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5화 (15/210)

# 15화.

첫걸음(1)

주말 낮 경기. 셰이 필드에 사람들이 들어섰다. 물론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88년 이후 무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메츠였던 터라 주말 낮 경기임에도 좌석은 절반 이상이 텅 비어있었다.

[뉴욕 메츠와 콜로라도의 경기. 지난 1차전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메츠가 과연 오늘은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최근 주전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그리 좋지 않은 메츠입니다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오늘 선발투수가 요시이 마사토 선수로군요. 데뷔 이후 3경기, 파죽의 연승을 달리고 있는 요시이 마사토 선수. 오늘 콜로라도와의 경기 역시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관리된 그라운드. 오늘 새벽 관리한 천연잔디가 나를 맞아주었다. 물론 잔디와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저 너머 덕아웃, 오늘 강제로 컨디션이 별로가 된 브라이언의 눈빛은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사나웠다.

‘어쩌라는 거야. 억울하면 단장한테 가서 들이박던지.’

과정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됐건 빅리그의 그라운드였다. 평생 원했지만 얻지 못했던, 그리하여 또 다른 평생을 통해 밟게 된 그라운드. 만끽하지 않는다면 나의 손해일 뿐이었다.

마운드, 일본에서 건너온 요시이 마사토가 몸을 푸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요시이 마사토라면 오늘 여기로 공이 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겠는데?’

올해 고작 20만 달러의 기본급과 약간의 성과급 계약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33살, 한국식으로 하면 무려 35살의 이 노장 투수는 임의탈퇴를 통해 편법으로 메이저에 진출한 노모와 달리 FA자격을 갖추고 정당하게 메이저로 진출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삼진!! 요시이의 포크볼에 랜싱의 배트가 헛돕니다.]

[정말이지 까다로운 공이에요. 치기 직전까지도 떨어진다는 징조가 전혀 없습니다.]

따악!!

[벅스, 쳤습니다. 하지만 유격수 정면으로. 1루에서 아웃!!]

순식간에 두 개의 아웃카운트가 생겨났다. 많은 일본인 투수들이 그러하듯 빅리그에서의 결정구는 포크볼이었다. 메이저에서 구사하는 이가 드문 이 마구는 노모 히데오를 메이저 최정상급의 투수로 만들어주었던 구종이었다. 노모가 데뷔한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제법 많은 타자가 이 공에 적응했지만 그래도 98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포크볼은 삼진, 그리고 땅볼을 양산하는 데 있어서 메이저 최고의 마구였다.

[2아웃 주자 없음. 타석에 래리 워커가 들어옵니다.]

188cm, 86kg의 묵직한 덩치가 타석에 들어왔다. 뒤로 돌아 로진백을 짚어 드는 요시이의 모습에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33살의 베테랑 투수를 긴장하게 하는 존재감. 래리 워커. 작년 내셔널리그 MVP이자 명실상부한 현역 최고의 타자 래리 워커였다.

[어제 경기 홈런을 기록했던 래리 워커 선수. 작년에 이어 올해도 MVP를 노릴만한 페이스입니다.]

볼, 그리고 또 볼. 요시이의 피칭이 신중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담장을 넘어가는 강타자를 상대하는 전형적인 모습. 설사 볼넷으로 출루를 시키더라도 절대 좋은 공은 주지 않겠다는 모습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스윙!! 스트라이크입니다. 요시이 선수의 포크볼에 워커 선수의 배트가 헛돌았습니다.]

[워커 선수 아주 시원한 스윙이었습니다. 비록 헛스윙이긴 했습니다만 타자가 이런 스윙을 보여주면 투수로서는 여러모로 심각한 압박을 받거든요.]

요시이가 또다시 로진백을 더듬었다. 60미터 가까이 떨어진 거리에서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요시이의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러다가 실투라도 나오면······.’

자세를 낮추고 어느 방향으로 공이 날아오건 달려갈 준비를 했다.

뻐엉!!

아슬아슬하게 들어간 공. 하지만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3-1.

‘차라리 볼넷으로 내보내는 게 나을지도.’

그래 봐야 투아웃 주자 1루였다. 50홈런의 포텐셜을 지닌 타자에게 장타를 허용하느니 볼넷을 줘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공을 던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마운드의 요시이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따악!!

그리고 요시이 역시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워커가 포볼로 나갈 생각이 없다는 점이였다. 원바운드 된 포크볼을 워커가 그대로 후려쳤다.

[쳤습니다. 워커 선수, 원바운드 된 공을 워커 선수가 그대로 밀어칩니다.]

공이 떠오르는 순간 나의 몸이 튀어나갔다. 하지만 나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시프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발렌타인 감독의 지휘에 맞춰 나의 위치는 평소보다 왼쪽 후방으로 치우친 상황. 심지어 지금 타구는 평소 위치였다고 해도 잡아낼 수 있다 확신할 수 없는 타구였다.

‘늦어!!’

이성과 감각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낙구 지점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던 나의 몸이 슬쩍 왼쪽으로 틀어졌다. 어차피 그대로 받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원바운드된 공을 잡아 추가 진루를 막는 쪽이 올바른 판단이었다.

[래리 워커, 1루 지나 2루로. 2루에서!!]

글러브에 공이 들어왔다. 이미 공을 잡기 전 내야수들의 위치는 파악해두었다. 아직 회전이 다 죽지 않은 채 글러브에서 꿈틀거리는 공을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왼쪽으로 반 바퀴 거세게 돌아가는 몸. 2루를 향해 달리는 래리 워커가 눈에 들어왔다.

‘늦었나?’

짧은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런 상념과는 무관하게 수천, 수만 번의 연습으로 만들어진 나의 몸은 2루를 향해 강하게 공을 뿌리고 있었다.

뻐엉!!!

잠깐의 정적. 나의 두 눈이 2루심에게 못 박혔다.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워커 2루에서 아웃. 그대로 1회 초 콜로라도의 공격이 종료됩니다.]

[놀라운 수비였습니다. 2루로 달린 래리 워커 선수의 판단은 크게 나쁘지 않았어요. 워커 선수가 발도 굉장히 빠르고 주루 센스도 굉장히 좋은 선수예요. 작년 도루만 33개를 기록한 선수입니다. 게다가 쉬프트를 완벽하게 뚫어내는 공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저 중견수 Kang? 네 Kang의 커버가 매우 훌륭했습니다.]

[Kang이라, 올해 BA 리포트 중견수 부분 6위에 랭크되던 유망주입니다. 수비 쪽으로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던 유망주였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콜업은 조금 이르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오늘 아주 제대로 활약하는군요.]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나의 얼굴이 뜨거웠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일이 현실에서 이뤄지는 순간의 고양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도둑을 연상케 하는 외모의 일본 투수 요시이가 나에게 다가와 손바닥을 내밀었다.

짜악!!

“땡큐,”

일본인 특유의 어설픈 발음의 영어로 감사를 표하는 요시이. 1회 초,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만 해도 나를 고깝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부드러웠다.

“쳇, 운이 좋았군. 애송이.”

단 하나, 오늘 강제로 컨디션이 안 좋아진 브라이언을 제외하고 말이다.

***

화끈한 공격 야구.

93년 창단된 콜로라도 로키스라는 팀의 정체성이었다. 해발 1.6km에 지어진 홈구장은 그런 그들의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시켜주었다. 결과적으로 95년부터 97년까지 3시즌. 콜로라도 로키스는 팀 최다득점 타이틀을 수성했다.

문제는 그 정체성이 안 좋은 쪽으로도 적용됐다는 점이었다. '화끈한 공격 밖에 없는 야구.' 그들은 많은 점수를 얻었지만 그만큼 많은 점수를 내줬다. 창단 이후 5시즌 내내 콜로라도 로키스는 팀 최다실점 타이틀을 아주 여유롭게 유지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프런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투수진만 조금 보강하면 충분히 대권에 도전할 수 있겠는데?’ 그리고 그들은 그 생각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97년 윈터시즌 시장에 나온 투수 최대어를 영입한 것이다.

데릴 카일

97시즌 휴스턴을 포스트 시즌까지 끌고 갔던 리그에이스급 기량을 갖춘 투수. 몸값은 5년 35M. 올 겨울 투수 최대어에 걸맞은 몸값이었다. 물론 쿠어스 필드에서의 성적은 그 비싼 몸값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원정 경기에서 보여주는 성적만으로도 데릴 카일은 연 7mil이라는 돈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삼진!! 거의 타자 눈높이에서 떨어지는 커브였어요.]

[데릴 카일, 어마어마합니다. 2.1이닝 동안 무려 5삼진. 메츠의 타자들이 손을 대지 못합니다.]

이름 높은 메츠의 빅리거들이 카일의 커브에 우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3회 말. 1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덕아웃 난간에 기댄 채 눈이 빠져라 데릴 카일의 커브를 지켜본 소감은 간단했다.

‘오 마이 갓.’

마이너에 있던 시절 리햅을 위해 잠시 마이너로 내려온 투수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또한, 마이너에서 상대했던 투수들이 빅리그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과연 저 정도 수준은 돼야지 빅리거의 자격이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멍청한 생각이었다. 데릴 카일은 그 모든 투수들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3회 말 1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8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지난 1회 초 대단한 수비를 보여줬던 루키 Kang. 지금 타석이 메이저 데뷔 타석인데요, 과연 타석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타석에서 보는 광경은 그라운드에서 보는 광경과 또 달랐다. 수십 대가 넘는 카메라, 2만 명이 넘는 관중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또한, 그라운드에 서 있는 7명의 야수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았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침착하자.’

오랜 시간 몸에 새긴 루틴대로 움직였다. 왼손과 오른손의 배팅 장갑을 동여매고 헬멧을 고쳐 썼다. 가볍게 배트를 두 바퀴 돌린 뒤 마지막으로 옷깃을 정돈했다. 쿵쾅거리던 심장의 고동이 조금은 잠잠해졌다.

타석에 들어서 자세를 잡기 무섭게 시작되는 카일의 와인드업. 근 2미터에 가까운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이 나를 덮쳐왔다. 그의 손끝에서 공이 떠올랐다.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커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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