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4화 (4/210)

# 4화.

위험한 유혹(1)

일반적으로 마이너리거에게 제공되는 아침 식사란 상당히 처참했다. 물론 1라운더들의 경우 100만 달러에 이르는 계약금을 지급 받는 만큼 사비로 제법 괜찮은 식사를 할 수도 있었다, 빠른 시간 내로 빅리그로 콜업되서 수십만불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만 된다면 말이다. 기본적으로 야구선수란, 그것도 용품 스폰서를 받지 못하는 야구선수란 정말 많은 돈이 들어가는 직업이었고, 마이너에서 몇 년을 구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침 식사에 돈을 펑펑 쓴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짜잔!!”

“오, 프레스톤.”

“많이 먹고 더 먹으라고. 아버지가 이번에도 두 박스나 보내주셨으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이런 룸메이트를 만났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은퇴 후 텍사스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프레스톤의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식료품을 보내주셨는데 덕분에 우린 매일 아침 두께가 2cm는 될 것 같은 두툼한 베이컨과 신선한 우유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

‘일단 몸을 키워야 해.’

과거 나는 몸을 불린다는 사실에 굉장한 거부감, 혹은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이는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반 한국 야구라는 것이 결국 일본 야구의 마이너와도 같았다는 점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정확한 자세로 타격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거기에 필요한 근육은 따라오기 마련이며, 혹독한 펑고를 하다 보면 수비에 필요한 근육 역시 저절로 생긴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의 레벨까지 기록될만한 혹독한 훈련이다. 쓸데없이 불린 근육은 순발력과 유연성, 그리고 속도를 떨어트려 결국 선수의 기량을 저하시킨다.’

얼핏 보기엔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개소리지.’

결국,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모든 힘의 근원은 근육이었다. 가장 폭발적인 속도를 내는 단거리 육상선수의 몸만 보더라도 그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물론 유연성 부분에서는 근육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관절의 가동범위가 제한받는 일이 발생할 수 있지만,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몸을 불린다면 그것 역시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몸을 키운다는 것이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뚝딱 해결될 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적절한 영양공급과 체계적인 운동 그리고 휴식이 필요했다. 얼핏 보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조건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원정 경기가 있는 날에는 왕복 5시간씩 버스로 움직이고, 일주일에 5, 6일씩 경기를 뛰어야 하는 마이너리거에게는 아주 힘든 조건들이었다. 물론 해결방법은 있었다.

“연 1만 달러라고요?”

“기본은 주 2회고, 추가 요금이 붙습니다.”

“맙소사.”

돈이었다.

계약금으로 받았던 90만 달러의 상당 부분은 세금, 그리고 감독님, 코치님의 선물로 사라졌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나에게는 제법 큰 돈이 남아 있었다. 물론 흥청망청 쓸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돈 쓸 일이 많을 거라며 부득불 아무것도 받지 않으셨던 부모님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연간계약은 곤란합니다.”

“월 단위로 계약하시면 매달 1.200달러씩입니다.”

“주 4회. 2천 달러로 하죠.”

하지만 부모님이 말씀하시던 이 돈의 가장 올바른 사용처는 바로 이런 일일 것이다.

***

“자자, 이 굼벵이들아, 내가 가서 그 크고 무거운 엉덩이를 직접 걷어 차주기 전에 얼른얼른 버스에 탑승하라고.”

“젠장, 엘리엇. 아직 4시간이나 남았잖아요. 어차피 데이토나까진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요.”

“오, 데이빗. 멍청한 데이빗. 저번에도 그러다가 중간에 차가 퍼져서 밥도 못 먹고, 연습도 못 한 채 부랴부랴 경기했던 걸 좀 기억해줬으면 좋겠구나.”

“그러게 그놈의 고물 버스 좀 바꾸자니까요. 플로리다 리그에서 아직도 그런 고물 버스를 쓰는 팀은 우리 팀밖에 없을 겁니다.”

오후 1시. 늦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가볍게 몸을 푼 우리는 털털거리는 고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최근 플로리다 리그에선 몇몇 팀들을 시작으로 더 크고 편안한 좌석으로 이뤄진 고급 버스로의 교체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우리 팀의 버스는 만든 지 20년은 돼 보이는 불편하고 낡은 버스였다.

“진호, 요새 운동은 좀 어때?”

“뭐 나쁘지 않아. 몸무게도 조금 늘었어. 한 3파운드 정도? 관심 있으면 너도 소개해줄까? 같이 그룹으로 받으면 할인도 조금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오, 노노. 사양하겠어. 그런 과도한 웨이트는 비시즌 중에 하는 거로 충분하다고. 안 그래도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눈에 불을 켜고 운동을 시키는데, 시즌 중에라도 충분히 쉬어둬야지.”

버스를 타고 3시간을 이동한 끝에 데이토나에 도착했다. 다행히 오늘은 버스가 무사히 버텨주었다. 부디 밤에 숙소로 돌아갈 때도 잘 버텨주기를.

오늘 우리의 상대는 플로리다 리그 동부지구 2위를 달리고 있는 데이토나 컵스였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 시카고 컵스의 산하 팀이었는데, 89년 이후 꾸준히 하위권을 전전하는 시카고 컵스와 달리 데이토나의 성적은 몇 년째 리그 최상위권에 위치하고 있었다.

[Go Kevin Go!!]

게다가 오늘 경기의 선발은 리햅을 위해 잠시 마이너로 내려온 케빈 타파니였다. 4,200석 규모의 재키 로빈슨 필드가 관중들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었다.

“저게 빅리거라 이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닌데?”

“흐음, 글쎄.”

저 멀리 포수와 공을 주고받는 케빈 타파니의 모습이 보였다. 올해로 33살. 빅리그 풀타임 9년 차 선발투수의 공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직 가볍게 어깨를 푸는 거겠지. 그래도 지난 8년간 빅리그에서 100승 가깝게 올린 투수잖아.”

“아니면 늙고 부상 당해 이제 메이저급의 선수가 아닐지도 모르지.”

“글쎄, 신문에서 보기론 아직 그리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하던데.”

“쳇, 겁쟁이 같으니라고.”

“근거 없는 자신감보단 신중한 게 낫지.”

***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케빈 타파니의 압도적인 피칭. 세인트 루시 메츠의 타자들을 완벽하게 막아냅니다.]

[타파니 선수, 아무래도 몸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돌아온 것 같습니다. 구속은 조금 부족합니다만 커브가 아주 완벽해요. 사실 마이너 레벨에서 저런 완벽한 커브를 본다는 건 쉽지 않거든요.]

“젠장,”

허무하게 삼구 삼진으로 물러난 프레스톤이 자리에 주저앉아 스키틀즈를 한 움큼 입안에 욱여넣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3구 연속 커브볼. 아마 프레스톤으로선 눈뜨고 코 베인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뻔히 커브가 오는 것을 예상했음에도 쳐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다 같은 커브가 아니야. 공 세 개가 전부 다 달랐어. 젠장. 커브인 걸 뻔히 알았는데.”

“공의 낙차를 조절하는 건가?”

“낙차 말고도 구속, 횡 무브먼트도 달랐어. 아예 그립이 다른 커브를 몇 가지 구사하는 것 같아.”

“빅리거는 빅리거라 이거네.”

“그래도 속구는 90마일도 안 되는 것 같긴 한데.”

빠르게 흘러가는 경기. 어느새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180이 살짝 넘는 작은 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 위, 매서운 눈빛을 보내는 타파니는 거대했다. 매년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던 빅리그의 위대한 선발투수.

‘후우.’

하지만 고작 이런 곳에서 쪼그라들 수는 없었다. 그렇게 쪼그라들기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운드로 향했다. 타파니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거인이 아니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결코 두려움이 아니었다. 굳이 정의 내린다면 이것은 설렘에 더 가까우리라.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저 투수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인지를. 아메리칸리그에서 8년간 100승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았어. 해 보자.’

하지만 또한 동시에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경쟁하겠다 마음먹은 이들은 저 타파니 조차도 감히 비교할 수 없을 가장 위대한 거인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야구 역사상 가장 빛나는 별들이 동시에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는 찬란한 시대.

그리고 그 시대의 앞에서 타석에 선 나의 배트가 우뚝 섰다.

마운드. 타파니의 왼쪽 다리가 슬쩍 올라왔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쓰리 쿼터 쓰로잉. 누런 공이 그의 손을 떠나 홈플레이트를 향해 쏘아졌다. 약간 높은 코스로 날아드는 공.

‘커브인가?’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부웅!!

“스트라잌!!”

[스윙!! 스트라이크!! 타파니의 폭포수 같은 커브에 Kang의 배트가 끌려 나왔습니다.]

[방금 이건 타파니 선수의 커브를 칭찬할 수밖에 없겠네요. 거의 20인치는 떨어진 것 같습니다.]

‘덕아웃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위력적이야. 역시 빅리거는 빅리거라 이건가?’

루키나 싱글A에서 가끔 보던 허접스러운 커브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 아직 제대로 된 변화구를 상대해본 적 없는 프레스톤 녀석이 삼구 삼진을 당할만한 공이었다.

‘하지만 해볼 만해.’

손을 들어 잠시 배팅 박스에서 물러나 루틴에 따라 옷깃을 가볍게 털고 배팅 장갑을 조여 맸다. 요동치던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배팅 박스로 다시 들어서자마자 시작되는 타파니의 부드러운 투구 동작. 그리고 그런 타파니의 피칭모션에 맞춰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나의 근육이 일순간 폭발했다.

따악!!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저려 오는 손끝의 감각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큭, 조금 얕았어.’

프레스톤의 이야기가 맞았다. 타파니는 커브의 낙폭을 제법 크게 조정할 줄 알았다. 앞선 공을 보고 예측했던 위치로 휘두른 배트를 크게 비껴간 코스. 손목을 틀어 억지로 비켜 맞춘 공이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볼카운트 0-2.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카운트. 마운드의 타파니가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하나 정도는 빼겠지?’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볼카운트. 그리고 커브볼러. 상식대로라면 공 하나 정도는 낮게 빼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다면?

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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