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6화 (6/210)

# 6화.

위험한 유혹(3)

따악!!

[잡아 당겨친 강한 타구!! 2루수의 머리를 훌쩍 넘어갑니다!!]

손끝에 느낌이 전해졌다. 정확한 타이밍 정확한 각도.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건 넘어가는 공이다. 배트를 내려놓은 채 1루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구랑 흡사한 각도였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숙하게 떨어지는 커브. 과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2층에서 지하로 박히는 것 같은 공이라 평가받을 만한 커브였다. 지금 이 순간 타파니가 가장 자신 있게 던질 공이라 예측했던 공. 나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저 오만한 메이저의 투수가 별것 아닌 마이너의 타자를 상대로 선택할 공은 오직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익수, 로니 헬, 달립니다. 워닝트랙 앞.]

[로니 헬, 잡았습니다!! Kang의 타구를 무난하게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아, Kang. 아쉽습니다. 만약 이곳 재키 로빈슨 필드의 펜스가 1피트만 짧았어도 무난하게 넘어갈 공 같았는데 말이죠.]

[글쎄요, 깨끗한 타격이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힘이 부족했어요. 지금도 순풍이라 저기 워닝트랙까지 날아간 거라고 봅니다.]

나의 공은 담장을 넘어가지 못했다.

***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자칫 잘못 했다간 피홈런의 쓰린 기억을 안고 올라갈 뻔했어.”

“설마요. 고작 마이너의 애송이 따위에게 내가 홈런을 허용할 리가요.”

이닝을 끝내고 돌아온 덕아웃. 자신의 어깨에 아이스팩을 감아주는 투수코치에게 타파니가 큰소리를 쳤다. 물론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녀석인걸?’

자신이 던진 결정구가 공중을 유영할 때 타파니는 지금 이 경기가 마이너의 리햅 경기라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서늘한 긴장감을 느꼈다. 최소한 그 순간 그는 빅리그의 괴물들을 상대할 때 만큼이나 진지했다.

“저 녀석 이름이 뭐였죠?”

“Kang. 한국에서 온 Kang이라고 하더군.”

“다저스의 그 Park과 같은 곳에서 온 친구라 이거군요.”

“왜? 조만간 위에서 볼 것 같아?”

“글쎄요. 아직 부족한 점이 좀 많긴 한데······.”

“될성부른 떡잎이라 미리 밟아줄 생각이었다 이거군. 그런데 생각보다 억셌고.”

“미리 밟아주다뇨. 저도 이제 33살이에요. 저 핏덩이가 올라올 때쯤이면 나도 여기서 코치질이나 하고 있을걸요?”

“못 올라갈 녀석 같지는 않단 말이로군.”

“뭐, 몇 가지만 제대로 더한다면 말이죠······.”

***

부족한 것은 결국 한가지. 힘이었다. 바뀐 스윙에 걸맞은 힘. 빗맞은 타구가 아닌 완벽하게 때려냈다고 생각하는 타구조차 담장 밖으로 넘기지 못하는 힘으로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시간, 그리고 노력뿐이었다.

“끄응······.”

“자자,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자고. 옳지.”

비싼 돈을 지불하고 고용한 개인 트레이너에게 받는 P.T는 고됐다. 그리고 원치 않음에도 억지로 먹는 음식들은 역했다. 하지만 몸을 불린다는 것은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주 6회 경기를 뛰는 시즌 중에는 더더욱 말이다.

***

“어이, Kang. 한잔하자고.”

“미안, 선약이 있어서 말이지.”

“오늘도 운동?”

“그래.”

모처럼 가뿐하게 경기에서 승리한 날이었다. 팀 메이트인 라이언 브룩이 술자리를 권해왔다. 물론 응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올해로 25살. 아마 조만간 방출이 확실한 브룩과 어울리며 낭비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거, 어차피 운동 하루 이틀 빠진다고 티 나는 것도 아니잖아. 하루 이틀 더 한다고 확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긴 한데, 뭐 별수 없잖아. 꾸준히 하는 수밖에.”

“멍청하게 그러지 말고, 내가 좋은 것 있는데 어때?”

“좋은 거?”

그것은 달콤한, 하지만 너무나도 위험한 유혹이었다. 그렇기에 화가 났다. 라이언 브룩. 그리고 그 주변을 어울리는 얼간이들 모두에게.

“젠장,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

하지만 무엇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들이 얼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솔깃할 수밖에 없는 바로 지금 이 상황 그 자체였다.

“근육량만 0.8kg이 늘었네요. 좋아요. 나쁘지 않습니다.”

0.8kg. 무려 한 달. 모든 즐거운 일을 끊어내고 토할 것 같은 음식들을 섭취하고, 오직 운동만을 하며 지낸 결과물이었다.

“이대로 운동을 계속하고 비시즌으로 접어들었을 때 조금 더 집중해서 한다면 조만간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이거 하나면 끝이야. 30분이면 3~4시간 운동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브룩의 가방 속 노란 약통의 알약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경기력 향상 약물(Performance Enhancing Drugs/P.E.D).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P.E.D는 91년 사무국에 의해 금지됐지만, 단속은 심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선수들 사이에 돌고 있었다.

“됐어. 사양하지.”

“돈 때문이면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싸게 공급해주는 녀석을 하나 알고 있거든. 같은 팀 메이트인데 비싸게 받을 생각도 없고 말이야.”

물론 돈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이 트레이너에게 지불하는 금액은 매달 2천 달러. 그에 비한다면 약값 따윈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어차피 다들 하고 있다고. 안 하는 놈만 멍청한 거고, 손해라고.”

“괜찮다니깐 그러네.”

“설마 건강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이봐, 마이너에서 구르면서 몸 나빠지는 걸 생각해야지. 어차피 위로 올라가면 헬스케어도 엄청나다고.”

집요한 브룩의 설득. 물론 다 맞는 이야기였다. 약물을 사용하지 않은 정직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세상이었고,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 것 역시 약물을 사용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곳에 가득 찬 광기가 사그라들었을 때, 진정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은 오직 정직한 이들뿐이었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 내 몸 걱정할 시간에 저리 가서 네 커리어나 걱정하라고. O,K?”

“젠장, 걱정해서 권해줬더니. 혼자 깨끗한 척하기는. 퉷.”

나의 차가운 축객령에 브룩이 돌아서 욕설을 내뱉으며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욕설을 내뱉어야 하는 사람은 브룩이 아닌 바로 나였다.

‘젠장, 잊고 있었어. 지금이 대 약물 시대라는 사실을······.’

나 자신의 문제에 함몰된 나머지 지금 시대가 바로 메이저리그의 흑역사로 기록된 시대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야구의 신에 도전한 역사상 최고의 타자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지 못하는 시대. 한 팀의 절반이 약물 복용자였음이 밝혀지는 시대. 내가 경쟁해야 하는 이들은 재능과 노력을 넘어선 반칙을 사용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설마 제프도?’

그날 이후 나는 브룩과 어울리는 동료들을 이전과 똑같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피해의식일지도 몰랐다. 내가 하루 왼 종일을 운동으로 보내며 만들어내는 작은 근육보다 몇 배나 알찬 근육을 식후 30분의 가벼운 운동으로 만들어내는 기적의 약물에 대한 피해의식.

따악!!

[데이빗, 강한 타구!! 2루수 머리를 훌쩍 넘어갑니다.]

[1루 지나 2루로. 2루에서 세입!!]

[데이빗 선수, 제이슨 콜의 슬라이더를 밀어쳐서 2루타를 만들어냈습니다.]

밀어친 타구? 웃기지도 않은 소리. 저건 밀어친 게 아니라, 밀려 쳤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정상적이라면 내야 플라이로 끝나야 할 공이 2루수의 키를 넘어가는 큼지막한 타구로 변신한 것이다.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데이빗 저 녀석은 확실히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 게으른 녀석의 몸이 저렇게 우람한 것은 도저히 설명될 수 없었다.

“젠장.”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이유는 또 있었다.

프레스톤, 나의 절친한 룸메이트. 나와 함께 이곳 세인트루시 메츠로 함께 올라왔던 프레스톤은 나보다 한발 먼저 AA 빙엄턴 메츠로 올라갔다. AAA에서 활약하던 우익수 숀 길버트의 트레이드 덕분이었다.

불어나지 않는 몸. 놀면서 나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약쟁이들의 육체. 그리고 한발 앞서나가는 동료까지.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 부상 이후 오직 마이너만을 전전했던 나의 미래는 끔찍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생에도 또다시 같은 미래를 답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걸리지 않은 약쟁이도 많았잖아.’

‘설사 걸린다손 치더라도 평생을 마이너에서 썩는 것 보다 빛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차피 약물이 금지된 이유는 선수들 건강 때문이잖아. 내가 건강만 유지한다면 그 취지에는 부합하는 거니깐······.’

힘든 경기 후, 줄어든 체중을 볼 때마다, 그리고 내가 쳐낸 공이 아쉽게 잡힐 때마다 수많은 변명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가로막았던 것은 가장 위대했던 두 유격수, 데릭 지터와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전 세계 모든 이들의 박수 속에서 은퇴했던 위대한 캡틴과 팀의 팬에게조차 야유를 받았던 약쟁이의 극명한 대비.

수많은 갈등 속에서 시간은 흘러갔다.

***

“이봐, 그거 들었어? 스티브 바이저가 부상이라고 하던데?”

“그래?”

“60일 DL이 유력하다고 하더라고.”

빅리그의 5번째 외야수 스티브의 부상. 스티브에게는 불운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이너 리거들에게는 기회라는 이름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아직 어드벤스드 A였던 만큼 바로 빅리그에 데뷔하는 것은 꿈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스티브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올라갈 누군가의 자리, 본래의 역사대로라면 데이빗이 올라갔을 그 자리에 내가 대신 올라가는 것 정도는 기대해볼 만했다. 녀석의 수비가 형편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따악!!

[강한 타구!! 넘어가나요? 넘어가나요? 넘어갔습니다!! 데이빗 샌더슨 선수. 역전 3점포!! 키시미 코브라의 체드 헤일을 상대로 시즌 27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무시무시한 힘이에요. 살짝 비켜 맞은 것 같았는데 그걸 담장 밖으로 밀쳐내네요.]

[저 선수 타격감이 완전히 물이 올랐어요. 최근 5경기 무려 3홈런입니다.]

[파워 하나만큼은 충분히 상위리그에서도 통할 것 같군요.]

‘젠장!! 저 녀석 갑자기 왜 저렇게 미친 듯이 잘 치는 거야.’

초조했다. 다급했다. 불안했다. 인생은 길지 않았고 그 인생 속 기회는 절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야구선수의 수명은 인생보다 짧았으며 기회 역시 더 적었다. 그리고 그 간절한 기회가 코앞에 다가왔을 때 데이빗은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눈앞의 파란 알약들이 보였다. 구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근처 헬스클럽에서 고작 80달러를 냈을 뿐이었다.

“이게 현실이라 이거군.”

고작 동네 헬스클럽에서 구매할 수 있는 P.E.D. 이것을 먹는 것만으로도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굴강한 육체,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파란 알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오, 훌륭합니다. 지난달보다 무려 0.7kg이 늘었네요.”

젠장. 결국, 난 약을 먹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나의 재능과 노력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어진 성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야구선수였다. 그리고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

만약 내가 그 약을 먹고, 또한 운 좋게 그것이 들통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위대한 야구선수라 부르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뭐, 나쁘지 않죠.”

트레이닝 룸의 한복판. 약물에 의지해 30분의 운동으로 3시간의 효과를 보는 이들 사이에서 난 오늘도 4시간의 땀을 흘렸다.

“자자, 딱 한 개만 더!!”

‘딱 한 개만 더.'라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트레이너 놈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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