은 그녀를 성벽 밑의 정원으로 이끌었다.

“안은 번잡하니 추고 들어가죠.”

“여기서요?”

“싫으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제가 사실 야밤에 달빛을 받으며 춤을 춰보고 싶었거든요.”

“그, 그게 뭐예요.”

“진담입니다.”

농담 같은 말을 진담같이 한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에게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겠습니까, 레이디?”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게 정원에서 둘만의 춤이 펼쳐졌다. 달빛 외에는 특별한 배경 음악도 없었지만 아름다운 춤이었다.

곧 춤이 끝나고, 미하일은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영광이었습니다, 레이디.”

짧은 춤을 추었건만 어딘지 홀가분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도 기분이 조금 나아 보이니 다행이긴 한데.

“이제 들어가시죠, 마마.”

“네.”

미하일은 그녀를 연회장으로 에스코트하였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밀은요?”

“달빛이 맑아, 조금만 더 보다 들어가겠습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미하일은 씁쓸히 웃었다.

“역시 사랑은 아프단 말이야.”

얼마나 지나야, 이 아픔이 식을까.

1년, 2년, 아니면 5년? 아니면 계속?

알 수 없었다.

“형님이 부럽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다음날, 엘리제는 상트부르를 떠나는 배에 올라탔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마마.”

미하일이 그녀를 마중하며 인사했다.

“네, 밀. 고마워요.”

엘리제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그의 얼굴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밀.”

“네, 마마?”

“정말 괜찮은 거죠?”

미하일은 미소 지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가 걱정해준 덕분에 다 좋아졌습니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안 좋은 일 있으면, 편지하세요. 꼭 몸 챙기고 건강하고요.”

엘리제는 마치 친가족을 챙기듯 몇 번이고 당부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 인제 그만 들어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의 모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그만 가볼게요.”

그리고 그녀가 등을 돌리고 배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문 미하일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마마!”

“밀?”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에…… 시간이 많이 지나도 좋으니, 언제 다시 한 번 로마노프 령에 방문해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형님과 같이 오셔도 좋으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다시 올게요.”

그 대답에 미하일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태운 증기선이 상트부르 항을 떠나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멀어지는 배의 모습을 보며 미하일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행복하길. 내 사랑하는 이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자신을 얼마나 더 괴롭힐지 모르는 사랑이지만.

그래도 그는 기원했다.

영원히 행복하길. 아프지 않고, 축복과 웃음만이 가득하길.

왜냐면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이니까.

그렇게 그는 기도했다.

============================ 작품 후기 ============================

외전이 끝났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정식 후기는 본편이 끝났을 때 썼으니, 이번엔 편하게 후기를 써보겠습니다. 약간 주절주절, 두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1. 개인적으로 엘리제를 조아라에 연재하면서 느꼈던 감정은 '고마움'이었습니다. 독자분들이 너무나 따뜻하셔서, 많이 감동했어요.ㅠㅠ

사실 전작인 메디컬 환생을 타사이트에서 연재할 때는 워낙 욕을 많이 먹어 상처가 컸는데, 조아라에서 연재할 때는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중간에 유료 전환할 때 진통이 있긴 했지만, 제가 미숙했던 탓이라 생각합니다. 그부분은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2. 그리고 여러 독자분들이 지적해주신, 도대체 네이밍이 왜 그러냐, 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ㅠㅠ 제가 네이밍 센스가 극악이어서 이름 지을 때 구글 어스 보면서 베끼면서 짓다보니... 어쩌다보니 가상의 지구가 탄생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나름 글 분위기와 어울리는 것 같아;;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다만 조금 놀랐던 것은 클로랜스 가와 대연금술사 플레밍은 어디서 베끼지 않고 그냥 생각했던 건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항생제를 발명한 알렉산더 플레밍과 너무 흡사해서 흠칫 놀랐습니다.

3. 쓰다가 생각한 건데 참 미남, 미녀가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인형 같은 미녀 엘리제,

도도한 미녀 유리엔,

조각 같은 미남 린덴,

꽃 같은 미남 미하일,

보석 같은 미남 렌,

크림 같은 미남 크리스,

까칠한 미남 그레이엄,

위험한 미남 루이,

이 미남미녀들을 한자리에 늘여놓으면 참 볼 만하겠단 생각을 해봤습니다^^;; (미남들에 비해 미녀들이 적은 것은 함정입니다. 저도 외전 쓸 때 알았는데, 엘리제와 유리엔 빼고는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가 단 한 명도 없더라고요.;;)

어쨌든 이들과 함께 했던 외과의사 엘리제가 독자분들께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드렸다면 작가로서 크게 기쁘겠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감사했고, 앞으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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