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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9화 (19/210)

# 19화.

Man of steal(1)

보스턴과의 경기가 끝났다. 마르티네즈가 내려간 이후 우리는 제법 분전했다. 그리고 그 분전 속 나의 활약은 대단했다. 2타수 2안타 2득점.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무언가 한 꺼풀 벗어넘긴 느낌이랄까? 종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타격이었지만 분명 달랐다.

따악!!

[브라이언 맥레이!! 쳤습니다. 우중간 높은 타구.]

[아, 우익수 정면. 데런 르위스가 무난하게 공을 잡아냅니다. 경기 종료.]

7:0으로 벌어졌던 점수 차는 7:5까지 좁혀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9회 초 2아웃 주자 3루의 상황. 맥레이의 타구가 우익수 정면으로 향했고 그렇게 경기는 종료됐다. 아직 식지 않은 몸. 해소되지 않은 열기로 이글거리는 몸뚱이를 샤워실의 시원한 물로 씻어내렸다.

“강진호 선수. 오늘 참 훌륭했습니다.”

“아, 박 기자님.”

스포츠 오늘의 박항식 기자였다. 콜업 초반 잠깐 성적이 반짝했던 시기 바글바글하게 모여들었던 기자들은 나의 성적 부진이 이어지는 사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하지만 저 박항식 기자만큼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다.

“흐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진호 씨한테서는 대박의 냄새가 난다고 했잖아요.”

“이제 겨우 2안타 쳤는데 대박이라뇨.”

“모든 위대한 업적은 첫걸음을 떼는 게 가장 힘든 법이죠. 어쨌든 오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잠깐 인터뷰 괜찮으시죠?”

오래간만의 안타, 그것도 심지어 멀티히트였다. 인터뷰를 거부할 이유 따윈 없었다.

“오늘 7회 초에 대타로 출전해서 멀티안타를 기록하셨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기왕이면 이기는 경기에서 쳤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입니다.”

“특별하게 노리던 공을 치신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배트에 충분한 힘이 끝까지 실린 게 유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번에 새로 트레이드로 온 선수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팀의 승리를 위한 전력보강인 만큼 매우 기쁘게······. 잠깐만, 박 기자님. 선수들이라뇨? 저희 피아자 선수 말고 혹시 또 누가 오는 건가요?”

“아, 경기 중이라서 소식이 전달이 안 됐나 보네요. 오클랜드의 리키 헨더슨 선수와 마이너의 페레즈. 로버츠, 콜 선수의 3:1 트레이드가 이뤄졌습니다.”

리키 헨더슨? 뜻밖의 소식이 나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그럴 리가. 오클랜드와의 링크가 진짜였단 말이야?’

리키 헨더슨이라니. 물론 리키 헨더슨이 메츠로 오게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금이 아니었다.

‘분명 리키 헨더슨이 메츠로 오는 건 내년인데. 역시 내가 부상을 입지 않고 빅리그에 콜업 된 영향인 걸까?’

물론 소식 자체만 보면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현재 팀의 외야 중에서 39살의 리키 헨더슨보다 타격 성적이 좋은 이는 없었다. 분명 그의 합류는 팀의 성적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 현재가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강진호 선수?”

“아, 네. 전혀 몰랐던 내용이라서요. 리키 헨더슨이라니.”

게다가 팀의 성적과 별개로 외야수가 한명 더 충원된다는 말은 나 개인에게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출전 기회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당장 25인 로스터에서 튕겨 나가는 것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부진한 동안 버나드도 거하게 삽질을 해줬다는 것 정도인가?’

현재 팀의 주전 좌익수인 버나드의 슬래시라인은 0.211/0.302/0.314로 매우 부진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리키 헨더슨의 주포지션은 좌익수였다. 물론 전성기 시절 양키스에서 2년 정도 주전 중견수를 담당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39살의 노장에게 다시 중견수를 맡긴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오늘 경기를 치렀던 선수에 대한 배려였는지 박항식 기자의 라커룸 인터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각오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더 열심히 노력 해서 좋은 소식만 들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보스턴과의 2차전, 선발 명단에 나의 이름이 보였다.

‘역시.’

평소였다면 어제의 멀티안타가 만들어낸 결과라 생각하며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을 소식이었다. 하지만 나와 나란히 명단에 이름을 올린 버나드를 보고 있자니 그 의도가 너무 뻔한지라 단순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서바이벌이라는 의미인가?’

나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주전 좌익수, 그리고 팀의 4번째 외야수였다. 경쟁은커녕 그대로 나를 내려보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 어제 경기 멀티안타가 유효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여어, 루키 잘해보라고.”

이 경기 선발출전의 의미가 서바이벌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주전 중견수인 브라이언이 나에게 응원의 말을 건넸다. 밥맛이었다. 어떻게 저 녀석은 입을 열기만 해도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저것도 능력은 능력임이 틀림없었다.

오늘 보스턴의 선발투수는 팀 웨이크필드.

필 니크로의 뒤를 잇는 메이저리그 유일의 너클볼 투수였다. 지난 3년간 42승 36패. ERA 4.14. 그리고 608.1이닝 리그 에이스급 투수라 말하긴 부족했지만,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해주는 투수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성적이었다.

‘너클볼이라.’

희소한 구종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오히려 더 유명해진 구종 너클볼. 알아도 치지 못하는 변화구라 악명 높았지만, 4.14라는 팀 웨이크필드의 평균자책점이 말해주듯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칠 수 있어.’

학창시절, 그리고 프로입문 이후 실제 경기에서 너클볼을 사용하는 투수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연습 도중 종종 반쯤은 장난처럼 너클볼을 던지는 동료들은 제법 존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그런 동료들을 영혼까지 탈곡시켜 주었다.

타격 직전 미묘한 움직임으로 정타를 피해 가는 너클볼. 내야 땅볼, 혹은 내야 팝플라이등의 범타를 유도하는 구종이었지만 나의 빠른 발은 그런 내야 땅볼을 안타로 둔갑시키곤 했다.

오늘 나의 타순은 1번.

일반적인 포수의 미트와 궤를 달리하는 거대한 소프트볼용 1루 미트가 눈에 띄었다.

[보스턴과 메츠의 2차전 경기. 타석에 Kang이 들어왔습니다.]

[어제 7회 초 대타로 출전해 2타석 2안타를 기록했던 Kang입니다. 과연 어제의 좋은 컨디션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마운드의 투수는 팀 웨이크필드. 필 니크로의 맥을 잇는 메이저리그 유일의 너클볼러입니다.]

마운드의 투수가 글러브에 손을 모았다.

‘온다.’

다른 투수들과 사뭇 다른 움직임이었다. 마운드에 선 투수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동네 공원에 캐치볼하러 나온 아저씨를 닮은 움직임. 팀 웨이크필드의 손끝에서 공이 출발했다.

두둥실 날아오는 공. 지금 나를 향해 날아드는 팀 웨이크필드의 공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프로의 공이라 믿기 힘든 구속. 시속 110km/h 남짓밖에 되지 않는 공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배팅볼보다 느린 속도의 공을 향해 나의 배트가 움직였다.

그런데

부웅

“스트라잌!!”

[초구 너클볼. 스트라이크!!]

안쪽으로 움직이던 공이 마치 배트를 피해가듯 밖으로 휙 꺽여들어갔다.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가슴 속 충만하던 자신감이 일시간에 사라지는 느낌. 이것은 팀 동료들이 연습 중에 보여주었던 너클볼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게 진짜 너클볼?’

단박에 너클볼이라는 구종이 어째서 이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클볼이라 생각해왔던 공들은 그저 조금 흔들리는 배팅볼에 불과했노라고.

[팀 웨이크필드 선수.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지난 3년간 팀 웨이크필드 선수의 기록을 보면 참 재밌습니다. 평균자책점이 4.14로 보스턴의 2선발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해 보이는 성적입니다만, 경기 별로 성적이 괜찮은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을 반으로 뚝 잘라보면 괜찮은 쪽의 성적은 1.87 그렇지 않은 쪽의 성적은 6.41이에요.]

[너클볼러의 경우 아무래도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으니깐요. 메츠에게는 불행하게도 오늘은 1.87쪽에 더 가까운 것 같군요.]

또다시 동네 마실 나온 아저씨가 강아지에게 공을 던져주는 것처럼 성의 없어 보이는 웨이크필드의 피칭폼이 시작됐다. 구종은 뻔했다.

너클볼

밖으로 빠질 듯 움직이던 공이 다시 몸쪽으로 휘어들어 왔다. 70마일이 채 되지 않는 느린 공. 나의 배트가 그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바깥쪽?’

몸쪽으로 향하는 것 같던 공이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잠깐의 망설임. 공을 향해 움직이던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2구, 또 다시 너클볼!! 살짝 빠지는 공을 Kang이 잘 참아냅니다.]

[쉽지 않은 공이었을 텐데,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볼 카운트 1-1]

3구째. 이번에도 역시 특유의 여유로운 피칭폼이 시작됐다.

‘마지막까지 공을 보고 치는 거야.’

어차피 70마일밖에 나오지 않는 공이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공을 지켜보고 휘두른다면 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따악!!

긴 기다림. 벼락같이 돌아간 배트가 너클볼을 강타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미묘하게 틀어진 공이 배트의 중심을 벗어났다. 우측 내야 깊숙한 곳에 떨어지는 타구. 파울이었다.

볼카운트 1-2

‘침착하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쳐내는 거야.’

비록 코스는 제멋대로였지만 타이밍 만큼은 완벽하게 몸에 익었다. 침착하게 걷어낸다면 충분히 안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운드의 팀 웨이크필드의 투구폼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이제는 조금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투구폼. 배트를 움켜쥔 손에 힘이 실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