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사기꾼(2)
호세 가리비아는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친 자신의 멍청함에 머리를 쥐어박았다.
“젠장, PPT자료랑 이것저것 조금 더 준비해갔어야 했어.”
경기가 끝난 직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찾아간 어리석음이라니. 더군다나 상대는 깐깐한 동양인이었다.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동양인에게 자신이 그날 보였던 모습은 절대 신뢰할 수 없는 모습임이 틀림없었다.
우우웅
주머니의 낡은 핸드폰이 울렸다. 십중팔구 밀린 방세를 내라는 독촉 전화임이 틀림없었다. 끔찍했다. 자신의 독창적 이론에 관해 수많은 구단들에 메일을 보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직 냉소뿐이었다.
“여보세요.”
영어, 그리고 남성이었다. 최소한 밀린 방세를 독촉하는 전화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가리비아씨? 오늘 또 와주실 수 있을까요? 좀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네?”
“아, 호세 가리비아씨 핸드폰 아닌가요?”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아, 제가 제 이름을 말하는 걸 잊었군요. 네 Kang입니다. 오늘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아파트에서 뵀으면 하는데요.”
맙소사. Kang이었다. 자신이 멍청하게 놓쳤다고 자책하던 그 아시안. 어마어마한 가능성과 그에 상응하는 어려움을 함께 안고 있던 유망주. 그 순간 가리비아는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데 필요한 수많은 자료를 떠올렸다.
“네, 넵. 알겠습니다. 그러니깐 2시간, 아니 3시간 후에 찾아가도록 하죠.”
“네, 가드맨에게는 미리 말해둘 테니 이번에는 그냥 들어오시면 될 겁니다.”
***
“그러니깐, 그 유전자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는 아주 오랜 옛날 수만년 전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모든 정보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97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이야기가 가리비아의 입, 그리고 그가 준비한 자료들을 통해 흘러나왔다. DNA, 게놈. 유전자 지도. 진화에 유리한 요소. 효소에 의한 비만 인자까지.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마지막 이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저에게 월 500달러만 지급해주신다면 책임지고 Kang의 몸을 관리해드리도록 하지요. 단 선불입니다.”
500달러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몸을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돈이라 생각한다면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었다. 문제는 과연 그의 말대로 했을 때 몸이 나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하는 신뢰의 문제였다.
앙상한 갈비, 툭 튀어나온 배. 여전히 떡진 곱슬머리. 절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해선 안 되는 법이긴 하다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심했다. 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 사람을 다시 불렀던 걸까?
“4, 400달러!!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잠시 고민하는 나를 향해 즉석에서 100달러를 깎아 주는 모습에서 나의 신뢰도는 더욱더 떨어졌다. 아무래도 역시 내가 잠시 헛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이름과 국적이 같다지만 이런 사람이 그 미라클 가리비아일 만무했다. 그렇게 그를 그냥 돌려보내려는 찰나, 내 머릿속에 그에 관한 중요한 정보 한가지가 떠올랐다.
“잠깐, 가리비아씨. 혹시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가족관계요? 그건 갑자기 왜? 아, 아닙니다. 말씀드리죠. 장남이고, 아래로는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도밍고라고. 아버지는 다르지만 16살 터울의 동생이죠.”
맞았다. 친동생을 최고의 테니스선수로 키워낸 세계 최고의 스포츠 생리학자. 운동선수의 몸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 탄탄한 몸매에 훤칠한 외모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3위에 올랐던 그 미라클 가리비아가 바로 이 남자였다.
“3. 390달러?”
맙소사.
***
가리비아가 나에게 해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식단의 조절, 그리고 운동메뉴의 개편. 물론 그 많지 않은 것들이 불러일으킨 결과는 놀라웠다. 줄어가던 체중이 멈춰 선 것이다.
“별건 아닙니다. 그냥 지금 체중이 Kang에 몸에 가장 적절한 체중인 거에요. 아마 제가 신경쓰지 않았더라도 지금 체중 정도에서 왔다 갔다 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죠.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이곳 멕시칸 리그에 더 적절한 준비를 해서 온 쪽은 Kang이 아닌 프레스톤씨에요.”
“엑? 난 그냥 먹고 또 먹었을 뿐인데.”
“사람의 몸은 섭취한 탄수화물에서 에너지를 뽑아내고 그게 부족하면 지방에서 그리고 근육에서 에너지를 뽑아냅니다. 물론 힘을 내는 부위는 근육이지만 그 힘을 만들기 위한 배터리가 지방인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프레스톤 씨는 여분의 배터리를 충분하게 준비해온 셈이에요. 반면 Kang은 출력은 높인만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도록 몸을 개조했는데 그에 걸맞은 여분의 배터리도 준비하지 않았을뿐더러, 에너지 보급 역시 이전과 별반 차이 없게 해온 거고요.”
“하지만 전 여기 와서 평소보다 많이 먹었어요.”
“네, 그리고 그만큼 많이 배설하셨겠죠. 과거 인간은 에너지를 축적하기 쉬운 쪽이 생존에 유리했고 그만큼 그런 쪽의 인간들이 많이 살아남아 점점 그렇게 진화해왔습니다. 자연선택적 진화죠. 하지만 Kang의 몸은 그렇지 못해요. 뭐 과다섭취로 비만이 되기 쉬운 현대인들에게는 꿈의 체질이겠습니다만 말이죠. 아마 더 드신 만큼 더 기름지고 영양분 많은 배설물이 하수구에 공급됐을 겁니다.”
밀린 집세가 해결된 가리비아는 생각보다 더 똑 부러졌다. 지저분한 외모와 어눌한 영어속에는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근육량을 늘리는 만큼 충분한 양의 체지방도 확보해야 합니다. 물론 그만큼 몸은 무거워질 겁니다. 아마 멕시칸 리그 시즌 시작 즈음의 그 강력하면서 동시에 가벼운 말도 안 되는 몸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할 거에요. 그런 몸은 사실 올림픽에 나가서 10초만 뛰면 되는 단거리 달리기 선수들에게나 어울리는 몸이죠.”
가리비아의 솜씨는 놀라웠다. 리그를 치러내는 것과 동시에 내년 시즌을 대비한다는 것은 나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가리비아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의 몸은 조금씩 두꺼워지고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처럼 근육만을 벼려내는 형태가 아닌 적절한 지방이 포함된 두꺼움이었고 무거움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멕시칸 리그의 시합들을 치러내는 데 느껴지는 부담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게 내가 몸을 정비하는 동안에도 리그는 흘러갔다. 그리고 나에겐 몸을 관리하는 것만큼이나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가리비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득점원에 부여되는 1번, 테이블 세터의 자리. 시즌 초, 대주자로 시즌을 시작했던 내가 지금 팀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비교적 그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해왔다.
시즌 초반 압도적인 홈런으로 장타자라는 이미지를 그들의 머릿속에 박아넣었던 나에게 투수들은 정면승부를 피했고, 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타율보다 8푼 가깝게 높은 출루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수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내 나의 파워가 이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뻐엉!!
“스트라잌!!”
터무니없는 과감함이었다. 백도어성 슬라이더라니. 이건 타자의 힘을 완전히 얕보지 않고서야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공이었다. 장타력을 기대할 수 없는 타자에게나 할 수 있음 직한 도박수. 나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젠장할.’
최근 장타를 기록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가끔 나오는 2루타 역시 좋은 타구가 아닌 좋은 발로 만들어낸 2루타들이었다. 이래서야 투수들이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맞아봤자 단타인 타자를 겁낼 이유 따윈 없었다. 잠시 타석 밖으로 나와 허공중에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여전히 힘찬 스윙이었다. 홈런을 노리는 완벽한 어퍼 스윙.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나의 근력으로는 이상적인 타격에 성공한다손 할지라도 이곳 에스타디오 데 베이스볼 엑토르 에스피노의 광활한 외야를 넘길 수 없단 사실을 말이다.
더 빠르고 더 강한 타구가 필요했다. 물론 방법은 존재했고 연습 역시 충분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과연 실전에서도 통할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었다.
‘해보자.’
볼 카운트 0-1 다시 한번 타석에 들어왔다.
[Kang이 다시 타석에 섰습니다. 어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뭐가, 아 그러네요. 지금 Kang의 폼이 완전히 바뀌었는데요?]
[고전적인 폼이로군요. 찰리 로의 폼입니다.]
[최근 뜬 공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던 Kang이 타격폼을 바꾸네요. 하긴 Kang의 저 빠른 발을 생각해본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갑자기 폼을 바꾸는데 괜찮을까요?]
[글쎄요. 그건 선수 자신만이 알 일이겠죠. 아, 투수 와인드업에 들어갔습니다.]
마운드의 투수에게서 약간의 당황이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최소한 심리전만큼은 내가 이기고 들어가는 셈이었으니.
투수의 박자에 맞춰 나의 오른발이 올라왔다. 박자감을 조율하는 레그킥. 그 오른발이 처음 위치보다 20cm앞 전방을 밟는 순간 무게 중심 역시 왼쪽 다리에서 오른쪽 다리로 넘어왔다. 79kg치의 체중이 만들어내는 전진력. 돌아가는 배트에 그 전진력이 온전하게 실렸다.
‘큭, 조금 높아.’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만화처럼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자마자 성공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볼 카운트 0-2. 좋지 않았다. 마운드의 투수가 미소 지었다. 갑작스러운 광대짓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비릿한 미소. 슬쩍 깨문 아랫입술에서 쇠맛이 느껴졌다.
[아, 헛스윙. 그런데 타격폼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요. 상당히 유려했습니다.]
[그러게요. 제법 많은 연습을 한 것 같습니다.]
[아직 어린 선수인 만큼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적응도 빠를 테니, 일단 한번 지켜볼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볼카운트 0-2. 존 근처를 스치는 공만 나와도 배트를 움직여야 하는 타자에게 극도로 불리한 카운트였다. 밀려오는 긴장감. 두근거리는 심장. 배팅 장갑 속 손바닥이 축축했다.
‘들어 올까? 아니면 하나 빠질까?’
머릿속을 휘감는 상념들. 하지만 고민은 나의 몫이 아니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날아오는 공을 보고 배트를 휘두르는 일뿐. 마운드의 투수가 와인드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다. 감각 역시 또렷했다.
따악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정확하게 공을 때려내는 것뿐. 장타력이 없는 타자를 피해 가는 투수는 드물었다. 볼카운트, 0-2. 마운드의 녀석이 또다시 존 안으로 공을 집어넣었다.
[쳤습니다!! Kang. 낮고 강한 타구. 유격수 미처 반응하지 못합니다.]
[Kang 1루 돌아 2루로, 아 2루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3루까지!!!]
유격수의 무릎 높이로 빠르고 강한 타구가 내야를 벗어났다.
지금 내가 사용한 폼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몸을 키우기 전의 타격폼이었다. 기억 상 아주 먼 과거에 사용했던 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7살 배트를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22살 부상으로 망가지기 전까지 수만 번, 아니 수십만 번을 휘둘렀던 타격폼이었다. 마치 첫사랑을, 첫 키스를 잊기 힘든 것처럼, 혹은 자전거 타는 법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나의 몸 안에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이전보다 더 나아진 부분도 존재했다. 8kg 가까이 소실된 몸, 시즌 초의 압도적인 피지컬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과거보다 강했고, 그 강함만큼 타구의 힘 역시 강력했다.
유격수를 스쳐 지나간 공이 나를 3루에 안착시켜주었다.
[3루에서 세입!! 세입입니다.]
[이거거든요. Kang의 빠른 발이라면 뜬공보다는 이런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들이 더 어울립니다. Kang이 아주 좋은 선택을 했어요.]
시즌 초 경험했던 짜릿한 피지컬, 그리고 내가 꿈꾸는 완벽한 모습에 걸맞은 타격 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도달할 그곳까지 함께하기엔 이것 역시 부족하지 않았다.
‘일단은 이걸로.’
12월, 윈터리그의 막바지, 멕시코의 서늘한 바람이 내 뺨을 스쳤다. 22살. 마이너. 완성까지 머나먼 길이 남은 타자. 하지만 조금 전 유격수를 꿰뚫은 타구로 확신했다. 이 리그가 끝나고 내가 돌아갈 곳은 따뜻한 플로리다가 아니다. 나는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돌아간다.
세계의 중심, 뉴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