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사기꾼(1)
“맙소사.”
요 몇 달간 나의 노력이, 고생이 녹아내리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는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또 빠졌어?”
“이제 7.5파운드야.”
멕시칸리그의 일정은 내가 경험해본 그 어떤 리그보다 터프했다. 마치 잘 정련된 강철처럼 빛나던 나의 육체는 그 세찬 일정 속에서 조금씩 깎여나갔다. 6개월에 걸쳐 만들어낸 20파운드의 증량. 그중 7.5파운드의 근육이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에 불과했다.
“오, 나도 9파운드나 빠졌네.”
“아직 평소 체중까지 7파운드 정도 남은 거 맞지? 너희 어머니, 이런 상황 미리 다 예상하신 거 아니야?”
“에이, 아버지라면 몰라도 엄마가 뭘 알겠어. 그냥 오래간만에 본 아들 잘 먹이다 보니 우연히 이렇게 맞아 떨어진 거겠지.”
내가 녹아내리는 체중에 비명을 지르는 사이, 프레스톤은 여유만만이었다. 시골집에서 투실투실하게 올라왔던 살들이 조금씩 사라지며 원래의 잘생긴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는 녀석은, 줄어드는 살과 비례해서 플레이 역시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충분히 잘 챙겨 먹는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런 거지.”
“글쎄, 여기 음식이 몸에 안 맞아서 그런 건가? 근데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네가 몸에 살이 잘 붙는 체질은 아니었잖아. 솔직히 6개월 동안 20파운드나 찐 것도 난 기적이었다고 본다. 2천 달러가 비싸긴 비쌌지만 그래도 돈값을 하긴 했네.”
“에휴, 뭐 더 잘 챙겨 먹어봐야지. 방법 있겠어?”
***
[4회 초, 원아웃 주자 1루. 타석에는 올 시즌 나란헤로스의 주역이죠? Kang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선수입니다. 아시아, 일본이 아닌 한국의 선수입니다. 한국의 야구 수준이 절대 낮지 않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조금 부진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타출장 0.289/0.331/0.445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 중인 Kang. 과연 최근의 부진을 씻어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이틀 전 6시간의 장거리 버스 이동은 최악이었다. 버스의 승차감도, 도로의 노면 상태도 모두 좋지 못했다. 본래 차멀미를 하지 않는 편이었음에도 그 날만큼은 속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몸의 상태는 모두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맑은 정신, 가벼운 몸.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기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시즌 5번째 홈런을 기록하는 것이 바로 오늘일지도 몰랐다.
부웅
“스트라잌!!!”
[헛스윙!! 파초 헤레라의 체인지업에 Kang의 배트가 헛돌아갑니다.]
[Kang이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타자인 건 맞습니다만, 아무래도 아직 어린 타자거든요. 아직 변화구에 대한 대처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재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최대한 많이 경험해볼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역시 최근 Kang의 타격이 부진한 것도 그런 Kang의 약점을 리그의 투수들이 적절하게 공략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그렇죠. 리그의 노련한 투수들이 보기에 Kang은 아직 어린애나 마찬가지니깐요.]
부웅!!
“스트라잌!!!”
[아, 2구 연속 헛스윙. 이번에는 슬라이더였어요.]
[아주 날카로운 슬라이더였습니다. 이런 공이라면 속은 타자를 욕할 수가 없지요. 아마 Kang이 보기엔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이 확실해 보였을 겁니다. 이런 것 역시 다 경험이 없다면 적응하기 힘든 공이거든요. 오늘 나란헤로스의 Kang이 아주 톡톡하게 수업료를 내고 있네요.]
***
“헛소리.”
올해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 속칭 UNAM을 졸업한 호세 가리비아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저 구장을 뛰는 선수들, 코치들, 그리고 해설자까지 야구를 제대로 아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해봤더니 어떻더라, 저 떴더라 라는 것이 전부였다.
“최소한 60년 전의 테드 윌리엄스는 그래도 왜 그런지 고민이라도 했지.”
그가 생각하기에 이 야구라는 스포츠는 올드 스쿨이라는 이름 아래 근거조차 희박한 터무니없는 사기들이 횡횡하는 불합리의 결정체였다.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원리로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궁금증조차 가지지 못한 바보들의 공놀이.
“젠장, 그런 바보들의 공놀이에 빠진 내가 할 말은 아닌 건가.”
1967년 캐나다에서 운동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이 만들어진 이래 30년. 제법 긴 세월이었지만 아직도 이 분야의 학문은 지지부진하기 그지없었다. 멕시코, 아니 남미 최고의 대학이라는 UNAM에조차 관련 분과가 없었으니 말이다. 호세 가리비아가 대학에서 전공한 학문은 인체 생리학. 인간의 신체구조에 관한 가장 깊은 연구가 이뤄지는 학문이었다. 아마 원한다면 의대로 진학하여 편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편안한 삶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흥미롭고 가치 있을 삶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는 현재 백수였다. 당장 내일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알아봐야 할 만큼 가난한 백수 말이다.
***
마운드에 선 투수, 파초 헤레라의 피칭 폼은 완벽했다. 거의 똑같은 자세에서 쏟아지는 다양한 변화구들. 하지만 그는 빅리그는커녕 더블A에서조차 성공하지 못한 투수였다. 그가 가진 무기는 다양했지만, 그중 그 어느 것도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놓을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볼카운트 2-2. 나를 유혹하는 슬라이더가 삐끗했다. 그리고 오늘 난 투수의 결정적인 실투를 놓칠 만큼 어설프지 않았다.
따악!!
거세게 돌아간 배트가 중앙으로 몰린 헤레라의 슬라이더를 완벽하게 후려쳤다. 내야수의 키를 훌쩍 넘긴 강한 타구. 1루 주자가 3루에 안착했고, 나 역시 2루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좋았어.’
최근 좋지 못한 컨디션으로 있었던 부진을 씻어내는 2루타였다. 저 멀리 덕아웃의 프레스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몸무게가 조금 빠지는 건 큰일이 아니야. 시즌이 끝나고 다시 열심히 운동해서 불리면 되는 문제지. 일단 시즌 중에는 경기에 최선을 다하자.’
***
“아니, 그러니깐 제가 꼭 만나봐야 한다니깐 그러네요.”
“방문목적을 작성해주시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우, 거,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시고, 그냥 들여 보내줘요. 아마 나중에 잘했다고 팁도 두둑하게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약속이 돼 있지 않다면 만나실 수 없습니다. 방문목적을 작성해주시면 나중에 연락드리도록 하죠.”
“아니, 지금 그거 작성해봐야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릴 거 뻔히 알거든요? 진짜 중요한 일이니깐 그렇게 빡빡하게 굴지 말자고요.”
미국에서 건너온 유망주들이 사용하고 있는 시내 고급 아파트. 그곳의 경비원인 파블로는 이런류의 인간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허풍을 치는 쓰레기들. 목적은 언제나 똑같았다. 겨울 시즌, 앞으로 빅리그에 올라갈 가능성이 큰 어린 유망주들을 만나 언젠가 가격이 오를 기념품들을 뜯어내던지, 혹은 그들이 가진 거액의 계약금을 이상한 사기로 뜯어내려는 사기꾼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미리 약속을 잡아주시던지 방문목적을 작성해주시죠.”
철저한 무시. 괜히 상대해봤자 피곤해질 뿐인 이 사기꾼들은 예의를 가장한 무시만이 정답이었다.
“아, 진짜. 아저씨 이러지 말자고요.”
“자꾸 이러시면 경찰을 부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경찰을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족속들은 경찰을 부른다는 말만으로도 물러서기 마련이니깐.
“자자, 이거 보세요. 저 이상한 사람 진짜 아니에요.”
“UNAM 학생증? 이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파블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사기꾼들에게 신분증 위조는 기본이었다. 그것이 저명한 학자나 사업가가 아닌 고작 대학 학생증이라는 점은 조금 신선했지만 말이다.
“어떤 머저리가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Kang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요. 케어가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걸 작성해주시죠. 나중에 따로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우 답답해 죽겠네! 진짜!!!”
어떤 식으로 사기를 칠 것인지 그 이야기까지 늘어놨으니 이제 여기까지 왔다면 거의 다 해결된 셈이었다. 아마 이 사기꾼은 이대로 몇 분간 더 하고 싶은 말을 떠든 다음 사라질 것이다. 파블로의 마음 한구석이 오늘도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해냈다는 만족감으로 충족됐다.
“어? 지금 혹시 Kang이라고 했나요?”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어느 잘생긴 흑인 청년이 사기꾼의 말에 귀 기울이기 전까진 말이다.
***
처음에는 그저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 친구의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한 반가움이었다. 낯선 이국땅의 열정적인 팬. 그것이 구릿빛 피부의 열정적인 라틴 미녀가 아닌 지저분한 남자라는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최근 이상하게 기운이 없는 친구에겐 나쁘지 않은 자극이 될 것 같았다.
“미안,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것 같다.”
“.......”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애당초 살이 찌는 사람과 살이 찌지 못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니. 게다가 본인의 몸 관리도 못 하는 비실비실한 인간이 프로 선수의 몸을 관리해주겠다니 말이다. 게이트맨이 경고하던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기껏해야 열성팬이 선수를 만나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 녀석은 Kang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사기꾼이 분명했다.
“저 남자 호세 가리비아라고 했지? UNAM대 졸업생이고.”
“어, 근데 신경 쓰지 마. 자기 몸도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비실비실한 인간이 그냥 헛소리 지껄인 거니깐.”
“호세 가리비아라······.”
***
따악
[Kang!! 로자리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쳤습니다. 2루수의 머리를 넘기는 아슬아슬한 타구. 2루의 산체스 쫓아갑니다만, 그 사이 Kang은 무사히 1루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최근 Kang의 타격감이 다시 올라온 것 같아요. 0.288까지 떨어졌던 타율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1루 코치에게 배팅 장갑과 암 가드, 풋 가드를 벗어 건넸다. 최근 4경기 연속 안타. 타격감은 매우 좋았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는가를 묻는다면 전혀 아니었다. 물론 팀의 감독은 지금 나의 모습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붙박이 1번 타자로서 매 경기 꼬박꼬박 출루해주는 것만큼 감독을 기쁘게 하는 일도 드물 테니 말이다.
‘호세 가리비아라······.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미라클 가리비아일까?’
며칠 전, 프레스톤이 데리고 왔던 외국인. 자신을 호세 가리비아라 소개하던 그 청년이 머릿속에 밟혔다. 물론 가능성은 낮았다. 일단 외모부터 너무 달랐다. 물론 내가 기억하는 가리비아는 30년 뒤, TV와 잡지, 인터넷 등을 통해 스치듯 봤던 가리비아였지만 그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지금 그 추레한 모습이 그런 훤칠한 인물로 바뀐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영어와 엉성한 이론이라니.
부웅
[Kang, 달립니다. 2루로!! 2루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34경기 만에 벌써 9개째 도루를 성공시키고 있는 Kang입니다.]
[참 다재다능한 선수입니다. 5툴 플레이어란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글쎄요, 5툴이라고 말하기엔 파워가 많이 부족하긴 합니다만, 지금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선수임은 분명합니다.]
2루에 서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팀의 동료들은 믿을만했다. 3개나 되는 아웃카운트라면 분명 나를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팀의 승리에 나의 출루와 빠른 발은 분명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지금 나는 팀의 키 플레이어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곳 멕시칸 리그는 분명 지금까지 내가 뛰어온 그 어떤 리그보다 그 수준이 높았다. 상당수의 쿼드로플 A급 선수들이 존재했으며 평균적인 수준은 최소한 AA. 그해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질에 따라서는 AAA급에 필적한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이치로가 오릭스에서 타, 출, 장이 3/4/5에 연 평균 15홈런 정도를 쳤었지.’
모든 이들이 평가하는 NPB의 수준은 AAA급 이상. 스즈키 이치로는 그곳에서 홈런을 제외한 모든 타격과 수비를 석권했었다, 게다가 그 부족하다는 홈런조차도 리그 10위권 이내를 기록했던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괴물조차도 빅리그의 문턱을 밟은 뒤 장타와 중견수 수비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빅리그와 AAA급 리그의 수준 차이를 말해주는 분명한 증거였다.
‘고작 멕시칸 리그에서 스즈키 이치로의 빅리그 성적을 기록한다면 정작 빅리그에서는 가와사키 무네노리 수준도 되지 못해.’
부웅!!
“스트라이크!! 아웃!!!”
산체스의 스윙 아웃. 타석에 3번 타자인 프레스톤이 들어왔다.
물론 지금 차근차근 정석대로 잘 성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 22살밖에 되지 않았고 성장의 여지는 많이 남아있었다. 지금 장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그저 터프한 일정으로 몸이 조금 축나서일지도 몰랐다. 시즌을 끝내고 충분한 휴식과 운동을 한다면 금방 다시 좋아질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 나는 단순히 조급증에 걸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많은 이유에도 나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는 찝찝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따악!!
[강한 타구!! 나란헤로스의 3번 프레스톤 윌슨 선수의 잡아당긴 라인 드라이브. 좌익수 열심히 쫓아가지만 부족합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예요. 이 선수 장타율이 0.571이에요. 정말 오래간만에 제대로 칠 줄 아는 선수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타구의 질이 너무 좋아요.]
프레스톤의 큼지막한 안타. 나의 발이 여유롭게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1:0.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역시 연락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