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3화 (13/210)

# 13화.

더블A(3)

“홈으로!!!”

저 멀리 프레스톤의 외침이 들려왔다. 쓰러진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홈 근처까지 갔던 상대 팀 3루 주자가 3루로 귀루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내 임무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3루 주자가 다시 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이 공을 홈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굳이 강한 송구까지도 필요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공이 잡힌 이상 어지간하지 않고선 3루 주자가 다시 홈으로 쇄도할 일은 없었다. 그저 근처에 서 있는 내야수에게 이 공을 전달하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산체스!”

자리에서 일어나 짤막한 외침과 함께 산체스를 향해 공을 뿌렸다. 넘어질 때의 충격 탓인지 조금은 불완전한 송구.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나쁜 송구는 아니었다.

“이런 미친!!”

[맙소사. 산체스. 포구 미스!!]

[3루 주자, 달립니다.]

[산체스 선수, 당황한 건가요? 바닥을 더듬습니다. 아.]

하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송구조차도 산체스에게는 조금 벅찼던 것 같았다. 그의 글러브를 맞고 흘러나오는 공. 심지어 최악이었던 것은 그렇게 흘러나온 공을 다시 잡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었다.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1회 말, 포틀랜드 시독스가 빙엄턴 메츠를 상대로 선취점을 만들어냅니다. 1:0.]

[Kang. 정말 환상적인 수비였습니다. 일단 저 점프캐치 좀 보세요. 저렇게 빠른 타구를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캐치했어요. 물론 워낙 높은 공이었던지라 점프가 조금 모자라긴 했습니다만 이후 이어지는 저 아크로바틱한 모습 좀 보세요.]

[글러브를 맞고 튕겨 나온 공을 공중에서 베어 핸드로 잡아내는 저 묘기. 제가 40년 가까이 야구를 봐왔지만 장담컨대 이와 비슷한 수비는 아예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만큼 Kang으로서는 허탈하기 짝이 없는 실점일 겁니다. 이런 환상적인 수비를 보여줬는데 결국 실점을 했어요. 송구가 약간 낮긴 했지만 그래도 못 잡을 공은 아니었거든요. 작년 리그 최악의 수비를 보여줬던 빙엄턴 메츠. 훌륭한 중견수가 추가됐습니다만 올해도 여전히 불안불안 합니다.]

2아웃 주자 없음. 그리고 내야 땅볼 아웃. 1회 말이 끝났다.

덕아웃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구석에 앉아있는 옥타비오는 뚱해 보였고 실책을 저지른 산체스, 그리고 드와이트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덕아웃에서 보내는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삼자범퇴

2회초 마운드에 선 브렌튼 빌링슬리는 강력했다. 우리가 다시 글러브를 끼고 그라운드로 돌아가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은 고작 5분에 불과했다.

경기가 이어졌다. 옥타비오는 간간이 안타를 허용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삼진들로 이닝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추가점 없이 4회 초. 마침내 나의 두 번째 기회가 돌아왔다.

“만만치가 않아.”

덕아웃, 경기 내내 함께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빌링슬리의 피칭을 지켜보던 프레스톤의 말이었다. 항상 낙천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녀석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우리가 노히트 노런으로 패배했던 날 녀석의 입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그래도 해볼 만하겠는데?’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오늘의 ‘만만치가 않아.’는 최소한 노히트 노런 정도는 각오하는 게 좋다는 경고일지도 몰랐다.

“빠르고, 제구도 좋아. 변화구는 더 좋지. 솔직히 왜 아직 빅리그로 올라가지 않은 건지 궁금할 정도야.”

“게다가 좌완이지.”

“약점이 있긴 있을 텐데.”

“글쎄, 그냥 오프시즌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여기서 그걸 시험하고 바로 빅리그로 올라가려는 거 아닐까?”

“뭐, 그렇다면 그런대로 상대해보는 수밖에 없잖아. 어차피 위로 올라가면 저런 괴물들이 득실거린다는 거니깐.”

프레스톤의 이야기처럼 위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저런 괴물 같은 투수들을 매일 상대한다는 의미였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몸이 떨려왔다. 두려움? 아니 그렇다기보단 기쁨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내가 다시 도전할 자격을 얻어낸 길이 지독하게 험난한 길이라는 사실은 고난 없는 성공을 경험했던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우연과 운으로 얻어낸 성공이 얼마나 인간을 의미 없게 만드는지를 나는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위대한 영광은 가장 험난한 고난이 있기에 그 무엇보다 빛나는 법이었다.

[4회 초, 메츠의 1번 타자 Kang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두 번째 타석이군요.]

[오늘 빌링슬리 선수 활약이 아주 대단합니다. 3이닝 연속 삼자범퇴에 삼진만 5개입니다. 체인지업과 슬라이더가 아주 효과적이에요.]

앞선 타석, 바깥쪽 높은 공에 스트라이크 콜이 나온 것은 우연, 혹은 심판의 변덕이 아니었다. 오늘 주심인 크리스의 존은 좌우로 아주 후했다. 존에 정말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혹은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것 같은 모든 공에 주심, 크리스의 손은 어김없이 올라왔다.

이는 안 그래도 까다로운 투수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횡무브먼트가 심한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사용하는 저런 투수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침착하게.’

9명의 타자를 완벽하게 막아냈다는 것일까? 1회 초와 달리 자신감으로 가득 찬 얼굴의 체드 빌링슬리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고전적인 투구 동작. 디셉션이 많지 않은 정직한 동작인지라 타이밍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따악!!

[초구, 쳤습니다!!, 하지만 많이 밀린 타구. 내야 관중석을 넘어갑니다.]

[방금은 Kang이 완벽하게 허를 찔렸습니다. 빌링슬리 선수, 지금까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만 가끔 보여주던 체인지업을 대뜸 초구로 집어넣었어요.]

[볼카운트 0-1. 빌링슬리가 승부를 유리하게 가져갑니다.]

‘큭, 갑자기 초구 체인지업이라니. 그래도 다행이야. 최악은 면했군.’

문제는 도저히 투구 동작으로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그리고 포심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앞선 타석에선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던 초구 체인지업. 다행히 생각보다 배트에 힘이 더 실린 덕분에 타구가 제법 멀리 뻗어주었다. 자칫 잘못했다면 초구 아웃을 당할뻔한 상황.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다음 공은 빠른 공이겠지? 속구? 슬라이더?’

루틴대로 장갑을 동여매고 옷깃을 정돈한 뒤 타석에 돌아왔다. 두근거리던 마음이 조금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마운드 위, 빌링슬리가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호쾌하게 뻗어 나오는 오른쪽 다리. 그리고 글러브에 가려져 있던 왼손에서 공이 튀어나왔다.

빠른 공

배트가 돌아가는 속도와 맞아 떨어지는 빠른 공이었다.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 높은 코스의 빠른 공. 오늘 심판의 존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스트라이크 콜이 튀어나올 공이었다. 하지만 문득 싸한 예감이 등골을 스쳤다.

‘젠장!!’

아무런 근거 없는, 단순한 직감이었다. 하지만 나의 육체는 그 순간 그 직감을 따라가고 있었다. 돌아가던 배트가 멈춰섰다. 관성과의 싸움을 이겨낸 나의 손목이 살짝 아려왔다. 하지만 그 대가는 충분했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나의 직감이 맞아떨어졌다. 슬라이더, 슬라이더였다.

[빌링슬리의 슬라이더. 앞선 타석에서 저 공으로 물러났던 Kang이 잘 참아냅니다.]

[하위리그에서 저 정도 슬라이더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저 선수 선구안이 아주 훌륭하네요.]

볼카운트 1-1. 고작 2개의 공을 목격했을 뿐인데 마치 몇 번의 타석을 경험한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떻게 나올까?’

포심, 체인지업 모두 훌륭했지만 내가 봤을 때 빌링슬리의 결정구는 슬라이더였다. 특히 같은 손 타자에게 그의 슬라이더는 그야말로 전가의 보도와도 같았다. 이제 막 AA에 올라온 루키. 오프시즌 동안 갈고 닦은 무기가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보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루키가 자신의 보검이 통하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면?

‘슬라이더다.’

뻐엉!!

멈춰선 배트. 이번에도 나의 선택은 옳았다. 볼카운트 2-1. 가벼운 긴장과 흥분이 나의 몸을 달궜다. 몸속 깊숙한 곳 잠자던 세포들까지 깨어나는 것 같은 느낌. 방망이를 움켜쥔 나의 양손이 후끈했다.

[2구 연속 슬라이더!! Kang이 이번에도 잘 참아냅니다.]

[이거 빌링슬리 선수에겐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마운드 위, 빌링슬리의 투구 동작은 여전히 호쾌했다. 하지만 공을 뿌리는 빌링슬리의 얼굴은 달랐다.

뻐엉!!

슬라이더는 아니었다. 하지만 너그러운 존을 가진 심판도 스트라이크 판정을 할 수 없을 만큼 빗나간 패스트볼. 이제 마운드에 선 투수는 더는 자신감 넘치는 메이저 수준의 투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작 슬라이더가 두 번 간파된 것만으로 긴장해버리는 겁쟁이였다.

‘프레스톤의 말이 맞았군. 멘탈이 약점이야.’

흔히 큰 무대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들을 우리는 새가슴이라고 표현했다. 평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포스트 시즌, 혹은 월드 시리즈에서는 엉망으로 망가지는 선수들. 하지만 진짜 새가슴은 그런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메이저의 평범한 경기가 주는 부담감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 하지만 실력만큼은 훌륭해서 버릴 수 없는 이들. 마이너에는 그런 선수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저 빌링슬리는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새가슴이었다.

[터무니없이 빗나간 볼입니다. 아 포수 마운드에 올라가네요.]

[벌써 두 번째 방문입니다. 작년부터 신설된 규정에 따르면 한 경기 같은 투수에게는 최대 3회밖에 마운드에 오를 수 없거든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인지 또다시 딱딱하게 굳어있던 투수의 얼굴이 풀어졌다. 어쩌면 저 녀석은 단순한 새가슴이 아닌 그저 상황에 맞춰 감정 기복이 극심한 머저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일단 존 안으로 집어넣는 포심 일까? 아니면 가장 자신 있는 슬라이더? 나름대로 재미를 봤던 체인지업?’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마운드의 빌링슬리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움켜쥔 배트. 그의 움직임에 맞춰 나의 오른쪽 다리가 슬쩍 올라갔다.

바깥쪽 높은 공. 존에 살짝 걸쳐있는 바깥쪽 높은 공이었다. 타이밍은 정확했다. 볼카운트 역시 3-1로 유리했다. 거세게 돌아가는 배트에 망설임 따윈 묻어있지 않았다.

따악!!

[쳤습니다!! Kang이 빌링슬리의 96마일 포심을 그대로 잡아당깁니다.]

[Kang 1루로!! 1루 지나 2루까지!!]

[2루수를 스치는 강한 타구. 우익수 공을 잡아 2루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4회 초, 빙엄턴 메츠의 첫 안타. 메츠의 선두타자 Kang이 시독스의 빌링슬리를 상대로 5구째 패스트볼을 잡아당겨 2루타를 만들어냅니다.]

확장된 혈관으로 힘차게 피를 뿜어내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더블A 첫 무대. 팀의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던 투수를 상대로 기록한 안타였다. 덕아웃,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프레스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또한, 2루타를 허용하고 새파랗게 질려버린 빌링슬리의 얼굴 역시 눈에 들어왔다.

사구, 그리고 홈런.

마운드의 빌링슬리가 내려갔다.

물론 그가 내려갔다고 경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 구단의 파이어 세일로 박살 난 로스터를 메우기 위해 쓸만한 선수들을 죄다 끌어올린 시독스의 불펜은 그리 좋지 못했다.

3시즌. 빙엄턴이 3시즌 만에 개막전을 승리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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