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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7화 (17/210)

# 17화.

닭인가, 꿩인가(1)

뉴욕에 집을 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매달 들어가는 렌트비용은 상상을 초월하게 비쌌지만 그래도 충분히 부담할만한 금액이었다. 올해 메이저 최저연봉은 10만 5천달러. 뉴욕의 높은 물가를 고려한다고 해도 쓸데없는데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충분한 금액이었다.

“No.”

“하지만 불편할 텐데요.”

“전혀요. 전 오히려 이게 더 편합니다.”

게다가 상당한 지출을 각오하고 있던 가리비아의 주거비 역시 나와 룸쉐어를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됐다. 불편하지 않겠냐는 나의 걱정에 그는 오히려 어차피 숙소에서 나와서 생활한다면 함께 사는 것이 나의 자잘한 부분까지 다 케어할 수 있는 길이라며 의욕을 불태웠다.

“어차피 이쪽 길로 나가기로 한 이상 저의 첫 경력은 진호씨입니다. 최대한 좋은 결과를 만들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뭐, 저야 좋지요.”

그렇게 시작된 가리비아와의 생활은 마치 학창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을 연상케 했다. 그는 운동뿐 아니라 나의 삼시 세끼와 간식들을 포함한 생활 자체를 끊임없이 케어해주었다.

“사실, 더블 A에서 거의 풀타임 출전 할 것을 예상하고 몸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차라리 몸을 만들기엔 오히려 더 좋은 조건입니다. 적절한 휴식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깐요. 이대로라면 예상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메츠에서의 생활 역시 나쁘지 않았다. 초반 나를 탐탁치않게 바라보던 동료들, 그리고 감독의 시선은 데뷔전 나의 수비와 도루 이후 제법 따뜻하게 바뀌었다. 물론 출전기회 역시 우려하던 것보다는 많이 주어졌다. 노쇠화로 많은 휴식이 필요한 외야진들과 타격 못지않게 수비를 중요시하는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철학 덕분이었다.

‘오늘은 좌익수로군.’

[5회 초, 1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Kang이 들어옵니다.]

[부상으로 DL에 올라간 웨인 커비 선수를 대신해서 이번 달에 빅리그로 콜업 된 선수죠? 최근 부쩍 기용이 잦은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성향과 맞아 떨어지는 게 이유가 아닌가 싶네요.]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젠장, 또 시프트를.’

오늘 상대하는 팀은 1883년 창단되어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 대부분을 하위권에서 전전했던, 조만간 프로 스포츠 역사상 세계최초로 10,000패의 기록을 수립할 구단.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이번 필리스와의 3연전. 1차전에 이어 오늘 3차전까지 두 번째 선발 출전하는 Kang입니다만 타석에서 성적은 그리 좋지가 않네요.]

[1차전 포함해서 직전까지 총 다섯 타석 안타 없이 병살만 하나 있습니다.]

데뷔 직후 몇 경기 제법 좋은 타격성적을 거둔 것도 잠시. 나에 대한 분석이 이뤄진 직후 이어진 경기들은 이전보다 몇 배는 힘들었다. 막대한 자본이 움직이는 빅리그는 이제 막 메이저에 올라온 백업선수에 대한 분석조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웅

좌투수인 멧 비치의 슬라이더에 나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10,000패 구단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평범한 4선발 투수 멧 비치였지만, 그 평범한 투수조차도 마이너에서 거르고 걸러진 메이저 리거였다. 80마일 중반대의 슬라이더가 존을 넘나들었다.

[멧 비치의 84마일 슬라이더에 Kang의 배트가 헛돌았습니다.]

[낮은 코스로 절묘하게 들어온 공이었어요. 멧 비치 선수 오늘 슬라이더가 참 좋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2구. 몸쪽 낮은 코스로 딱 붙어 들어오는 빠른 공. 속구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앞선 타석에서도 나는 이 속구에 내야 땅볼로 물러났었다. 멧 비치의 포심은 흔히 말하는 매우 더러운 볼 끝을 가지고 있었다. 2000년대 메이저를 넘어 아시아 리그에까지 유행이 번진 무빙 패스트볼이었다.

티익

정확하게 휘두른 배트가 볼 끝을 스쳤다. 파울이었다. 삽시간에 볼카운트는 0-2. 이번 타석까지 소득 없이 물러난다면 그래도 2할 5푼은 수성하던 타율은 2할 4푼대로 주저앉게 된다. 물론 2할 4푼만 되더라도 현재 메츠의 외야수 중에서는 2번째로 좋은 타율이었지만 아무래도 장타 툴에서 부족한 만큼 타율이라도 어필하지 않는다면 출전기회는 줄어들 것이 뻔했다.

‘집중하자.’

멧 비치의 와인드업이 시작됐다. 특별한 디셉션 없는 정직한 투구폼이었다. 정 중앙을 향해 날아드는 빠른 공. 속아 넘어가기도 힘든 뻔한 유혹이었다.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홈플레이트로 들어오기 전 크게 휘어진 슬라이더에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Kang. 침착하게 볼을 골라냅니다.]

[2스트라이크 상황. 젊은 선수가 참을성이 상당하군요.]

4번째. 누런 공이 멧 비치의 손을 출발했다.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따악

‘또!!’

손끝에 울리는 찌르르한 감각. 마지막 순간 꿈틀거린 비치의 포심이 스윗스팟을 비껴갔다. 높게 떠오른 야구공. 파울 지역을 넘어 3루 내야 관중석을 향하는 공. 파울이었다. 잠시 타석에서 나와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때

[어, 어. 스콧 로렌 달립니다!!]

작년 신인왕을 수상한 3루수. 만년 꼴찌팀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강제로 승리를 떠먹이고 있는 스콧 로렌이 3루 파울 지역을 넘어 펜스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콧 로렌 뛰었습니다!!]

“허······.”

펜스를 짚고 뛰어오른 스콧 로렌의 글러브가 나의 파울볼을 잡아냈다. 나에게 안타를 도둑맞았던 타자들의 심정이 약간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

“단장님, 오클랜드 쪽 연락입니다.”

“오클랜드? 연결해봐.”

스티브 필립스는 최근 연전연패하는 메츠의 성적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97년 단장에 부임한 이후 8개월. 구단의 자금 사정은 분명 호전되고 있었지만, 아무리 재정적으로 건전해진다고 해도 성적이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는 것은 곤란했다.

그런 그에게 오클랜드에서 걸려온 전화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올해 새로 단장에 취임한 오클랜드의 괴짜 녀석은 유명했다. 팀의 쓸만한 선수를 내다 팔고 하자투성이의 선수들을 끌어모으는 얼간이. 잘하면 지금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오, 빈 단장, 오래간만이로군. 단장에 취임한 이후로는 처음이지?”

“하하, 단장 일이 워낙 바쁘다 보니 개인적인 연락을 할 시간이 있었어야죠. 지금도 단장 일 때문에 전화 드린 겁니다.”

빌리 빈.

머니볼의 완성자이자 메이저리그 최고의 사기꾼이 메츠를 향해 손을 벌렸다.

***

수화기를 내려놓은 빌리 빈에게 오클랜드의 부단장 디오네스타가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뭐 일단 생각해보겠다네. 그런데 우리 자금 사정 안 좋은 거야 사실이고, 그쪽 성향이 성향이니깐 예상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겠지?”

“제발 걸려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리고 같은 시각, 스티브 필립스 역시 빌리 빈의 제안에 고심했다.

“Kang에다가 제프 괴츠를 리키 헨더슨과 바꾼다라······.”

리키 헨더슨. 거대한 이름이었다. 스텐 뮤지얼, 루 게릭. 역사상 최고의 리드오프를 다퉜던 수많은 거인들 사이에서도 홀로 우뚝 선 역사의 지배자. 그런 그의 이름에 비하자면 BA 리포트 41위와 60위의 유망주라고는 하지만 현재 팀의 4번째 외야수나 싱글A의 투수 하나와 비교한다는 것은 감히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하지만······.”

리키 헨더슨의 나이는 39살. 진작에 은퇴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늙을 대로 늙은 타자의 1년과 유망주 둘을 교환하는 것은 분명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39살의 나이에도 4할의 출루율을 유지하며 아메리칸리그 최다 도루와 최다 볼넷 페이스를 유지하는 괴물 중의 괴물. 지금 메츠의 외야수 중 리키 헨더슨보다 괜찮은 성적을 기록 중인 외야수는 없었다. 반쯤 망해버린 오클랜드의 자금 사정이 아니라면 절대 내놓지 않았을 매물이라는 빌리 빈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돌았다.

필립스의 고민이 깊어갔다.

*         *          *

뉴욕, 플러싱거리에 위치한 아파트.

“좋은 징조입니다.”

“네? 2경기 출전해서 7타수 무안타였는데 좋은 징조라뇨. 지금 놀리는 겁니까?”

가리비아를 향해 튀어나가는 말이 까칠하다. 최악의 원정이었다. 원정 직전 0.270을 유지하던 타율은 0.227까지 떨어졌다. 원정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하락세를 막고 다시 3할까지 타율을 올려보겠다던 야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좋은 말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었다.

“아, 그건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운이 없으시더군요.”

“운이요? 젠장. 그럴 리가요. 이미 철저하게 저를 분석했습니다. 들어오는 공이며 수비 위치까지 모두요.”

“그거야 당연히 예상했던 일이잖습니까. 빅리그에서 그렇게 눈에 띄게 활약했는데 분석이 안 들어 온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죠.”

그의 말처럼 분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분석됐다고 해서 이 정도로 철저하게 틀어막히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솔직히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타석의 그건 충분히 괜찮은 타구였어요. 필리스의 그 유격수, 데시 리레포드? 그 친구가 그걸 잡은 건 실력 이전에 운이 정말 좋았던 겁니다.”

“그런가요.”

“게다가 지금 진호 씨에게 더 중요한 건 타구가 잡혔느냐, 안 잡혔느냐, 안타가 됐느냐 안됐느냐보다 타구의 질이 어땠느냐의 문제니깐요.”

“하지만 어차피 다 내야 땅볼이었잖아요.”

“내야 땅볼이라도 다 같은 내야 땅볼이 아니죠. 자 한번 보세요.”

가리비아가 나에게 보여준 자료들은 놀라웠다. 그것은 여러 각도에서 찍힌 나의 타격장면들, 그리고 타구들이었다. 21세기야 인터넷을 떠도는 풍부한 영상자료들과 그런 자료들을 개인이 쉽게 편집할 수 있는 각종 툴들이 존재했다지만 현재로썬 기본이 되는 영상 자체를 구하는 것조차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아, 그때 이 집을 소개해주신 단장 비서분, 그러니깐 크리스틴 씨였나요? 그 분께 부탁했더니 진호씨에 관한 자료를 생각보다 쉽게 내어주더라고요. 그리고 편집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깐요. 필름 시대였다면 집에서 이렇게 하기 어려웠겠습니다만 요샌 컴퓨터가 워낙 잘돼있어서요.”

이번에 새로 구매한 586 컴퓨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가리비아. 아직 타구를 분석하는 카메라는커녕 투구추적시스템조차 제대로 구비되어있지 않은 98년. 그는 나의 타구를 프레임 단위로 쪼개어 그 속도를 계산하는 꼼꼼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분석에 의하면 나의 타구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뭐, 단순히 근력이 좋아진 것도 있겠습니다만, 저쪽 친구들이 진호 씨를 분석하는 만큼 진호씨도 메이저 투수들의 수준 높은 공에 적응하고 있다는 의미겠죠. 특히 관심 깊게 봐야할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아마 이쪽으로 더 집중한다면 지금 당장의 답답한 상황도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요?”

객관적인 자료를 앞세운 가리비아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최근, 시즌 초반 제법 잘 나가던 팀의 성적이 연패로 얼룩졌다. 6할에 이르던 승률은 5할 초반까지 무너졌고 이대로라면 5할의 승률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스티브가 움직였다. 그것은 짠돌이처럼 돈, 돈, 돈 거리던 그의 지난 행적을 생각해본다면 믿기 힘든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뉴욕 메츠와 플로리다 말린스. 제프 괴츠+에드 야널+렉스 에스코바, 마이크 피아자. 전격 트레이드-

팀 내 3위 5위 6위 유망주를 묶은 패키지와 올스타급 레전드 포수의 트레이드. 심지어 그 올스타급 레전드 포수의 컨트롤 기간은 이번 시즌으로 끝이었다.

“이거 우리 단장님이 아주 제대로 마음을 먹으셨는데.”

“그러게 말이야. 정말 제대로 달려볼 생각인가 보네.”

메츠 팬들의 반응은 대체로 아주 호의적이었다. 물론 BA 리포트 60위 96위 그리고 외야수 부문 14위의 유망주를 세트로 내주는 것은 팀의 기둥을 그대로 파내는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받아오는 것이 무려 마이크 피아자였다. 이반 로드리게스와 함께 현역 최고의 포수로 손꼽히는 그의 가치는 저 유망주 세 명이 자신의 실링을 최대한 채운다고 해도 감히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금을 축적해둔 것이 아니었다면 메이저에서도 중간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메츠로써도 도저히 데리고 올 수 없을 거물급 선수인 것이다.

경기 직전 들려온 희소식에 선수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것은 전생의 경험을 통해 이즈음 마이크 피아자가 팀에 합류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시작이야.’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의 패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였다. 아니, 그것은 내셔널리그 전체를 통튼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메츠는 무려 2000년까지 3년간 그런 애틀랜타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피아자의 영입이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2000년까지도 메츠의 외야진은 그리 튼튼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내가 메이저 평균수준까지만 성장한다면 난 컨텐더팀의 주전외야수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나의 활약에 따라서는 그 애틀랜타를 이기고 디비전 우승까지도 넘볼 수 있었다. 미래를 기대하는 나의 머릿속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때

“어, 우리 팀 트레이드 링크가 또 떴는데?”

“어디? 어딘데? 누구고?”

“그게 그러니깐 오클랜드라는데?”

!?

‘오클랜드? 이 시기에 오클랜드라고? 설마 그럴 리가.’

모두가 돌도끼를 들고 우가우가를 하는 시절, 홀로 세이버메트릭스라는 신문물로 단장들을 학살했던 빌리 빈의 오클랜드. 하지만 분명 1998년의 메츠는 오클랜드와 트레이드를 경험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의 발생에 핑크빛으로 물들었던 나의 환상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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