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2화 (12/210)

# 12화.

더블A(2)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4월. 다시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포틀랜드 시독스와 빙엄턴 메츠의 개막전. 포틀랜드 시독스의 선발투수는 브렌튼 빌링슬리로군요. 작년 싱글A 케인 컨츄리에서 26경기 선발등판 17승의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올라온 브렌튼 선수, 과연 오늘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빙엄턴 메츠의 선발인 옥타비오 도텔 선수 같은 경우 작년 하반기 이곳 이스턴 리그로 올라와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과연 오프 시즌 동안 얼마나 성장했을지가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군요.]

깨끗하게 정비된 그라운드. 내외야 1만 3천 관중석 대부분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경험해본 가장 많은 관중 수였다. 만여 개의 시선이 한순간 나에게 집중됐다. 가벼운 긴장감과 흥분. 아직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등줄기가 가볍게 젖어왔다.

[타석에 빙엄턴의 1번 타자 Kang이 올라옵니다. 작년 플로리다 리그에서 뛰었던 선수로군요. 41도루로 리그에서 2번째로 많은 도루를 기록한 선수입니다.]

[장타율도 준수하고 출루율도 준수합니다만 타율이 조금 부족하네요. 과연 이곳 이스턴에서도 플로리다 만큼 훌륭한 모습을 이어갈 수 있을지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라운드에 우뚝 솟은 마운드. 브렌튼 빌링슬리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그랬다. 이런 규모의 관중 앞에 서는 것은 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빌링슬리의 와인드업이 시작됐다.

뻐엉!!

호쾌한 투구 동작. 힘 있는 포심 패스트볼. 하지만 방망이를 내밀 필요도 없었다.

[투수 초구!! 아, 바깥쪽으로 크게 빠집니다.]

[저 선수 기록을 보면 제구력이 아주 훌륭한 투수인데, 아무래도 조금 긴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어린 선수니깐요.]

마운드의 빌링슬리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한층 더 딱딱해진 표정.

뻐엉!!

볼카운트 2-0. 또 어림없는 공이었다. 어쩌면 첫 승부는 의외로 수월하게 가져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헌데 그 순간 포틀랜드 시독스의 포수가 손을 들었다.

[포수 마운드를 방문하네요. 좋은 타이밍이에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루키입니다. 한정된 기회이긴 하지만 아주 적절한 방문이라고 생각되네요.]

포수의 한 박자 빠른 마운드 방문.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빌링슬리의 표정이 한결 편해보였다.

뻐엉

“스트라잌!!”

만약 배트를 휘둘렀어도 안타로 만들기 힘든 외곽 높은 볼. 살짝 벗어난 것도 같은 코스였는데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젠장, 이런 공을 잡아주면 대체 어떻게 게임을 하라는 거야?’

볼카운트 2-1. 4구, 마찬가지로 호쾌한 투구 동작이 이어졌다.

부웅!!

‘큭.’

체인지업이었다. 하위리그에서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변화구. 패스트볼과 거의 흡사한 동작에서 튀어나온 체인지업에 나의 배트가 헛돌았다. 부족한 수준의 체인지업이라는 스카우팅 리포트의 문구가 머리 속을 맴돌았다.

‘젠장, 이런 공이 40점짜리라고?’

그리고 5구. 또 한 번 투수의 타이밍에 맞춰 나의 오른쪽 앞발이 슬쩍 올라왔다. 아슬아슬한 코스. 2구째와 흡사한 외곽 높은 볼이었다.

티익!!

손끝이 찡하게 울려왔다. 파울 존을 벗어나는 누런 공. 아무리 생각해도 존 밖을 완벽하게 벗어난 공이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스트라이크 콜을 받은 이상 2-2의 상황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6구.

‘실투?’

조금 높은 코스이긴 했다. 하지만 한 가운데로 날아드는 빠른 공. 지금까지 봐왔던 공 중에서 가장 치기 편해 보이는 공이었다. 나의 배트가 망설임 없이 힘차게 돌아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아웃!!!!! 빌링슬리의 슬라이더에 Kang의 배트가 헛돌았습니다. 87마일? 88마일? 슬라이더의 구속이 엄청난데요?]

[무브먼트 역시 훌륭했습니다. 거의 6인치는 움직인 것 같았어요. 브렌튼 빌링슬리 선수, 기록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위력적인 슬라이더. 빙엄턴의 첫타자 Kang이 스윙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슬라이더. 같은 손 타자에게 가장 강력한 변화구. 그런 만큼 하위리그에서도 종종 마주쳤던 공이었다. 하지만 하위리그에서 만났던 수많은 좌완투수의 슬라이더 중 이렇게 대단한 공은 없었다.

‘이런 공이 고작 평균일 리가. 젠장.’

나의 첫 타석이 허무하게 끝났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이나 다른 유망주들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불과 4개월 전의 스카우팅 리포트는 현재의 그를 담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4개월 전의 스카우팅 리포트가 현재를 담지 못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몇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직 나에게는 그것을 증명할 2번, 어쩌면 3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었다.

“스트라잌!! 아웃!!”

삼자범퇴. 글러브를 움켜쥔 나의 몸이 드넓은 그라운드로 향했다.

‘일단은 수비부터.’

타자의 배트가 강하게 돌아갔다. 두둥실 떠오르는 공이 내가 서 있던 곳과는 제법 멀리 떨어진 외야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느렸다. 나의 발을 생각한다면 처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공이 아니었다.

[깊숙한 타구, 중견수 Kang이 능숙하게 잡아냅니다.]

[상당히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저 선수 레인지가 굉장히 넓은 것 같아요. 물론 지금 저 타구가 그리 어려운 타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여유롭게 잡을만한 공도 아니었거든요.]

[루키 시절부터 수비툴 하나만큼은 메이저에서도 손에 꼽힐만하다고 평가받았던 선수라고 하는군요.]

[확실히 타구판단이나 주력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 보통 여기까지 올라온 유망주들이 위로 올라갈 때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가 수비인데, 저 선수 같은 경우는 그 부분에선 이미 합격점을 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우리 팀의 선발투수인 옥타비오는 전형적인 파이어볼러였다. 자신의 속구에 대한 단단한 믿음으로 많은 삼진을 추구하는 스타일. 평균 94마일 최대 98마일까지 나오는 그의 패스트볼은 속도뿐 아니라 테일링 역시 훌륭했다. 그가 사용하는 결정구는 몸쪽 높은 패스트볼이었는데, 그런 그의 특성상 플라이볼이 나올 확률이 매우 높았다.

따악!!

좌측으로 크게 치우친 플라이 볼.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리 빠른 타구는 아니었다. 일반적인 수비능력이라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공. 하지만 중견수에서 좌익수로 컨버젼한 드와이트의 글러브가 허공을 휘저었다.

[드와이트!! 달려갑니다. 다이빙!!!!]

[놓쳤습니다. 드와이트가 공을 놓쳤습니다. 주자, 2루로. 2루 지나 3루까지!!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드와이트 선수 몸을 던져보지만 조금 부족했습니다. 순식간에 득점권에 주자를 보내는 시독스. 빙엄턴 위기입니다.]

드와이트의 속도는 나쁘지 않았다. 나빴던 것은 그의 판단능력이었다. 순식간에 위기상황. 마운드에 선 옥타비오의 얼굴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이어지는 타석에는 상대 팀의 3번 타자. 네이트 롤릴슨이 올라왔다. 21살의 고졸 타자. 메이저로 향하는 최단거리 엘리트 코스를 걷고 있는 그는 3년 연속으로 BA 리포트 1루수 부문 3위 안에 꼽혔던 유망주였다.

부웅

“스트라잌!!”

깊숙한 곳으로 날리기만 한다면 선취점이 나오는 상황. 네이트의 스윙이 호쾌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네이트 롤릴슨 선수, 슬라이더에 배트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투수로서도 방심하긴 힘들 겁니다. 저 스윙을 보세요. 저런 게 제대로 걸리면 그대로 홈런이거든요. 저 선수 작년 싱글A 미드웨스트리그에서 27홈런을 기록했어요. 괜히 플로리다 팜내 1위 유망주가 아닙니다.]

[네이트 롤릴슨 선수 다시 자세를 잡습니다.]

볼, 볼. 그리고 스트라이크. 2-2의 상황. 선취점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을까? 옥타비오의 실투가 터졌다. 중앙으로 몰린 공. 롤릴슨이 옥타비오의 실투를 놓치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빠르고 강한 직선 타구.

‘잡을 수 있을까?’

긴장한 채로 타석을 바라보고 있던 내가 번개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비라면 어디 가서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하던 나였지만 이 공은 설사 전성기의 윌리 메이스라고 해도 잡아낼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담장을 직격, 혹은 담장을 살짝 넘어가는 홈런이 될 것 같은 공.

[롤릴슨, 강한 타구. 넘어가나요?]

[그렇게 보기엔 발사각이 너무 낮고 빠르네요. 아마 담장을 직격하는 타구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롤린슨 선수도 느린 선수는 아니니 2루까진 충분히 도착할 것 같군요.]

‘닿아라!!’

달려가던 힘 그대로 단단한 그라운드를 박찼다. 높게 떠오른 몸. 그리고 쭉 뻗은 왼손. 뒤로 돌아 다시 한번 타구를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고교 시절이었다면 1점을 주고 안전한 수비를 해야 한다며 질책받았을 수비. 하지만 이곳은 그런 안정적인 수비보다,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비를 추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이었다.

[맙소사. 저게 뭐죠?]

[Kang! Kang!! Kang!!!!]

쭉 뻗은 왼손의 끄트머리, 둔탁한 통증이 전해졌다. 글러브 끄트머리에 걸린 누런 공이 바닥을 향해 낙하하는 나의 글러브를 벗어났다.

‘안돼!!’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직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공을 떨어트릴 수 없다는 생각뿐. 정신을 차렸을 때 바닥에 떨어진 나의 오른손에는 누런 공이 들어와 있었다.

[잡았습니다. Kang!! Kang이 공을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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