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돌아오다(2)
웨이드 밀러
나보다 한 살 어린 20살의 나이로 최대 98마일의 빠른 공과 87마일의 슬라이더를 구사하는 188cm의 우완투수. 리그 평균자책점이 4점대인 이곳에서 홀로 1.78이라는 터무니없는 평자책을 기록 중인 이 괴물은 ‘위로 올라가는 재능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젠장.”
덕아웃으로 돌아온 데이빗 녀석이 방망이를 집어 던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머저리는 또 왜 저래. 저렇게 아쉬워할 만큼 제대로 상대한 것도 아니더구만.”
“나름대로 빠른 공에 자신이 있는 녀석인데 저렇게 당한 게 아쉬운거겠지.”
“빠른 공이라고 다 같은 빠른 공인가.”
프레스톤의 말이 맞았다. 사실 루키나 하위 싱글 A 혹은 싱글 A에도 100마일의 공을 던지는 녀석들은 종종 존재했다. 다만 그 녀석들과 저 웨이드는 분명 차이가 존재했다. 제구력. 그저 존 안에 집어넣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하는 그 머저리들과 달리 웨이드의 98마일 속구는 존의 안팎을 공략했다.
“저 녀석 대체 왜 아직도 플로리다 리그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휴스턴 투수들 요새 별로라고 하더구만. 저 정도면 빠르게 콜업해서 메이저까지 끌어올려야 되는 거 아니야?”
“저 녀석 우리 리그 온 지 석 달 밖에 안됐어. 2년 차가 상위 싱글A에서 던지고 있으면 충분히 빠르지 뭐.”
실제로 내가 경험한 미래에서 저 웨이드 밀러는 올 시즌 플로리다 리그를 박살 내고 내년 더블 에이 역시 폭격한 뒤 빅리그로 바로 콜 업 된다. 그리고 몇 년 정도 마이너와 빅리그를 오가는 생활을 한 끝에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선발투수로 활약한다.
부웅,
브라이언의 배트가 멋지게 허공을 갈랐다. 우완투수인 웨이드 밀러를 상대하기에 우타자인 브라이언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밀러의 유일한 변화구인 슬라이더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뭐 나야 상관없지만 말이지.’
슬라이더라는 구종이 나타난 이후, 이 공이 변화구의 왕 자리를 내놓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끔 스플리터라든지 커터 등의 구종들이 반짝 빛났지만 결국 가장 위력적인 변화구는 언제나 슬라이더였다.
빠른 구속, 적당한 종 변화, 그리고 효과적인 횡 변화가 가미된 슬라이더는 같은 손 타자에게는 말 그대로 최종병기나 다름없었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파고드는 공에 손이 나가지 않는 타자는 드문 법이고, 슬라이더는 같은 손 타자들을 기준으로 했을 때 가장 스트라이크를 닮은 볼이었으니 말이다.
타석에 들어서서 가볍게 배트를 움켜쥐었다. 2회 말 2아웃 주자 없음. 자신들의 투수를 믿어서인지 그라운드에 나와 있는 야수들의 표정이 평안했다.
부웅
“스트라잌!!”
97마일 강속구가 홈플레이트 외곽 슬쩍 걸친 곳을 정확하게 스쳤다. 아무래도 오늘 웨이드 밀러의 컨디션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닌 듯싶었다. 다시 한 번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밀러. 배트를 움켜쥔 나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웨이드 밀러, 와인드업!!]
밀러의 손을 출발한 하얀 공. 97마일이라는 무시무시한 속도에 맞춰 나의 몸은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안 돼!’
하지만 조금 멀었다. 직전 공보다 한 개 이상 더 밖으로 빠진 공. 이미 반쯤 돌아간 나의 몸이 그럭저럭 멈춰섰다. 다행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포수가 3루심을 향해 어필했지만 그것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잠시 타석 밖으로 나와 땀으로 축축한 장갑을 동여 맺다.
[올 시즌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웨이드 밀러를 상대로 Kang이 살짝 빠진 공을 잘 참아냈습니다.]
마운드에 선 밀러의 육중한 왼 다리가 올라갔다. 유니폼을 터트릴 것처럼 부푼 허벅지. 마침내 그의 오른손에서 하얀 공이 출발했다. 조금 전 내가 배트를 멈춘 코스와 별 차이 없는 코스로 날아드는 공. 이번에도 역시 나의 배트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Kang 강한 스윙!!]
이후 AA 리그까지 초토화시키며 빅리그로 콜업됐던 밀러는 무려 3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빅리그와 마이너를 전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단조로운 레퍼토리. 그리고 과다한 자신감. 본질적으로 다른 손 타자에게 슬라이더란 일종의 블러핑이었다. 치기 어려운 척하는 치기 쉬운 공. 하지만 밀러는 자신의 단조로운 레퍼토리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손 타자에게 그 블러핑을 종종 구사하곤 했다.
따악!!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 큽니다. 큽니다!! 담장, 담장 넘어갔습니다. 홈런. 2회 말 세인트루시 메츠의 Kang이 밀러의 슬라이더를 완벽하게 당겨쳐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들어오는 공이 백도어성 슬라이더라는 사실만 미리 인지하고 있다면 그걸 쳐내는 것 정도는 상위 싱글 A의 그저 그런 타자라 해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뭐, 녀석이 외곽 쪽 빠른 공을 참아낸 좌타자에게 백도어성 슬라이더를 던지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와우!!”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온 나에게 동료들의 애정 어린 손바닥이 쏟아졌다. 물론 그중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섞인 손바닥도 있었지만, 애당초 질투라는 것이 자신보다 잘나가는 상대에게 품는 감정인 만큼 그것이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방금 어떻게 된 거야. 홈런이라니. 그것도 밀러를 상대로.”
“뭐 운이 좀 좋았지.”
“운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너 지난 2년간 거의 200경기를 뛰면서 기록한 홈런이 고작 4개잖아. 게다가 머저리 루크를 상대로 2개 몰아친 걸 제외하면 고작 2개뿐이라고. 대체 뭘 감춰둔 거야?”
“글쎄? 천재적인 재능?”
“천재적인 재능? 내가 야구를 시작하고 들어본 이야기 중 가장 웃긴 이야기로군.”
천재적인 타격 재능이라니. 내가 말해놓고도 조금 웃긴 이야기이기는 했다. 뭐, 어린 시절 한국에서 뛸 때만 하더라도 전무후무한 5툴 플레이어의 재능이라 칭송받았었지만, 이곳 메이저에서 나의 타격이란 그저 평범을 살짝 웃도는 수준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타격 폼이 완전히 달라졌던데, 갑자기 무슨 짓을 한 거야?”
“테일러랑 이야기해둔 게 조금 있어서 말이야.”
“캐피탈 시티 봄버스의 타격 코치인 테일러 말이야?”
“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의 테일러가 아닌 이젠 벌어지지 않을 미래의 테일러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전후방 십자인대의 파열 이후 본래 가지고 있던 운동능력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 나에게 테일러는 슬러거로의 변신을 권했었다.
“Kang, 넌 할 수 있어.”
물론 재활과 방황으로 20대 초중반을 날려버린 내가 기적처럼 재기에 성공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내가 생각하던 나의 이상적인 형태보다 더 나은 형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정도는 목격할 수 있었다.
“자자, 우리 수비할 차례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나가자고.”
비록 나에게 홈런을 허용하긴 했지만 밀러는 역시 밀러였다. 이어지는 후속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그가 분한 눈빛을 나에게 쏘아 보내며 벤치로 돌아갔다.
마운드에 선 우리 투수의 이름은 댄 머레이였다. 올해 23살의 그는 작년에 이어 올해로 2년째 세인트 루시 메츠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였는데, 특별히 모난 구석이 없는 제법 괜찮은 투수였다. 고작 어드밴스드 싱글 A에서 모난 구석이 없는 제법 괜찮은 투수라는 말은 결코 칭찬은 아니지만 말이다.
따악
이름 모를 키시미 코브라의 타자가 쳐낸 타구가 두둥실 떠올랐다. 큼지막한 타구였다. 최소한 2루타, 만약 발이 아주 빠른 타자라면 3루까지 노릴법한 강한 타구. 하지만 키시미 코브라 팀 주루코치의 손은 돌아가지 않았다.
뻐엉!!
[와우, 이건 정말이지 언제봐도 대단합니다. Kang.]
[정말이지 속이 다 시원해지는 송구예요. 속도, 정확성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부분이 없습니다.]
[저 선수가 리그에 콜업된 초창기에는 제법 많은 보살을 만들어냈었습니다만, 최근에는 보살을 거의 보기 힘들어요.]
[당연한 일입니다. 저런 중견수가 상대편에 있는데, 뇌가 제 자리에 있다면 무리한 주루 플레이를 할 수가 없지요.]
[정확한 송구속도는 측정이 안 됩니다만, 제가 보기엔 거의 100마일은 될 것 같은 송구였습니다.]
빠른 타구판단과 이어지는 강력한 송구. 2루타를 단타로 묶어버리는 플레이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팀에서 가장 기대받는 유망주 중 하나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저 멀리 마운드의 머레이가 나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머레이는 분명 그리 대단한 투수는 아니었다. 88마일에서 92마일 사이에 형성되는 빠른 공, 나쁘지 않은 슬라이더와 커브. 그리고 좋지 못한 체인지업.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훗날 빅리그까지 콜업되는 것은 바로 저런 겸손한 성품 덕분일 것이다.
‘물론 거기에다 불펜 투수라는 게 소모품으로 자리 잡은 덕분이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경기는 이어졌다. 웨이드 밀러는 여전히 압도적인 피칭을 보여주었고, 머레이는 꾸역꾸역 이닝을 틀어막았으며 나는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리고 8회 말.
따악!!!
[윌슨, 강한 타구. 담장, 담장 넘어갔습니다!!]
[8회 말 프레스톤 윌슨이 큼지막한 석점포를 쏘아 올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승부의 추는 우리 세인트루시 메츠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석 점 홈런을 기록하고 돌아오는 프레스톤을 향해 팀 동료들이 달려나갔다. 2:2로 팽팽한 가운데 터져 나온 석 점 홈런이었다. 모두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뚱한 것은 오직 홈런의 주인공 프레스톤뿐이었다.
“어이, 프레스톤. 간만의 홈런이잖아. 조금 더 기뻐하라고.”
“젠장, 홈런은 무슨. 오늘도 밀러 놈한테 3타수 무안타라고.”
프레스톤은 결코 부족한 타자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해온 녀석은 언제나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망주였다. 단지 오늘 밀러의 피칭이 정말 대단했을 뿐이었다. 녀석은 6회 말 투구수 제한으로 강판당할때까지 압도적인 피칭을 선보였다. 나도 역시 5회 말 타석에서 안쪽 빠른 공을 예측했음에도 제대로 쳐내지 못해 범타로 끝이 났다.
“진호, 저 녀석은 역시 위로 올라가겠지?”
“당연하지. 솔직히 우리 리그에서 저 녀석이 안 올라간다면 올라갈 투수는 없다고 봐야지.”
“다음번에는 그러면 AA에서인가?”
“글쎄, 어쩌면 빅리그일지도 모르지.”
“젠장, 빅리그라, 우리가 올라갈 수 있을까?”
프레스톤의 질문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90년대 후반, 그리고 2000년대 초중반의 MLB가 얼마나 더러웠으며, 또한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그리고 그 찬란한 세계에서 웨이드 밀러라는 투수가 얼마나 빛났었는지. 그리고 눈앞의 이 멍청해 보이는 프레스톤 녀석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항상 생각했었다. 만약 그 날의 부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나는 그들만큼이나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빅리거? 이봐 프레스톤. 난 연봉으로 3천만 달러를 받는 슈퍼스타가 될 거야. 그리고 매년 새로 나오는 페라리와 포르쉐로 차고를 가득 채워서 나중에 스포츠카 박물관을 열 거라고.”
“3천만 달러? 왜? 아예 뉴욕 양키스를 통째로 산다고 하지 그러냐?”
“큭큭큭, 진짜 그래 볼까?”
그리고 나의 상상 속에서 정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이제까지 존재한 모든 야구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야구선수가 되는 것.
“미래에 양키스의 구단주에게 미리 잘 보이려면 지금부터 잘해야겠네. 가자.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케이시네 집으로?”
“그래, 케이시네 집으로.”
뭐 일단 오늘은 부잣집 아들내미의 블랙 카드로 새로운 인생의 성공적인 첫 홈런을 자축하는 것부터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