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위험한 유혹(2)
[맙소사!! 쳤습니다!! 세인트루시 메츠의 Kang. 1루로 달립니다. 빠릅니다. 빨라요!! 유격수 호세 니베스!! 1루로 공을 던져보지만 늦었습니다.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와우, 저 선수 정말 빠릅니다. 방금 이건 누가 봐도 그냥 내야 땅볼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안타로 만들어 내네요.]
[방금 한 3,7초? 3.8초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요. 호세 니베스 선수의 커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이건 그냥 Kang이 너무 빨랐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방금 Kang이 친 공, 원바운드 된 공이었거든요. 투수로서도 타자가 저런 공을 쳐 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이렇게 되면 타파니 선수 조금 골이 아프겠어요. 현재 27개로 도루 공동 5위를 달리는 Kang입니다. 주루 센스가 좋은 빠른 주자가 누상에 있는 것만큼 투수 신경을 건드리는 게 없거든요.]
완벽한 어퍼 스윙. 그것도 하이패스트볼 혁명이 일어나기 전 유행에 맞춰진 타격폼이었다. 낮은 코스라면 설사 존을 조금 벗어난다 하더라도 쳐낼 자신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원바운드된 공을 쳐 낸 것은 어느 정도 운이 따른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장갑과 발목보호대를 벗어 1루 코치 엘리엇에게 건넸다.
“Kang, 잘했어.”
슬쩍 내 엉덩이를 두들기는 엘리엇. 마운드에 선 타파니의 시선이 따가웠다. 별것 아니라 생각하던 싱글 A의 타자에게 자신의 커브를 공략당한 것이 어지간히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네가 기분이 나빠 준다면 나야 좋지.’
네 걸음. 물론 무게중심은 살짝 1루 쪽에 더 기울인 네 걸음이었다. 타석에 선 후속 타자를 노려보던 33세의 노련한 투수. 타파니의 오른손이 번뜩했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Kang!! 여유로운 귀루. 저 선수 정말 빠릅니다.]
[방금 리드폭이 제법 컸거든요. 그런데 슬라이딩조차 하지 않았어요.]
타파니의 견제 동작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나쁘지 않은 견제 동작으로 나를 잡아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의 견제구는 내 예상보다 더 느렸다.
네 걸음 반. 나의 리드폭이 조금 넓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파니의 심기가 한층 더 불편해진 것이 느껴졌다.
뻐엉!!
[2구 연속 견제구. Kang 가슴의 흙을 털어내는 자세가 아주 여유롭습니다.]
유니폼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네 걸음 반. 마운드의 타파니가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뻥!!
“스트라잌!!”
타자를 상대하면서도 나를 힐끔 바라보는 타파니. 슬금슬금 움직이는 나를 향한 그의 짜증이 그 눈빛에서 여실하게 느껴졌다. 또다시 날아든 견제구, 그리고 또 견제구. 나의 앞섬이 흙먼지로 누렇게 변색 됐다. 만약 우리 한국이었다면 관중들의 야유가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집요한 견제구. 네 걸음 반을 유지하던 나의 리드폭이 네 걸음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타파니의 공이 그의 손을 떠나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Kang!! 달립니다!!!]
네 걸음의 리드 폭. 하지만 80마일을 오가는 커브가 레퍼토리의 대부분인 투수를 상대로 나의 반걸음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투수의 피칭 타이밍. 그리고 마음가짐이었다. 더욱이 겉보기엔 별 차이 없었지만, 나의 무게중심은 이미 2루를 향해 크게 기울어있었다.
[완벽한 타이밍!! 호세 몰리나, 재빨리 2루로 송구하지만 늦었습니다. 도루 성공. Kang이 시즌 28번째 도루를 성공시킵니다.]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언제든지 달릴 수 있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출루해서 마운드의 투수를 흔들고 도루까지 성공했다. 누상에 나온 주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거기까지였다.
루킹 삼진.
그리고 내야 땅볼.
3회 초, 우리 팀의 공격이 허무하게 끝났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하지.”
“아니요. 조금만 더 던져보겠습니다.”
“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충분한 것 같은데.”
최근 타파니는 자신의 몸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이건가?’
젊은 시절 97마일을 오가던 그의 강속구는 이제 온데간데없어졌다. 하지만 세월은 공평하여 그에게 불같은 강속구를 뺏어간 대신 그만큼의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의 능수능란한 커브는 바로 그 경험의 결정체였다.
“커브에 감이 약간 부족한데 조금만 더 던져보면 확실히 느낌이 올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해 보이긴 한다만, 오케이. 대신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고. 지금 위에선 자네를 빨리 올리라고 난리도 아니야.”
“알겠습니다.”
상대 팀, 노란 얼굴의 7번 타자. 묘한 느낌이었다. 물론 기분 같아선 확 빈볼이라도 하나 안겨주고 싶을 만큼 재수 없던 주루 플레이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분명 녀석은 타석에서부터 묘하게 이상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뭐 별건 아니겠지만 말이지.’
신, 악마. 혹은 괴물 같은 이들이 그득한 메이저리그. 그곳에서 무려 10년을 버텨 온 노장이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또 한 번 마운드에 올랐다.
***
[아, 타파니 선수, 5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오네요. 리햅경기인 만큼 슬슬 마운드를 교체할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죠. 조금 의외입니다.]
[어떤 투수들은 리햅이라고 해도 충분히 던지는 걸 선호하니까요. 아무래도 앞선 이닝들이 너무 쉽게 끝났던 만큼 아직 어깨가 덜 풀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5회 초 우리의 공격이 돌아왔다. 타순은 5번 데이빗부터였다. 3회 초, 나의 내야안타를 제외하고는 아직 단 한 명도 출루하지 못한 상황. 타석의 데이빗 놈의 배트가 시원하게 풍차를 그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스트으라잌!!!”
삽시간에 정리되는 선두타자들. 그리고 어느새 나의 두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5회 초, 투아웃 주자 없음.
현재 나의 타격 자세는 본래 이 시절 내가 구사하던 폼과는 조금, 아니 아주 달랐다. 본래 나의 타격 자세는 다운스윙에 가까웠다. 궤적에 공이 들어오는 타이밍이 약간 어긋나더라도 어떻게든 공을 건드려 출루하는 형태. 주루 능력에 자신이 있었기에 택했던 방법이었다. 또한, 지금은 NPB의 오릭스에서 한참 골목대장 노릇을 하고 있을 이치로가 이야기했듯 2할 2푼에 40홈런 타자를 노리기보다는 3할 5푼의 타자를 노리는 쪽이 더 이상적이라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멍청한 생각이었다.
부상으로 절망하던 시기 테일러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헛소리라 여겼다. 시간이 흐르고 빌리 빈의 마법, 그리고 세이버메트릭스의 대중화가 이뤄진 이후에서야 그의 말이 옳았음을 알게 됐지만 말이다.
‘2할 2푼에 40홈런 타자가 3할 5푼의 타자보다 안 좋다고? 헛소리!!’
부웅!!!
“스트라잌!!”
결국, 야구는 점수를 내는 쪽이 이기는 경기였다. 그리고 타율은 점수와의 상관계수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실제 점수와 가장 크게 직결되는 스탯은 다름 아닌 OPS. 즉 출루율과 장타율이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높은 타율은 높은 출루율 혹은 장타율과 직결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기존 나의 스윙은 출루율은 몰라도 장타율을 높일 수는 없는 형태였다.
뻐엉!!
[볼카운트 1-1. Kang이 잘 참아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외곽을 긁고 지나가는 공이었거든요. 원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이런 공을 참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지금 이건 심판의 존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군다나 맞추기 급급한 스윙의 타자를 상대할 땐 과감한 투수들도 한방이 있는 타자들을 상대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선구안을 갖춘 2할 2푼에 40홈런 타자는 아무 공에나 배트를 휘두르는 3할 5푼의 똑딱이보다 더 좋은 타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악!!
[1루 내야석 깊숙한 곳에 떨어지는 파울 타구!! 저 선수 스윙이 굉장히 호쾌하네요.]
[타점이 아주 조금 어긋난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맞았더라면 아주 큼지막한 타구가 됐을 텐데, 메츠로써는 아주 아쉬운 순간이네요.]
물론 지금 내가 2할 2푼에 40홈런을 치는 타자는 아니지만 말이다.
‘조금 모자랐어.’
공의 궤적은 거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배트 헤드가 돌아가는 속도가 조금 늦었다. 잠시 물러나 장갑을 고쳐매며 조금 전 박자감을 되새겼다. 기분 탓이었을까? 마운드의 타파니가 슬쩍 웃는 것으로 보였다.
‘자 와라.’
마운드의 타파니가 와인드업하는 모습이 똑똑하게 들어왔다. 손끝을 따라 솟구치는 공. 이번에도 커브였다. 나의 배트가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아니야!!’
분명 타파니의 손에서 튀어나온 공의 초기궤적은 커브의 그것이었지만 달랐다. 불길한 감각이 나의 등허리를 쭈뼛 잡아당겼다. 이미 돌아가기 시작한 몸통을 강제로 돌려세웠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관성을 따라 튀어나가는 배트. 배트를 멈춰 세우기 위해 힘을 준 손목이 뻐근했다.
뻐엉!!
[아, 배트가 돌아간 것 같은데요?]
[아뇨, 적절하게 잘 멈춰 선 것 같습니다. 역시 주심도 손을 올리지 않습니다.]
[호세 몰리나 포수 3루심에게 어필해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네요. 볼, 볼입니다.]
볼카운트 2-2.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보통 커브와 속구는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노련한 투수들일수록 그것을 구분하기 힘들게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나의 동체 시력은 매우 좋은 편이었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타파니의 속구와 커브를 훌륭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일부러 티 나게 던졌다는 건가? 하지만 대체 왜?’
***
‘호, 이걸 참아냈다고?’
마운드의 타파니가 살짝 놀랐다. 조금 전 던진 공은 나름 비장의 한 수로 간직하고 있던 공이었다. 커브와 궤적이 같은 속구라기보다는 떨어지지 않는 커브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똥 볼. 들통난다면 그야말로 배팅볼이지만 이렇게 가끔 섞어 쓴다면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기 충분한 공인 것이다.
‘뭐 어쨌거나 상관은 없겠지. 이제 머릿속에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일 테니 말이야.’
첫 번째 승부에서 느꼈던 묘한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돌아가기 전, 충분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괴물의 새끼를 상대로 몸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타파니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
방망이를 잡은 두 손에 힘을 더했다. 지금 와서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타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오는 공을 치는 일일 뿐.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다시 타석에 섰다.
‘볼카운트 2-2.’
타파니의 손에서 싯누런 공이 날아올랐다. 몸쪽 높은 코스의 공. 왼 다리에 실려있던 몸의 중심축이 오른 다리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동시에 시작되는 강력한 힙 턴. 허리를 통해 시작된 회전이 허리를 거쳐 가슴으로, 그리고 양팔로. 35인치 배트가 거세게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