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업그레이드(1)
“진호!!!”
저 멀리 살이 후덕하게 오른 프레스톤 녀석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바로 텍사스에 있는 친가로 돌아갔다고 하더니 고작 이 주 동안 이것저것 참 많이도 집어 먹은 것 같았다.
“프레스톤. 오래간만이야.”
“3위밖에 못했다며. 젠장. 내가 계속 있었더라면 우승이었을 텐데.”
“글쎄, 내가 듣기론 빙엄턴 매츠가, 너 때문에 리그 4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하하하, 원래 꼴찌 할 거 그래도 나의 활약 덕분에 4위는 한 거지.”
올 시즌 메츠 산하 마이너 팀들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다만 그것을 메츠의 유망주들 탓으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시즌 내내 뉴욕 메츠의 빅리거들은 부상과 부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발생하는 트레이드와 콜업에 마이너의 팀들은 끊임없이 들썩였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은 있었다.
“그보다 진호, 너 못 보던 사이에 몸이 많이 두꺼워졌네.”
“글쎄, 두꺼워진 거로 따지면 너보단 못하지 싶은데.”
“젠장, 엄마가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했다는데, 이게 무슨 마약도 아닌 게 도무지 끊을 수가 없더라고. 2주 동안 하루에 6끼씩 먹었어.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이 꼴이더라.”
“하하, 마약 같은 음식이라, 그거 궁금한데?”
“그보다 대체 얼마나 증량한 거야?”
“9kg, 그러니깐 대충 20파운드 정도?”
“오, 갓!! 20파운드?”
깜짝 놀란 프레스톤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봐 진호, 너 혹시······.”
“걱정하지 마. 그런 거 안 했고, 너처럼 의심하는 사람들 있을까 봐 관련 테스트도 이미 다 했으니깐. 공식적인 기록도 남아있을 거야. 내가 진짜 몸 이렇게 불린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팀에서 랜덤하게 몇 명씩 뽑아서 하는 테스트를 피하는 일은 쉬웠다. 현재 리그의 분위기는 서로서로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분위기였고,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훗날을 생각한다면 달랐다. 갑자기 몸이 불어난다는 것은 훗날 의심을 받을 소지가 충분한 일이었다. 그리고 피하기 쉽다는 말은 테스트받기 쉽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진짜 밥 먹고 운동만 했나 보네.”
“말도 마라. 너 떠나고 식료품값만 매달 500달러씩 들어갔어.”
프레스톤이 떠난 이후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식사였다. 몸을 불리기 위해선 양질의 식사는 필수였고, 그 양질의 식사를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식료품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도 이제 곧 올라올 것 같던데?”
“뭐, 이번에 3:1 트레이드로 위에 자리가 좀 났다고 하니깐. 게다가 당장 그중 한 명이 데이빗 녀석이잖아. 빙엄턴에 외야수 자리가 비는 거니깐 누군가는 메워야 할 테고 말이야.”
“흐흐, 자신 있다. 이거네?”
“자신이 아니라 확신이지. 당장 우리 팀에서 여기 온 것도 나랑 저기 스튜어트뿐이잖아.”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멕시코. 겨울 시즌 3개월 동안 열리는 ‘리가 메히카나 델 파시피코’ 맥시코 태평양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AAA에 속하는 멕시코의 여름리 그와는 조금 다른 이 리그는 8개의 팀이 경합하는 중남미 윈터 리그인데, 새로운 팀을 찾는 AA 혹은 AAA급의 베테랑 선수들이 다수 참가하는 리그인 만큼 그 수준이 상당한 리그였다.
“뭐, 일단은 여기서 제대로 뛰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여기가 생각보다 빡쎄거든.”
“아, 하긴. 넌 3년 전에도 한 번 뛰어봤었지? 아 그런데 그때 1할대 타율로 2달간 죽 쑤다가 퇴출당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물을 잘못 마셔서 배앓이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엄마가 정수기를 준비해 주셨으니 너도 물 마실 때 꼭 정수된 물이나 병에 든 생수만 사서 마시라고. 젠장.”
***
나란헤로스 데 에르모시오.
이번에 내가 뛰게 된 팀의 이름이었다. 이곳 맥시칸에선 제법 알아주는 팀이라고 했는데, 그 말처럼 선수들의 수준은 상당했다. 물론 부족한 선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수준으로 따졌을 때 최소한 내가 뛰고 있는 세인트루시 메츠보다 한 단계 위의 팀임은 분명했다.
‘좋은 기회야.’
8월 말, 리그가 끝난 이후 한 달 반의 시간 동안 정말 치열하게 운동에 매진했다. 리그가 진행 중이던 몇 달 동안 증량한 무게만큼을 고작 한 달 반이라는 시간 만에 증량한 것이 그 증거였다. 충분한 휴식과 철저한 운동. 하루하루 토할 것 같았던 그 엄격한 시간의 성과를 확인할 기회였다.
“너랑 나는 오늘 또 벤치 행이다. 젠장.”
“또?”
멕시칸 겨울 리그는 단순히 우리들의 기량을 시험해볼 테스트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많게는 이만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모여드는 프로리그였고, 팀 역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한 최적의 라인업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30살이 넘은 AAA리그의 선수가 아주 많았다. 메이저에 올라가기엔 부족한 기량의 베테랑들. 메이저의 구단들이라면 아직 포텐셜이 남은 우리에게 기회를 더 많이 부여했겠지만, 고작 3개월간 치러지는 이곳 멕시칸 리그의 팀들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
따악
즉 나에게 오는 몇 안 되는 기회를 통해 내가 객관적으로 그들보다 가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찾아왔다.
[카마초 감독의 대주자 기용입니다. 27번 Kang, 호 흔치 않은 아시안이군요.]
[올해 메츠 산하 어드벤스드 A 세인트루시 메츠에서 0.267/0.311/0.328의 성적을 거둔 선수입니다. 도루가 41개로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도루를 기록했군요.]
1루. 상대 팀의 1루수가 누릿한 이를 드러내며 나를 반겼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의 향연. 신중하게 세 걸음 반의 리드폭으로 상대 투수를 살피기 시작했다. 32세의 노련한 투수. 91마일의 포심을 기반으로 다채로운 변화구를 구사하는 까다로운 투수였다. 마이너 옵션을 모두 소진한 AAAA급 투수는 강력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31세. 메이저에 발붙일 곳 없는 40인 로스터 언저리 타격 역시 녹록지 않았다.
따악!!
빠르고 강력한 타구. 3루 코치의 손이 거세게 돌아갔다. 정신없는 질주가 시작됐다. 2루를 지나 3루로. 3루 코치의 팔은 멈추지 않았다.
홈 승부.
홈으로의 귀환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주자를 막으려는 포수와 그를 뚫어내려는 주자의 힘싸움. 20파운드가 증가한 나의 숄더차지가 매서웠다.
콰앙!!!
[맙소사!! Kang. 2루 지나 3루로. 3루 지나 홈까지!!! 빠릅니다. 빨라요.]
[나란헤로스 데 에르모시오 선취점. 대주자 Kang의 미친 질주입니다!! 나란헤오스 데 에르모시오가 마요스 데 나베호아를 상대로 1: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늘어난 무게는 나를 느리게 만들지도, 둔하게 만들지도 못했다. 나는 한층 더 강해졌다.
***
“Kang. 아주 잘했어. 바로 그거야. 하하하.”
카마초 감독이 기분 좋게 웃으며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선취점, 그것도 자신의 교체작전으로 만들어낸 선취점이라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6회, 이제 남은 건 3이닝. 타석은 두 번은 무리겠지?’
감독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대로라면 큰 실수가 없는 한 3이닝은 보장된 셈이다. 하지만 고작 이걸로 만족할 순 없었다. 나는 대주자, 혹은 대수비로 3이닝씩 뛰기 위해 이곳 멕시코까지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 손에 쥐어진 기회를 잡아채지 못해서는 결코 빅리거가 될 수 없다.
“진호, 너 더 빨라진 것 같던데?”
“말도 마라. 내가 트레이너한테 쓴 돈이며 시간이 얼만데. 그 인간이 말하기를 장거리 달리기라면 몰라도 단거리는 더 나아질거라고 호언장담 하더라고. 뭐 몸이 무거워지긴 했는데, 트레이너 말 처럼 치고 나가는 힘이 좋아진 게 더 큰 것 같아.”
“어찌됐건 그간 헛힘쓴건 아니라 이거네.”
프레스톤이 나의 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물론 우리의 친분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프레스톤과 나의 현상황은 각자의 포지션이 아닌 4번째 외야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상황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기회가 돌아온다는 것은 프레스톤 자신의 기회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넌 괜찮아?”
“응? 뭐가? 아. 그거?”
나의 질문에 프레스톤이 씨익 웃었다. 살이 올랐음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야구 오늘하고 그만할 것도 아니잖아?”
***
나란헤로스 데 에르모시오의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데 베이스볼 엑토르 에스피노의 외야는 넓었다. 특히 중앙펜스까지의 거리는 내가 경험해본 그 어떤 구장도 가져다 대기 어려울 만큼 넓어서 그 거리가 무려 420피트에 달했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절대 담장을 넘기기 힘든 구조. 하지만 그만큼 2루타, 혹은 3루타를 만들기엔 좋은 구조였다.
‘괜찮은데?’
그리고 구장의 이러한 구조는 지금 나에게 유리했다. 우선 외야가 넓은 만큼 솜씨 좋은 중견수의 실력이 빛나는 것은 당연했다. 넓은 거리를 커버할 수 있는 빠른 발과 타구 판단능력. 그리고 펜스에서 홈플레이트까지 130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커버할 수 있는 강한 어깨. 모두 내가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더욱이 홈런이 잘 나오지 않는 구장의 특성상, 중, 장거리형 타자가 선호될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경우 남들보다 1 베이스 더 뛸 수 있는 발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만큼, 남들은 3루에서 멈춰설 타구가 득점으로 탈바꿈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유리함이 있다고 해서 바로바로 내가 영웅처럼 활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야의 수비란 기본적으로 외야에 공이 날아와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팽팽한 투수전을 만들어주던 우리 에이스는 경기 후반에도 그 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K. K. K. 3자 범퇴.
1:0 상황 그대로 경기가 흘러갔다.
그리고 7회 말. 상대 팀의 에이스 대신 올라온 불펜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여드름 빡빡한 19살의 어린 투수. 베네수엘라 출신의 특급 유망주 호르헤 훌리오가 그 주인공이었다. 99마일의 강속구를 뿌리는 우완투수.
“와우, 저 녀석 대단한데? 멕시칸인가?”
“아니, 우리 리그 녀석이야.”
“플로리다? 19살짜리가?”
“어, 볼티모어에서 애지중지하는 녀석이라고 하더라. 루키를 15경기 만에 박살내고 바로 어드벤스드 A로 올라와서 시즌 막판에 한 경기 뛰었다고 하더라고.”
“어메이징 하네.”
2삼진 1 내야 플라이. 7회 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8회 초, 잘 던지던 우리의 에이스가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35세의 투수에게 전력투구로 107개의 공을 던진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였다.
따악!!
2 3루 간을 뚫는 짧은 안타. 노아웃 주자 1루의 상황에서 팀의 투수가 교체됐다. 상대 팀이 19살의 쌩쌩한 유망주를 선택한 데 반해 우리 감독의 선택은 37세의 베테랑이었다. 이번 스타팅멤버도 그렇고 확실히 우리 감독은 선택의 순간 베테랑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부웅
“스트라잌!!”
88마일밖에 되지 않는 구속이었지만 존의 구석구석을 찌르는 노련한 피칭에 타자의 배트가 헛돌았다. 언제든지 뛸 준비가 되어있는 1루 주자. 비록 헛돌았다지만 심상치 않아 보이는 스윙. 나의 신경이 타자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그 순간
따악!!
‘크다!!’
79마일 커브가 정확하게 얻어맞았다. 본능적인 타구판단. 나의 몸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뒤로, 더 뒤로!!’
고개를 돌려 낙구 예상 지점을 다시 볼 시간 따윈 없었다. 빠르고 강한 타구.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동점, 아니 어쩌면 역전까지 허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로베르토!! 쳤습니다!! 중앙으로 향하는 빠르고 강한 타구!! 그 사이 1루 주자 알레한드로가 달립니다!!]
[2루 지나. 3루로!! 알레한드로 빠릅니다!! 이건 충분히 홈까지 갈 수 있는 타구에요.]
[어, 어, 어?]
여기쯤인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나의 시선이 힐끔 뒤를 향했다.
‘부족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약 50cm의 부족함.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마치 어깨가 빠진 것처럼 쭉 뻗은 왼손 글러브에 무언가 둔탁한 느낌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