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8화 (8/210)

# 8화.

업그레이드(2)

“잡았다!!”

[Kang, Kang입니다. 오 마이 갓. Kang이에요.]

[맙소사. 저 선수가 왜 저기 있죠?]

구장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동점 적시타, 아니 어쩌면 역전 안타를 막아낸 수비.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알레한드로!! 돌아가!!!!”

2루를 지나 3루로 달리던 주자를 향해 소리치는 3루 코치. 그리고 서둘러 1루로 돌아가는 주자의 모습.

[알레한드로 귀루!! 괜찮습니다. 지금 Kang과 1루 사이의 거리가 한 300피트는 될 거에요. 충분합니다.]

[Kang이 1루를 향해 공을 던집니다!!]

제자리에서 일어나 글러브에서 공을 빼기까지 불과 1.3초. 세 걸음의 도움닫기. 허벅지에서 시작된 강력한 힘이 엉덩이 허리 어깨를 거쳐 공을 움켜쥔 오른손에 집결됐다. 터질 것처럼 부푼 전신의 근육들. 그 모든 힘이 집결된 공이 벼락처럼 쏘아졌다.

[Kang 송구!! 빠릅니다. 빨라요!!]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아웃!!!”

[맙소사. 이건 정말이지 굉장하네요. 환상적인 캐치. 그리고 환상적인 송구였습니다.]

[놀랍습니다. 방금 저 송구, 장담컨대 제가 지금까지 야구를 중계하면서 봤던 그 어떤 송구보다도 빨랐어요.]

[아니, 저런 어깨를 가지고 왜 외야수를 하고 있는 거죠? 마운드에 서야 하는 선수 아닌가요?]

[삽시간에 투아웃, 투아웃입니다.]

[로베르토 선수 허탈한 표정이네요.]

[그럴 만도 합니다. 솔직히 저런 공을 잡아낼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이곳이 에스타디오 데 베이스볼 엑토르 에스피노만 아니었더라면 무조건 홈런이었어요.]

[아니 그걸 감안 해도 이건 인사이드파크홈런감이었어요. 나란헤로스 데 에르모시오의 Kang이 2점을 지켜냅니다. 만약 오늘 나란헤로스가 승리한다면 전 수훈선수로 고민 없이 Kang을 꼽을 것 같네요.]

8회 초 이닝 종료.

“하하, Kang!!! @$%^@#$%!#$%!$#%.”

덕아웃에서 뛰쳐나와 거세게 나의 어깨를 두들기며 알아듣지 못할 스페인어를 쏘아대는 카마초 감독의 표정이 전에 없이 환했다.

‘조금만 더.’

이제 남은 것은 8회 말 그리고 9회.

아직 나의 첫 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8회 말.

1:0으로 앞선 상황. 앞으로의 플레이에 따라 우리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공격 기회가 돌아왔다. 6회 대주자로 교체된 만큼 나의 타석까지는 아직 순서가 조금 남은 상황.

‘분발들 좀 해달라고.’

조금 전 주루할 때도, 그리고 수비할 때도 느꼈지만, 오늘 몸 상태는 정말 좋았다. 아슬아슬한 순간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뻗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대로라면 타격 역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부웅

“아웃!!!”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팀의 타자들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호르헤 훌리오의 레파토리는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99마일의 포심패스트볼과 91마일의 슬라이더를 가진 투수는 레파토리가 다양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한국에서 야구를 하던 시절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정해진 코스로 날아오는 150km/h의 공을 쳐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프로의 경계점이라고. 지금 마운드의 호르헤 녀석이 던지는 공은 그 150km/h보다 무려 8.4km/h가 더 빠른 공이었다.

“진호, 너 자신 있냐?”

“뭐가?”

윌슨의 시선이 힐끔 마운드로 향했다.

“뭐, 서 봐야 알겠지. 그러는 너는 어떤데?”

“나? 나야 자신만만이지. 여기 아저씨들이야 늙어서 반응속도가 문제라지만 나라면 그대로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거 아니겠어?”

“자신감 하나는 보기 좋네. 근데 그것도 뭐 기회가 와야 말이지.”

따악

[빗맞은 타구 1루수 정면!! 아웃입니다.]

[올해 볼티모어에 국제 드래프트로 입단해서 루키 리그를 초토화 시켰다죠? 호르헤 훌리오. 19세. 무서운 신인입니다.]

프레스톤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3자 범퇴. 나의 타석이 돌아오지 않은 채 8회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9회뿐. 우리가 제대로 막아낸다면 오늘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조금 아쉽네.’

대주자로 교체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타석에 서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팀의 투수가 얻어맞아 동점, 혹은 역전을 허용하는 것을 바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팀이 승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따악!!

하지만 나의 그런 마음과는 무관하게 팀의 마무리 투수인 이그나시오는 나에게 굳이 타격 찬스를 안겨줄 생각이 가득한 것 같았다. 연달아 터져 나오는 안타들. 내야를 꿰뚫는 안타들에 나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직전 이닝 보여줬던 나의 어깨를 경계한 탓일까? 주자들의 움직임이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극적인 움직임에도 충분히 점수가 날 만큼 우리 마운드는 좋지 못했다. 이그나시오 이후 마운드로 올라온 핵터의 슬라이더가 역전 적시타로 둔갑했다.

2:1

9회 말 마침내 나에게 타격 찬스가 찾아왔다.

***

“여보, 그 녀석 정말 괜찮을까? 내가 괜한 짓 한 건 아니겠지?”

“아이참.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찾아가 보면 되지. 왜 여기서 이렇게 호들갑이에요.”

“프로가 된 다음에는 큰물에서 놀기 전까진 찾아가 보지 않는 게 우리 집안의 전통인 거 당신도 잘 알잖아. 우리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그러셨었다고.”

“알죠, 아주 잘 알죠. 그래서 당신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뛰었잖아요. 우리 아들도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리 와서 같이 영화나 골라봐요.”

부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항상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아들이었다. 하지만 2주 전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버지, 중견수는 포기하기로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위로 올라가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할 것 같아요.”

“도망치는 게냐?”

“아니요. 선택하는 겁니다. 코너 외야수에게 필요한 부분을 더 갈고닦겠어요. 코너 외야수에게 필요 없는 부분을 버리고 그 부분을 타격으로 메울 겁니다.”

도망이 아닌 선택이라 답하는 아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것은 함께 캐치볼을 하며 메이저 리그의 홈런왕이 될 거라 재잘대던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벽에 부딪혀 깨지고 부서졌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올해 돼지들이 아주 튼실하다. 잘 먹고 가거라.”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했듯,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주었듯 믿고 지지해주는 것. 그리고 과거 나이를 먹었던 자신이 코너 외야수에서 1루수로 컨버젼 하던 때에 얻었던 경험들을 아들을 위해 베풀어 주는 것.

윌리엄 헤이워드 ‘무키’ 윌슨. 1986년 메츠의 전설적인 월드 시리즈 우승에 가장 드라마틱한 주인공인 그가 아들을 위해 주방에 섰다.

물론 멍청한 아들놈은 아버지가 주방에 섰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말이다.

***

[카마초 감독, 대타 카드를 내미는군요. 오늘 적극적인 작전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 카마초 감독. 과연 이 마지막 순간에도 그럴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타석에 나오는 타자는 프레스톤 윌슨. 23세. 올해 여름 메츠 산하 AA인 빙엄턴에서 뛰었던 선수네요.]

[아, 이 선수 아버지가 무키, 무키 윌슨이에요.]

9회 초, 3번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1아웃 주자 없음. 그 암담한 상황 속에서 오늘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4번 타자를 대신해 카마초 감독이 선택한 것은 뜻밖에도 프레스톤이었다.

“다녀올게.”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가라앉은 얼굴. 프레스톤이 자신의 배트를 챙겨 들고 타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위대한 메이저리거 프레스톤의 얼굴이었다.

부웅

날카로운, 그리고 위협적인 스윙이었다. 마운드에 서 있던 투수가 자세를 가다듬을 만큼 말이다.

[자, 9회 말 1아웃 주자 없는 상황. 호르헤 훌리오가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따악!!

[프레스톤 윌슨!! 쳤습니다. 호르헤 훌리오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친 윌슨 선수. 좌중간을 가르는 큼지막한 타구!!]

프레스톤의 자신감은 허풍이 아니었다. 호르헤 훌리오는 프레스톤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가 프레스톤을 잡고 싶었다면 스스로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패스트볼이 아닌 슬라이더를 던져야만 했다. 프레스톤은 루키 시절부터 팀에서 가장 패스트볼을 잘 쳐내는 타자였다.

[타구는 담장 앞 워닝 트랙으로!! 그 사이 프레스톤은 2루에 무사히 안착합니다.]

[와우, 오늘 카마초 감독의 선택이 거듭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후속 타자에게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요? 놀라운 주루와 수비를 보여줬던 Kang입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여기서 대타가 또 나오지 않을까요? 수비와 주루가 놀랍기는 했습니다만 반대로 말하자면 저런 수비와 주루를 가지고도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건 타격에 문제가 많다는 소리거든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타석으로 향하는 나를 향한 카마초 감독의 시선이 뜨겁다. 오늘 우리 메츠의 루키 두명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코 그 신뢰를 저버릴 생각이 없었다.

‘감독님, 오늘 아주 제대로 명장으로 만들어 드리죠.’

타석에서 바라보는 경기장은 새로웠다. 오밀조밀한 내야. 그리고 넓게 펼쳐진 외야.

‘내가 저 넓은 공간을 커버하고 있었단 말이지?’

2루에 서 있는 프레스톤의 표정이 조금은 재수없었다. ‘난 내 할 일을 했다고. 이제 내가 날 불러들일 차례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 이 커다란 구장의 담장 앞까지 가는 타구에도 2루까지밖에 못 간, 녀석의 형편없는 주루를 생각한다면 최소한 2루타는 만들어줘야 녀석을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으리라. 배트를 쥔 두 손이 뜨거웠다.

[카마초 감독, 대타카드를 뽑지 않았습니다. Kang이 그대로 타석에 나왔습니다.]

[두 번밖에 남지 않은 기회. 과연 Kang이 카마초 감독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마운드의 호르헤 훌리오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몸쪽 낮은 코스, 빠른 공.

타자들이 가장 치기 힘들다고 말하는,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원하던 코스의 공이었다. 마치 공을 퍼올리듯 돌아간 나의 배트가 호르헤의 패스트볼을 강타했다.

따악!!

묵직한 손맛. 두둥실 떠오르는 하얀 공. 큼지막한 타구였다. 하지만 불안하게도 타구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공은 떠올랐다. 이제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부디 저 공이 누군가의 글러브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곳 에스타디오 데 베이스볼 엑토르 에스피노의 외야가 아주 광활하다는 사실이었다. 설사 누군가의 글러브에 들어가더라도 프레스톤 녀석의 진루타가 되기엔 충분할 테니 말이다.

‘제발!!’

드넓은 구장의 한 켠에 공이 떨어져 주는 행운을 기도하며 1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야구장 안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홈런. 홈런입니다!!]

[나란헤로스의 Kang이 우중간 외야석을 직격 하는 9회 말 끝내기 2점 홈런을 때려냅니다.]

홈런, 홈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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