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자본의 논리
“헤이, 진호. 이것 좀 봐봐.”
“뭔데?”
프레스톤이 내민 것은 한 장의 신문이었다. 저질의 종이와 잉크로 인쇄된 조악한 품질의 지역신문. 하지만 98년 초. 아직 xDSL형식의 초기 초고속인터넷망조차 제대로 보급된 지역이 없는 현실에서 신문은 가장 파급력이 큰 매체 중 하나였다.
[빙엄턴 중견수의 믿을 수 없는 점프 캐치.]
사진만으로는 결코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화질. 유니폼에 새겨진 등번호조차 희미한 사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나였다.
“내가 이렇게 높게 뛴 거야?”
“정말 대단했다니깐. 이번 기회에 야구는 그만두고 농구로 전업하는 건 어때? MJ가 농구 그만두고 야구로 갔던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넌 다시 중견수로 돌아가고?”
“뭐, 팀에 중견수가 꼭 필요하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됐네요. 그건 일단 농구의 MJ처럼 야구에서 그만한 위치에 오른 다음 생각해보도록 하자고.”
프레스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나의 시선은 그 조악한 신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신문에 이름이 올라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나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야구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었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시들해진 고교야구였지만 그래도 야구는 야구였다. 굵직한 대회마다 스포츠 신문에 이름을 올리는 일 정도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세계의 야구 천재들이 모여든 이곳 미국땅에서 영어신문에 사진과 이름이 박힌 것은 감회가 남달랐다.
‘한 부 챙겨서 집에 보내야겠어.’
비록 빙엄턴의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그마한 지역 신문이었지만 그래도 신문은 신문이었다.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정보교류가 존재하지 않는 98년, 학창시절부터 나에 관한 기사라면 아주 사소한 이야기라도 스크랩을 해두시던 부모님께는 좋은 깜짝 선물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 뒤, 나는 내가 1998년의 한국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작년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대한민국은 자신들의 자존감을 치유해줄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꼽힌 것이 바로 LA다저스 박찬화 선배였다. 다저스의 5선발로 시작해 97년 매우 훌륭한 성적을 이뤄낸 선배의 활약 덕분에 미국 야구에 대한 한국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게다가 빙엄턴 대학은 제법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을 보유한 대학이었다. 인터넷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절이었음에도 나에 대한 소식이 한국에 퍼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끓어오른 열기는 나를 향한 취재경쟁으로,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취재로 이어졌다.
[뉴욕 메츠의 초대형 유망주 강진호. 현지인들이 극찬한 플레이를 선보이다.]
[메츠의 감독 존 깁슨 ‘Kang은 충분히 빅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학창시절부터 전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유망주였다. 중학 시절부터 신문에 이름을 올렸던 만큼 언론의 관심이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작 마이너의 선수가 하루가 멀다고 인터뷰를 하는 것, 그리고 한국의 기자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칭찬을 갈구하는 모습은 조금 민망했다.
“여어, 슈퍼스타.”
“슈퍼스타는 무슨. 어차피 이것도 며칠 지나면 다시 잠잠해질 거야.”
나와 같은 방을 쓴다는 이유로 시달린 프레스톤에게는 제법 근사한 디너를 몇 차례 제공했다. 어린 시절 유명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터라 언론을 대하는 것에 능숙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수고는 수고였다.
“큭큭큭, 글쎄, 그 사람들 하는 거 보니깐 아주 여기 캠프를 차릴 기세던데?”
“그냥 요새 우리나라에 메이저 리그에 관한 관심이 좀 높아져서 그래. 안 그래도 야구가 최고인기 스포츠인데, 최근 박찬화 선배가 좀 잘해야지.”
다행스럽게 내 예상처럼 언론은 금방 사라졌다. 1998년의 더블A가 KBO와 비교해 오히려 한 수준 높은 리그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보기에는 그저 위로 트리플A와 빅리그가 있는 마이너 리그일 뿐이었다. 하지만 언론의 호들갑은 뜻밖의 소득을 만들어냈다.
“강진호 선수, 힘내요!!”
“오늘도 멋진 모습 기대할게요.”
빙엄턴 지역, 교포, 그리고 유학생들의 응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도시의 그것처럼 커뮤니티라고 할만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내주는 지속적인 응원에 주변 동료들은 종종 부러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 응원은 호들갑스러움으로 나를 민망하게 만들던 언론의 관심과 다르게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개막전이 있었던 4월 한 달, 총 스물네 번의 경기 중 내가 선발로 이름을 올린 경기는 무려 스물세 번. 팀에서 가장 많은 횟수였다. 그리고 5월. 시작은 노리치 내비게이터스와의 홈경기였다.
[Kang 쳤습니다!! 빗맞은 타구. 3루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 사이 Kang은 1루로 빠릅니다!!]
[3루수, 공을 집어 1루로. 1루에서!! 세입. 세입입니다.]
[안타입니다. Kang이 5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합니다.]
아슬아슬한 타구였다. 3루수의 대응이 조금만 빨랐더라도 결코 들어올 수 없었던 공. AA의 선수 상당수가 타격과 비교했을 때 수비가 약하다는 점이 또 한 번 나를 살렸다. 이걸로 타율은 다시 2할 9푼대. 팀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타율이었다.
‘운이 좋았어.’
베이스에서 3걸음 반. 자세를 낮춘 채 투수를 살폈다. 스물세 번의 경기를 통해 나는 감독님께 그린 라이트를 받아낼 수 있었다. 팀의 작전과는 상관없이 오직 나의 판단으로 도루를 결정지을 수 있는 권리. 나는 그린라이트에 얹혀진 감독님의 기대를 11도루 1도루 실패라는 환상적인 결과로 보답했다.
“세이프!!”
그리고 스물네 번째 경기 내가 열두 번째 도루를 성공시켰다. 노아웃 주자 2루 상황. 프레스톤의 타격이 이어졌다. 본래 3번 타자로 활약하던 프레스톤은 최근 2번으로 타순을 조정받았다. 졸지에 클린업트리오에서 강등당한 프레스톤이 잠시 불만을 표했지만, 감독의 방을 한번 방문한 이후 그 불만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가장 좋은 타자가 2번을 치는 것이 팀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라는 존 깁슨 감독의 말 때문이었다. 2000년대에 유행했던, 아직은 메이저에 주류 이론이라고 보기 힘든 강한 2번 타자론이었다. 전통적인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세이버 매트릭스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한 이론이었지만 특정 상황 하에서는 분명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우리 팀은 그 특정한 상황에 정확하게 부합했다.
따악!!
[높은 공!! 쳤습니다. 유격수 옆으로 빠져나가는 공, 좌익수 달려보지만 늦습니다.]
[2루 주자 3루로.]
3루 베이스 너머 코치의 팔이 거세게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외야수가 공을 잡지도 못한 상황. 시간은 충분했다.
[3루 지나 홈까지!!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Kang 시즌 17번째 득점. 빙엄턴 메츠가 선취점을 따내며 경기를 앞서나갑니다.]
[Kang의 출루와 도루, 그리고 프레스톤의 타격. 최근 빙엄턴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득점 패턴입니다. 프레스톤도 이번 시즌 타점이 벌써 19점입니다.]
수준 높은 변화구들에는 프레스톤도 나도 여전히 미숙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훌륭하게 리그에 적응하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9월 확장 로스터 콜업 역시 마냥 헛된 꿈만은 아닌 상황이었다.
0.285/0.339/0.396
2할 9푼으로 올라갔던 타율은 이후 4번의 타석이 더해지면서 다시 2할 8푼대로 내려가긴 했지만, 투고타저 현상이 꽤 심한 이곳 이스턴 리그에서 제법 봐줄 만한 성적이었다. 라커룸에서 간단히 샤워하고 나왔을 때 오늘은 출전하지 않은 데니스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봐 Kang, 감독님이 잠깐 오라고 하시는데?”
“응? 무슨 일이지?”
“나야 모르지.”
어깨를 으쓱하는 데니스를 뒤로한 채 구장의 2층 존 깁슨 감독의 사무실을 찾았다. 특별히 부를만한 일이 없었기에 궁금증이 드는 호출이었다.
“아, Kang 왔군.”
“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감독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트레이드인가?’
지금 한창 좋은 페이스로 달리는 팀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리 좋지 못한 이야기일 테지만 팀은 언제나 모구단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법이었다. 구단의 움직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으로 옮겨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하지만 감독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짐을 싸야 할 것 같네.”
“네?”
“뉴욕에서의 호출이야. 지금 당장 짐을 꾸려서 가도록 해. 운전은 테드가 해줄거야”
“그러니깐 지금.”
“그래, 웨인이 부상이야. 꽤 심각하다고 하더군. 짧아도 60일. 어쩌면 시즌 아웃이야.”
맙소사. 항상 꿈꾸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껏해야 9월 확장 로스터를 기대했을 뿐 지금 이 순간 이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도무지 실감할 수 없는 현실. 하지만 테드의 운전 솜씨는 좋았고 뻥 뚤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빨랐다.
“하하, 이건 비즈니스석이 아닌데.”
불과 3시간의 여행.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은 5만7천석 셰이 스타디움의 웅장한 모습이었다.
가슴이 뜨거웠다. 19살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와 햇수로 4년째.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했다. 벅찬 감동이 밀려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Kang, 이쪽으로. 단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아, 네.”
작년 하반기 메츠의 단장으로 임명된 스티브 필립스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 헐리웃 배우를 연상케 하는 훤칠한 미남의 미소가 눈부셨다.
“반갑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참 많았어요. 얼떨떨하겠지만, 그건 뭐 차차 적응하는걸로 하고, 일단 당분간 숙소는 플라자 호텔을 사용하도록 하면 될 겁니다.”
“플라자 호텔이요?”
과연 빅리그였다. 이제 막 올라온 마이너리거에게 제공하는 숙소가 퀸스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이라니.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숙소에 들어가서 쉬시고, 공식적인 일정은 내일부터 시작하는걸로 하시죠. 여기 크리스틴이 당분간 일정을 조율해줄 겁니다. 크리스틴, 일단 호텔로 안내해드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숙소에 들어와 간단하게 짐을 푸는 사이에도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5성급 호텔 방의 따뜻한 욕조에 몸을 눕히니 하루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이너에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대우였다. 5월 1일.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 * *
‘그런데 왜 하필 나지?’
다음날 아침 콜업의 흥분이 조금 사라진 자리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물론 지금 빙엄턴에서 웨인의 빈자리를 메우기 가장 좋은 외야수는 나였다. 웨인은 팀의 4번째 옵션이었고 주전 선수들의 휴식을 위해 좌, 중, 우를 가리지 않고 들어가던 수비형 외야수였다. 하지만 구단의 트리플A팀인 노포크까지 포함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곳에는 빅리그 경험이 적지 않은 노련한 외야수들이 여럿 존재했다. 가능성만을 보고 뽑았다고 하기에도 나의 타격성적은 아직 부족했다.
“Kang?”
“아, 크리스틴.”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부른것은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이곳 호텔 식당까지 나를 안내해줬던 크리스틴이었다.
“방에 돌아가시면 옷이 준비돼 있을 겁니다.”
“옷이요?”
“네, 인터뷰용 정장이니 갈아입고 내려오시면 됩니다. 시간은 27분 정도 남았군요.”
“인터뷰라뇨?”
“네, 뉴욕쪽 지역지 몇 개, 그리고 ESPN입니다.”
맙소사 ESPN이라니.
“ESPN이라고요? 설마 그 ESPN을 말하는 건가요?”
“네 코네티컷에 위치한 그 ESPN을 말하는 겁니다. 물론 메인 채널은 아닙니다만.”
“아니, 그 ESPN에서 대체 저를 왜?”
“그리 대단한 인터뷰는 아닙니다. 빅리그로 콜업 됐다는 그냥 의례적인 인터뷰입니다.”
“의례적이요? 보통 콜업 된 선수들이 모두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건가요? ESPN과?”
“아뇨, 물론 그건 아닙니다. 26분 남았군요.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내려오시죠.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중에 하도록 하고요.”
머릿속이 복잡했다. ESPN이라면 거의 모든 케이블과 위성방송 기본패키지에 포함된 미국 내 최고의 스포츠 중계 채널이었다. 스포츠에 관해서 만큼은 지상파 이상의 위상을 가진 방송국. 그런 방송국에서 이제 막 더블A에서 올라온 애송이에게 인터뷰라니.
“딱 맞네.”
옷은 정확하게 나에게 맞아떨어졌다. 물론 딱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구단은 나의 신체 사이즈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체 사이즈를 알고 있다고 더블A에서 막 콜업된 선수를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하는 일이 당연한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찝찝한 예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인터뷰 장소는 구단의 프레스룸이었다. 쉴새 없이 돌아가는 카메라, 그리고 그곳에 스티브 단장이 당연하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 모였다던 기자들은 내가 아닌 스티브 단장에게 질문을 쏟아냈고 영화배우를 닮은 그가 호쾌하게 웃으며 답할 때마다 카메라들은 연신 빛을 내뿜었다.
“최근 메츠에 아시아인 선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오늘 Kang의 콜업 역시 아시아인들의 구매력을 겨냥한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 절대 아닙니다. 4월 한 달 훌륭하게 활약한 마사토 선수만 봐도 아시겠지만, 아시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야구를 잘 하기 때문에 영입하는 겁니다. Kang은 훌륭한 선수고, 충분히 빅리그에 어울리는 자질을 갖췄습니다.”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이건 마치 94년 찬화 선배를 메이저로 직행시켰던 다저스의 행보와 흡사했다. 그리고 당시 찬화 선배는 고작 17일간을 로스터에 머물고 바로 마이너로 내려갔다. 메츠의 프런트가 원한 것은 그저 이슈 몰이, 그리고 교포들에 대한 어필이었다. LA만큼은 아니지만, 뉴욕 역시 재미교포, 그리고 유학생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작년 부임한 단장의 얄팍한 속내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젠장.’
나의 인터뷰라기보다, 단장의 인터뷰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던 쇼가 끝났다, 단장은 사라졌고 크리스틴만이 남아 나를 라커룸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TV 등을 통해 익숙한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흠, Kang?”
바비 발렌타인. 미국과 일본을 아울렀던 명장. 비록 말년이 매우 추하긴 했지만, 최소한 98년 현재 바비 발렌타인은 메츠의 중흥기를 이끌어내고 있는 상승의 명장이었다.
“코리안이로군. 우투좌타에 주루도 괜찮고······. 주로 중견수를 담당했었군. 어깨가 아주 좋아. 내야 쪽은 경험이 없는 건가? 영상을 보니 순발력도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흐음······.”
입으로는 나의 장점을 이야기했지만, 그의 눈빛은 강력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젠장, 역시 감독이 원한 콜업이 아니었군.’
뻔한 이야기였다. 수익을 위한 단장의 독단적인 콜업이었다. 게다가 더욱 곤란한 것은 바비 발렌타인이라는 감독은 그런 것을 쉽게 넘어가는 타입의 감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95년 일본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도 쫒겨난 이유가 단장과의 불화라는 사실은 유명했다.
“일단 잘 알겠네. 당분간은 덕아웃에서 메이저 경기를 지켜보는 거로 하지.”
당분간? 아니었다. 이것은 나를 기용하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통보였다. 실력을 시험조차 해보지 않는 그의 일방적인 통보. 선수의 콜업은 단장의 몫이지만 기용은 감독의 몫이라는 그의 선전포고였다.
“감독님, 잠시.”
내 곁에 서 있던 크리스틴이 발렌타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발렌타인 감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슨 말이 오고 가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감독이 졌구나.’
내 예상대로였다.
“크흠, 그러고보니 오늘 브라이언이 컨디션이 별로라고 했었지? Kang. 중견수로 출장할 준비를 하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메이저 데뷔가 결정됐다. 하지만 어제 셰이 스타디움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벅찬 감동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기분 나쁜 불편함, 그리고 오기였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고.’
5월 2일. 나의 메이저 리그 데뷔전 상대는 콜로라도 로키스, 산에서 내려온 사나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