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6화 (16/210)

# 16화.

첫걸음(2)

모든 공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탑스핀의 움직임. 커브였다.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커브 중 가장 완벽했던 것은 세인트 루시 시절 상대했던 타파니의 공이었다. 지난 8년간 메이저에서 100승을 올린 위대한 투수 타파니. 그는 자신의 공이 커브일지 포심일지 구분할 수 없게 던지는 교묘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카일의 공은 달랐다. 그의 공은 던지는 순간 그것이 커브라는것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특징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커브는 내셔널리그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커브였다.

부웅

“스트라잌!!!”

그의 커브는 말하고 있었다.  ‘커브인 걸 알면 어쩌려고? 안다고 칠 수 있겠어?’ 눈보다 높은 곳에서 무릎까지 뚝 떨어지는 커브볼에 나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당황할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카일의 두 번째 피칭.

‘커브가 아니야.’

바깥쪽으로 붙어 날아드는 낮은 코스의 빠른 공. 구종을 알고있음에도 헛스윙을 유발했던 커브가 아니었다. 기회였다. 물론 치기 쉬운 코스는 아니었다. 제대로 쳐내지 못한다면 내야 땅볼이 되기 딱 좋은 코스. 그러나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간결하고 빠르게 나의 몸이 돌아갔다.

부웅!!

“스트라잌!!”

[2구!! 헛스윙!! 데릴 카일의 슬라이더가 Kang에게 두 번째 스윙을 끌어냅니다. 볼카운트 0-2.]

[Kang 같은 경우 더블A에서 고작 1달밖에 있지 않았어요. 성적은 분명 나쁘지 않습니다만 수준 높은 변화구를 경험해볼 시간은 그만큼 적었을 겁니다.]

압도적인 커브에 신경이 팔려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앞서 수차례 보여주었던 슬라이더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니. 메이저 데뷔 타석의 긴장감과 흥분이 나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볼카운트 0-2. 이제 남은 기회는 단 한 번.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전신을 울리는것 같았다. 이건 아니었다. 이대로 나의 첫 타석을 삼구삼진으로 기록할 수는 없었다.

‘진정하자.’

타석 밖으로 물러나 몸을 가다듬었다. 동 세대 무수히 많은 야구선수 중에서 오직 한 줌의 선수만이 오르는 무대였다. 단순히 이 타석에 서보는 것 자체를 꿈으로 여기는 이들이 널려있는 바로 그런 무대. 긴장하고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상대는 FA 3.500만 달러의 투수였다. 이미 메이저 최정상급의 기량을 갖췄음을 증명한 투수. 그런 이를 상대로 고전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긴장과 흥분에 잡아먹혀 내가 가진 실력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게도, 그리고 나 때문에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에게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제는 틀어져 버린 나의 미래.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상상해온 순간이었다. 2만 명이 넘는 관중들의 시선은 여전히 강렬했고 저 멀리 나만을 지켜보는 야수들의 눈빛 역시 매서웠으며 심장의 고동은 여전히 터질 것처럼 요란했다. 하지만 머릿속 만큼은 그 어느때보다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할 수 있어.’

타석으로 돌아온 나의 시선이 카일에게 못 박혔다. 2미터의 거한. 메이저 최정상급의 투수. 그가 와인드업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배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또 한 번 나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으로 공이 날아들었다. 커브였다. 초구만큼이나 높은 곳으로 날아드는 하지만 얼마나 떨어질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커브. 배트를 돌리는 나의 몸짓이 신중했다.

몸의 1/3 가량이 돌아갔을 때, 나의 눈보다 높은 곳을 유영하던 공의 변화가 시작됐다. 마치 폭포수와 같이 급작스럽게 뚝 떨어지는 공이었다. 하지만 그 낙폭은 초구보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덜했다.

‘높아!!’

볼카운트는 0-2. 마지막 공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아슬아슬한 높은 코스.

‘이대로 몸을 틀어 배트를 가져다 댈 수 있을까?’

‘설사 배트를 가져다 댄다고 해도 안타로 만들 수는 있을까?’

‘만약 그대로 보낸다면 볼 판정이 나올까?’

경우의 수는 많았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나의 선택은 즉각적이었다. 전신의 근육이 화끈했다. 쥐어 짜인 관절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두 손에 찌르르 둔탁한 감각이 전해졌다.

따악!!

팔로 스윙까지 끝낸 전신의 근육이 욱신욱신했다. 자세 역시 기우뚱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어찌어찌 가져다 대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결코 좋은 타구는 아니었다.

[스윙!! 쳤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1루 베이스까지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공을 친 직후 1루까지 3.54초.

개인적으로 측정해본 나의 최고 기록이었다. 물론 지금 그런 기록을 바랄 수는 없었다. 무너진 자세를 수습하고 움직이는 데만 최소 0.1초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땅볼 타구, 3루에 비니 카스티야가 뛰어나옵니다.]

[카스티야 그대로 1루로!!]

정면, 1루수가 미트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이다. 아직 공은 도착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리!!

뻐엉!!

“세입!!”

[세이프입입니다. Kang, 내야안타. 내야안타입니다.]

[와우, 저 선수 수비를 보면서도 느꼈습니다만, 굉장히 빠르네요. 방금 카스티야 선수의 수비도 딱히 나무랄 곳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냥 보기에도 확실히 공보다 빠르게 들어왔어요.]

[물론 좌타자라서 이득 본 부분도 크긴 합니다만, 그걸 고려해도 정말 굉장히 빨랐습니다. 마치 79년 아직 여물지 못했던 헨더슨을 보는듯한 기분이로군요.]

[하하, 리키 헨더슨이라니. 사심이 너무 들어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메츠로썬 Kang이 헨더슨의 절반이라도 성장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 같군요.]

[하하, 헨더슨의 절반이라니.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만한 선수로군요.]

젖먹던 힘까지 다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뼛속까지 저리게 깨달았다.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1루에 서서 암 가드와 풋 가드를 벗는 사이 1루 코치가 나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겼다.

“잘했어. 루키.”

“감사합니다.”

아직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5월 뉴욕의 날씨였지만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전신이 땀으로 흥건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세 걸음 반. 평소와 다르지 않은 리드폭이었다. 후속 타자는 9번 요시이.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안타를 칠 확률보단 내가 도루에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아 보였다. 더욱이 다시 1번부터 시작되는 타순을 생각한다면 장타가 나올 확률은 낮았다. 지금은 내가 어떻게든 스코어링 포지션에 가 있는 것이 좋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덕아웃으로부터 도루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운드에 선 카일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타석에 섰을 때 그토록 부담스럽던 그 시선이 1루에서는 그저 여느 투수의 그것과 다름없게 느껴졌다. 무게 중심이 살짝 오른쪽 앞다리에 쏠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뻐엉!!

“세입!!”

누런 흙이 축축한 유니폼에 얼룩을 만들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데릴 카일은 강속구 투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에게 세 걸음 반이라면 어지간해선 슬라이딩이 필요 없는 수준의 리드폭이었다. 절대적으로 안심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리인 것이다.

‘카일의 공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위험했어.’

도루는 단순히 빠르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포수의 송구보다 빠르게 2루에 도착하는 것은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투수와의 타이밍 싸움이었다. 그리고 방금 나는 데일과의 타이밍 싸움에서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당했다.

사이영을 다투는 메이저 탑 레벨의 투수란 모두 이런 괴물인 것일까? 마음 한구석, 주루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교만함이 사그라들었다.

세 걸음 반.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무게 중심. 힐끔 나를 노려본 카일의 시선은 여전히 예리했다. 짧은 키킹의 슬라이드 스텝. 그리고 속구.

부웅

“스트라잌!!”

요시이의 스윙은 평범했다. 그리고 빅리그에서 평범한 투수의 타격 솜씨란 쉬어가는 타석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부웅

“스트라잌!!”

2구 연속 스트라이크. 심지어 변화구조차 섞이지 않은 포심 일변도의 피칭이었다. 볼카운트 0-2. 그리고 그 순간 덕아웃에서 기대하던 싸인이 날아왔다.

‘Go.’

세 걸음 반. 카일의 시선은 여전히 매서웠다. 그리고 그런 카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덤덤했다.

‘조금만 더,’

그의 슬라이드 스텝은 간결했으며 나를 바라보는 감각은 예리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웅크려야 했다. 스치듯 지나간 그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투구인가, 견제인가. 양자택일의 순간. 나의 감각이 소리쳤다. 바로 지금이라고.

[데릴 카일 3구!! 주자 달립니다!! 2루!!]

카일의 시선이 나를 스쳐 지나간 후, 그의 손에서 공이 떠나가기 직전,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리고 공을 칠 의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요시이의 힘찬 스윙이 잠시 포수를 방해했다.

[2루에서 세입입니다.]

[여유로운 도루 성공. Kang이 데뷔전 데뷔 타석 안타에 이어 도루를 기록합니다.]

3회 말 2아웃 2루. 스코어는 0:0. 그리고 1번 타자.

작전에 적극적인 발렌타인 감독이었던 만큼 대타 기용을 기대해볼만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경기 초반이라는 것일까? 감독은 움직이지 않았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루이스 로페즈. 내야 백업 요원으로 메이저의 여러 팀들을 오가는 타자였다. 통산 성적은 0.239/0.291/0.326. 그리고 그는 그 성적에 걸맞은 타격을 보여주었다.

따악!!

투수 정면으로 흐르는 내야 땅볼. 3회 말 우리의 공격이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얻어낸 마지막 공격 찬스였다. 이후 6이닝. 데릴 카일은 더 이상의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

-‘강진호 그는 어떻게 빅리거가 되었는가.’-

95년 고교를 갓 졸업한 홍안의 청년이 태평양을 건넜다. 94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역이었던 강진호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지난 93년 박찬화 선수가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두 번째 미국 진출이었다.

진출 직후 곧바로 메이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던 박찬화 선수와 달리 강진호는 마이너 리그의 가장 밑단 루키리그부터 차근차근 수행을 밟아왔다. 햇수로 4년. 루키리그에서 싱글 A를 걸쳐 더블 A까지 올라온 강진호는 지난 4월 말 부상을 입은 웨인 커비 선수를 대신해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다.

구단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성장한 강진호는 데뷔전에서 놀라운 활약을 선보이며 3타수 1안타 1도루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이날 경기 팀의 유일한 안타이자 유일한 출루였다.

일부 해설자들은 강진호의 활약을 메이저 리그의 유명선수 리키 헨더슨에 비유했다.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 강진호의 미래가 기대되는 바이다.

“이게 뭐야.”

어머니에게서 날아온 십수 장의 팩스에는 각양각색의 한국 스포츠 일간지 기사들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불과 하룻밤.

나는 아주 유명해져 있었다.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스포츠 신문을 사 읽는 사람들이라면 내 얼굴을 모를 수 없을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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