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1화 (11/210)

# 11화.

더블A(1)

뉴욕주, 그레이터 빙엄턴 공항.

차가운 바람이 두툼한 외투로 보호받지 못하는 목덜미를 만지고 지나갔다.

“이거 생각보다 더 쌀쌀한데?”

“며칠만 지내면 적응될 거야.”

“그나저나, 영 기대했던 거랑은 다르네.”

“대체 뭘 기대한 거야.”

“글쎄, 자유의 여신상?”

뉴욕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기대하게 되는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거대한 마천루들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뉴욕시와 이곳 빙엄턴은 무려 150마일, 근 250km에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같은 뉴욕주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의 거리 차인 것이다.

대신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상가 사이즈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형적인 미국 중소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녀를 보려면 뉴욕주의 빙엄턴 말고, 뉴욕 시티로 가야지. 뭐 정 보고 싶으면 자동차로 한번 다녀와도 되고. 한 3시간이면 도착할걸?”

“됐어. 자유의 여신님을 차를 타고 가서 뵐 수는 없지. 최소한 비즈니스 정도는 타고 가야 하지 않겠어?”

“그건 그렇지. 열심히 하면 그래도 가을에 볼 수 있지 않을까?”

“가을이라······.”

가을을 이야기하는 프레스톤의 두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 여신은 단순한 관광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뉴욕을 의미했고 우리에게 뉴욕이란 뉴욕 메츠. 즉 빅리그를 의미했다.

구단에서 인정하는 유망주들의 경우 더블A에서 트리플A를 거치지 않고 바로 빅리그로 직행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미래, 눈앞의 프레스톤은 올가을 빅리그로 올라가 평생 동안 트리플A를 경험하지 않았다.

“그래, 가을에 꼭 가자.”

프레스톤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올가을, 이곳에서 혼자 뉴욕행 비행기를 타게 놔두지는 않겠다고. 그 옆자리에는 내가 함께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저 멀리 우리를 마중나온 프런트의 직원이 보였다. 직원이 끌고 온 낡은 포드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구장은 조금 허름했지만 깔끔했다.

“미리 부탁한 대로 두분의 방은 같은 곳으로 했뒀습니다. 프레스톤씨는 짐을 풀고 쉬시면 될 것 같고 Kang은 감독님이 도착하는 대로 좀 보자고 하시네요. 일단 방에 트렁크 가져다 두고 감독님 사무실로 찾아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오자마자 면담이라니.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감독이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으니 나쁜 이야기는 아니였다.

지은 지 오래돼 보이는 2인 1실의 숙소에 트렁크를 내려놓았다. 숙소의 퀄리티는 작년까지 지내던 세인트 루시 메츠의 숙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블A 팀의 숙소 중에는 시설이 훌륭한 곳도 많다고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숙소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녀올게.”

“어, 난 짐 풀고 있을 테니깐 갔다 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구장 2층의 사무실. 주름 하나 없는 젊은 얼굴. 빙엄턴 메츠의 감독 존 깁슨이 나를 반겨주었다. 은퇴 한지 고작 7년.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아 더블A팀의 감독으로 재직 중인 그의 미소가 환했다.

“Kang 환영하네. 멕시코에서의 활약 아주 인상적이었어. 팀에서도 기대가 크더군. 그나저나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185파운드?”

“네, 이틀 전 저녁에 쟀을 때 186파운드였습니다.”

“좋군, 좋아. 우리 리그는 일년에 총 142경기를 진행하네. 물론 빅리그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이제 루키, 싱글A를 거쳐온 친구에게는 제법 힘든 일정이지.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해.”

루키와 싱글A의 역할이 고교, 혹은 대학리그를 졸업한 아마추어들을 프로로 성장시키는 역할이라면 더블A는 그렇게 성장한 선수들이 뛰는 본격적인 프로리그라고 볼 수 있었다. 리그간의 실력차 만큼이나 터프한 일정 역시 갓 올라온 선수를 괴롭히는 요소였다.

“뭐, 그런 의미에서 멕시칸 리그에서 Kang 자네가 보여준 모습은 아주 만족스러웠어. 컨디션이 떨어졌을 때에도 어떻게든 성적을 유지하는것이야 말로 프로의 기본이지. 게다가 막판에는 다시 컨디션을 되찾는 모습까지 보여줬으니 말이야. 이곳에서는 그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하지.”

“감사합니다.”

“일단 난 자네를 주전 중견수로 기용할 생각이네. 작년까지 팀의 2옵션 중견수였던 드와이트의 경우 좌익수 쪽을 주로 맡길 생각이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작년 빙엄턴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했던 중견수인 카를로스는 올해 AAA팀인 노포크로 콜업 됐고, 드와이트의 경우 송구의 정확도가 많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어쨋든 우리 팀에 온 것을 환영하네. 궁금한 점이나 이야기하고 싶은게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네.”

“알겠습니다. 감독님.”

나쁘지 않은 첫 만남이었다.

***

아직 소집일도 되지 않은 만큼 특별히 정해진 연습메뉴나 지도는 없었다. 하지만 실내 훈련장과 그라운드 곳곳에는 훈련에 매진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과연, 프로 선수라 이거군.’

사실 2월 중순이면 아직 훈련에 들어갈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수 인생을 좌우할 시기인 23세, 24세 시즌의 청년들이 모인 곳인 만큼 그 초초함을 풀기 위해 조금 일찍 훈련을 시작하는 것은 그리 드문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선수들 중에서는 하위리그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쳤던 친구들 역시 드물지 않았다.

“여어, 옥타비오, 오래간만이야.”

“Kang 드디어 올라왔구나.”

세인트루시 시절 그럭저럭 인사는 하고 지내던 투수 옥타비오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도미니카 출신의 오른손 투수로 유쾌하고 리더십 넘치는 성격으로 항상 라커룸의 중심에 있던 친구였다.

“이봐, 여기 이 친구가 그 Kang이야. 저기 저 프레스톤 녀석을 중견수에서 강제 은퇴시킨 친구.”

“드디어 올라왔구나. 우리 외야의 구세주.”

“그 프레스톤 녀석을 아무 말 못하고 조용히 우익수로 물러나게 만들었다며. 이제 마운드에서 숨통이 좀 트이겠네.”

옥타비오와 함께 있던 투수들의 목소리로 삽시간에 그라운드가 왁자지껄 달아올랐다. 훈련을 할 생각으로 나온 그라운드였지만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선수들과 친해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었다. 배팅볼 하나라도 더 받아 보려면 이들과 친하게 지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악. 따악. 따악.

한참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때 나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아가게 만드는 깨끗한 타격음이었다.

‘저건?’

놀라운 일이었다. 좌, 우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날아가는 타구들. 아무리 배팅볼이라지만 저렇게 깔끔하게 담장을 넘기는 타구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연속해서 나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친군 누구야?”

“어? 저거 페레즈잖아. 저 친구가 벌써 훈련을 시작하다니.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한 건가?”

“그러게 매일 훈련 빼먹고 술이나 마시던 친구가 왠 일이지?”

“뭐, 새해도 됐겠다 잠깐 마음 다잡은 거겠지. 신경 쓰지 말자고. 어차피 잠깐 저러다 말테니깐.”

페레즈?

“저 친구 포지션은 어떻게 돼?”

“포지션? 작년에는 그냥 여기 저기 외야수로 땜빵을 뛴 친구인데. 그냥 신경쓰지 마. 어차피 나이도 나이고, 아마 조만간 방출될 거야.”

가끔 그런 선수가 있었다.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재능을 갈고닦지 않는 선수들. 얼마든지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지만 스스로 그것을 져버리는 멍청한 인간. 아마 저기 배팅 케이지의 페레즈라는 선수 역시 그런 멍청한 사람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저런 스윙이 재능만 갖고 가능한 거라고?’

그의 배트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호를 그리고 있었다.

***

멕시칸 리그가 끝난 지도 어느새 2달 반의 시간이 흘렀다. 98시즌 리그의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 나는 구장 인근 작은 집의 임대 계약을 끝마쳤다.

“정말 괜찮겠어? 차라리 그 돈이면 이쪽의 일류 트레이너를 고용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너도 봤잖아. 가리비아씨 솜씨를.”

“그건 그런데.”

가리비아를 미국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겉보기엔 추레해 보였지만 가리비아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대학인 UNAM대학 출신의 인재였고 9.11이 있기 전의 미국은 세계에서 외국인들에게 가장 관대한 나라 중 하나였다.

문제는 나의 필요 때문에 가리비아를 데리고 오는 만큼 그의 숙식을 내가 해결해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비록 빙엄턴이 중소도시라고는 하지만 그 비용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뭐,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니깐.’

그러나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돈이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회귀 초반 금전적으로 조금 빡빡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외한 금액 대부분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실에 기초해서 투자를 해뒀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9개월.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아직 압도적인 수익률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빼내는 몇만 달러의 돈은 훗날 몇백만 달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가리비아를 불러다 나의 몸을 맡기는 것은 그 몇백만 달러의 가치 이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나라 난리 났던 거 알잖아. 뭐 나름대로 국위선양 차원에서 얼마 안 되는 달러지만 집어넣었더니 수익률이 좀 괜찮게 나왔어. 그러니깐 걱정 안 해도 돼.”

“뭐야, 그런 좋은 일이 있었는데 밥 한번 안 샀던 거야?”

“현금화를 못 시키고 꽁꽁 묶여있어서 그랬지. 뭐 말 나온 김에 오늘은 알씨네 가서 고기나 배터지게 먹어 보자고. 내가 낼 테니깐.”

***

최근 몇 년 빙엄턴 메츠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어메이징 하지 않은 뉴욕의 메츠는 팜의 내실을 키우는 것보다 트레이드를 통해 그 영광을 재현하려 했고 그 무리한 트레이드들은 메츠의 팜들을 황폐하게 하였다.

3년 전의 성적을 기반으로 배정되는 개막전.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빙엄턴의 개막전 경기는 홈이 아닌 원정이었다.

“와우, 그래도 AA라고 버스는 확실히 훌륭하네.”

빙엄턴의 원정 버스는 네 줄짜리 45좌석 버스가 아닌 세 줄짜리 28좌석 버스였다. 훗날 흔히 우등고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버스. 세인트 루시 시절 타던 버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안락함이 보장되는 버스인 것이다.

물론 그런 비교되지 않는 안락함이라 해도 650km 이상의 장거리를 버스로 이동한다는 것은 여전히 피곤했다. 우리의 개막전 첫 상대는 작년 월드 시리즈의 승리 팀 플로리다 말린스 산하 더블A팀인 포틀랜드 시독스였다.

“브렌튼 빌링슬리라, 대졸 3년 차에 개막전 선발. 플로리다에서 좀 밀어주는 투수인가 본데? 어떠려나?”

“거기 적혀있잖아. 좌완,  평범한 수준의 포심이랑 슬라이더. 그리고 부족한 체인지업이라고.”

프레스톤이 미리 나눠준 상대팀 선발투수의 리포트를 흔들며 답했다. 하지만 이 리포트에 적힌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프레스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23살, 대졸 3년 차의 프로 투수. 아직 한창 성장할 나이였다. 게다가 오늘은 개막전. 4개월, 혹은 5개월가량의 오프 시즌이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을지는 그 누구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었다.

“뭐 나머지는 타석에서 천천히 알아가면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잘 부탁해. 1번 타자님.”

“그래, 잘 지켜보라고. 3번 타자.”

존 깁슨 감독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개막전 경기, 나는 주전 중견수로 시즌을 시작했다. 다만 한 가지 뜻밖이었던 것은 그가 나에게 1번 타자의 자리를 맡겼다는 점이었다. 이미 그에게서 타격적인 부분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던 만큼 전혀 생각지 못했던 자리였다.

‘기껏해야 7번이나 8번 타순을 맡길 줄 알았는데 말이지.’

이는 바꿔말하면 그만큼 팀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감독이 봤을 때 타격이 아직 많이 부족한 내가 그래도 팀에서 3, 4번째로 잘 치는 타자라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