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Man of steal(2)
‘자, 하나 두우......!!’
전혀 다르지 않은 피칭폼이었다. 큼지막한 와인드업도 격렬한 키킹도 없는 왼발을 5cm 슬쩍 들었다 내려놓는 편안한 피칭폼.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따악!!
기습적으로 날아든 몸쪽 높은 패스트볼. 70마일이 채 되지 못하는 너클볼을 기다리던 나의 허를 찌르는 속구였다.
[팀 웨이크필드, 4구, 기습적인 몸쪽 높은 패스트볼!!]
[Kang, 쳤습니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배트가 공을 건드렸다. 하지만 좋지 않았다. 2루수 정면으로 향하는 타구.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지만 닿지 않았다.
“아웃!!”
[1루에서!! 아웃입니다. 기습적인 속구에 Kang의 배트가 늦었습니다. 내야 땅볼 아웃.]
[너클볼을 기다리던 타자 입장에서 방금 그 속구는 100마일 이상의 느낌이었을 거에요. 팀 웨이크필드 아주 영리한 피칭이었습니다.]
짜증이 치밀었다. 그것은 상대방 투수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한 나 자신에 대한 짜증이었다. 차라리 너클볼에 당했다면, 그것은 너클볼에 관한 공부가 부족했던 탓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멍청했어.’
너클볼 투수로 이름 높은 팀 웨이크필드였지만 완벽하게 제구된 패스트 볼 역시 그의 무기 중 하나였다. 상대방의 패스트 볼을 염두에 둬야 했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나의 눈이 마운드에 못 박혔다. 하지만 팀 웨이크필드는 나에게 자신의 공을 지켜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2구 내야 땅볼.
초구 내야 팝플라이.
벤치에 엉덩이를 댈 시간도 없이 우리의 공격이 끝났다. 오늘 우리의 선발 투수는 바비 존스. 매년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과 200이닝을 기대 가능한 제법 괜찮은 투수였다. 특히 작년 같은 경우 전반기 2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최초 올스타로 선정됐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삼진. 바비 존스, 훌륭합니다. 지난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4이닝 6실점으로 부진했습니다만 오늘은 칼을 갈고 나왔다는 느낌이군요.]
[팀 웨이크필드도 그렇고, 오늘 양 팀 모두 선발투수의 몸 상태가 매우 좋아 보입니다. 투수전이 될 확률이 높은 것 같아요.]
2회, 선두타자로 나섰던 마이크 피아자가 공 네 개 만에 루킹삼진으로 물러났다. 지금까지 커리어 통산 421 삼진. 경기당 평균 0.5개도 채 되지 않는 삼진을 기록한 슈퍼스타의 루킹 삼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에 대한 단단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덕아웃으로 돌아온 그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지루한 투수전이 3회 말까지 이어졌다. 0의 행진. 얼핏 보기에 팽팽한 접전 같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유리한 것은 웨이크필드 쪽이었다. 3회가 끝난 시점에서 그가 던진 공은 29개에 불과했다. 반면 바비 존스의 투구 수는 47개.
“자자, 힘내자고. 바비가 저렇게 잘 막아주는데 우리가 뭐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어?”
수비를 끝내고 돌아온 덕아웃. 팀에 들어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심지어 첫 타석에서 루킹삼진으로 물러난 마이크가 크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이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는 이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29살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뛰어난 기록을 쌓아온 슈퍼스타의 목소리에는 무게감이 실려있었다.
4회 초. 마운드의 투수에게서 지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안 그래도 그렇게 널널하게 던지는 투수가 공도 몇 개 안 던졌는데 지치는 게 이상하지.’
1회와 다를 바 없는 자세. 그리고 다를 바 없는 너클볼. 덕아웃에서 눈이 빠지도록 지켜본 그 공이 날아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나의 배트가 움직였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중심은 슬쩍 비켜 나갔다.
따악!!
살짝 빗맞은 타구가 3루 파울라인 근처를 강하게 두들겼다. 파울이었다.
‘괜찮아.’
아주 약간의 차이였다. 그리고 타이밍 역시 나쁘지 않았다. 또다시 너클볼이 들어온다면 반드시 쳐내겠다는 각오가 담긴 눈빛으로 투수를 노려보았다. 마운드의 투수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위축된 기색 따윈 전혀 보이지 않는 편안한 표정.
‘속구일지도.’
볼카운트 0-1. 첫 타석의 경험은 잊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속구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되뇌었다. 하지만 나의 직감은 지금 들어올 공은 너클볼이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경험상 이럴 때는 보통 직감을 따르는 쪽이 더 좋았다.
따악!!
손끝의 감각이 얼얼했다. 파울라인 근처에서 빠르게 튕겨 날아가는 타구. 페어볼이었다.
[쳤습니다!! 빠른 타구. 3루에 발렌타인 몸을 낮춰봅니다만 빠졌습니다.]
[그 사이 Kang 여유롭게 1루로. 안타. 안타입니다.]
[4회 초 메츠의 선두타자 Kang이 오늘 경기 첫 안타를 기록합니다.]
암 가드, 풋 가드를 벗어 던진 몸이 한결 가벼웠다. 출루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네 걸음.
팀 웨이크필드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경기 시작 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은 나에게 이번 경기에 한정된 그린 라이트를 허락해주었다. 평소 세세한 부분까지 작전을 걸어대는 그답지 않은 관대함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관대함을 성적으로 답해줄 생각이었다.
4걸음.
나의 몸이 2루 쪽으로 기울었다.
1998년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루 성공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포수의 어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도루를 허용함에 있어서 포수의 기량이 중요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 비중은 20~30%도 채 되지 않았다. 실제 그보다 중요한 것은 투수의 투구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팀 웨이크필드의 투구 동작은 100점 만점에 80~90점은 줘도 될 만큼 훌륭했다. 성의 없이 던지는 것 같은 그의 투구 동작은 무척이나 간결했다.
하지만
뻐엉!!
[1루 주자 2루까지. 2루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70마일 남짓한 구속, 그리고 너클볼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투수의 투구 동작이 어떻건 간에 도루 성공은 필연적이다. 던지는 투수 본인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클볼. 그것은 공을 받는 포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구 뒤의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루를 막기 위해 너클볼이 아닌 다른 공을 던질 확률은 적었다. 그것은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불태우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너클볼러에게서 너클볼이 빠진다는 것은 평범 미만의 배팅볼 투수가 된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무사 2루. 볼카운트 0-1
3걸음 반.
‘달릴까?’
2루까지 도착한 것만으로도 병살의 위험에서는 벗어난 셈이었다. 동시에 나의 빠른 발을 고려한다면 제대로 된 안타 하나에 득점까지 기대할만한 위치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 나의 팀내 입지를 고려했을 때 무사 2루에서 괜히 도루를 시도했다 도루자를 한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나의 개인 성적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멈추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팀의 승리를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팀의 타격을 고려해봤을 때, 제대로 된 안타가 나오는 것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네 걸음, 나의 시선이 투수에게 못 박혔다.
여전히 설렁설렁한 팀 웨이크필드의 투구 동작.
3루 베이스를 훔치는 것은 투수의 타이밍과 상관없이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 베이스를 훔칠 수 있었던 2루 도루와는 달랐다. 포수와 베이스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공이 도달하는 시간은 짧았다.
약간의 긴장감. 웨이크필드의 왼발이 슬쩍 올라갔다.
‘지금!!’
살짝 들렸던 팀 웨이크필드의 왼발이 정면으로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엇, 2루 주자 달립니다.]
[스캇 헤츠버그, 공을 잡아 그대로 3루로!! 3루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Kang의 과감한 도루. 순식간에 상황은 무사 3루로.]
[Kang이 완벽한 선취점 찬스를 만들어냅니다.]
무사 3루, 볼카운트 0-2.
‘자 이제 최선을 다해서 날 들여보내 달라고.’
3구, 2번 타자인 버나드의 배트가 세차게 돌아갔다.
따악!!
[쳤습니다!! 유격수 정면!! 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잡아서 처리합니다. 1아웃. 주자 3루.]
1루에서 도루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병살이 됐을 만한 타구가 터졌다. 그리고 그것은 후속 타자인 존 올레루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공을 띄워보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초구 내야 뜬공으로 끝난 점은 아쉬웠지만 말이다.
[순식간에 두 개의 아웃카운트!! 보스턴!! 팀 웨이크필드!! 강력합니다.]
[타석에는 메츠의 4번 타자 마이크 피아자.]
타석에 피아자가 들어왔다. 예리한 스윙.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와 웨이크필드의 궁합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부웅!!
“스트라잌!!”
세 걸음 반의 리드폭을 네 걸음을 넓혔다. 특별히 거창한 의도의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팀 웨이크필드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
하지만 공을 뿌리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뻐엉!!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이 한층 더 좋아졌다. 종전보다 훨씬 더 격렬한 변화. 하지만 피아자는 역시 피아자였다. 마지막 순간 그의 배트가 멈춰섰다. 아슬아슬하게 존을 비켜나간 공. 심판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마이크 피아자 잘 참아냅니다. 볼카운트 1-1.]
네 걸음 반.
팀 웨이크필드의 공이 느리다는 것과 평범한 공조차 똑바로 뻗어오지 않아 송구와 포구가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매우 과감한 리드폭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타석의 타자만 끝낸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구.
이번 경기 들어 가장 극심한 변화를 품은 너클볼이 날아갔다.
부웅
피아자의 배트가 허공을 유영했다. 그리고 그 순간
[Passed ball!!! passed ball입니다.]
던지는 투수도, 받는 포수도 짐작할 수 없는 너클볼이 포수의 미트를 벗어났다. 포일이었다. 블러킹 조차 실패한, 포수의 몸 뒤쪽으로 완벽하게 빠지는 공.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3루 주자 홈으로!!!]
포수인 스캇 헤츠버그가 등을 돌려 공을 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굼뜬 동작. 이미 홈 베이스까지는 불과 다섯 걸음도 채 남지 않았다. 나의 몸이 홈 베이스를 향해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서야 공을 주워든 헤츠버그. 나의 왼손이 홈플레이트를 스쳤다. 판정따윈 필요 없었다. 내가 더 빨랐다.
“세이프!!”
[홈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메츠 선취점.]
[4회 초 메츠가 레드삭스를 상대로 선제득점에 성공합니다.]
[메츠의 Kang이 발로 점수를 만들어냅니다.]
덕아웃, 선수들의 환대가 격렬했다.
1:0
전광판에 새겨진 1이라는 숫자가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다. 안타, 도루, 도루. 그리고 포일. 동료의 도움 없이 나의 힘으로 만들어낸 득점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타석의 피아자가 삼진으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4회 초. 1:0
언제든지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 작은 리드였다. 하지만 그 작은 리드를 등에 업은 것과 업지 못한 것의 차이는 컸다. 바비 존슨의 피칭이 한층 과감해졌다.
따악!!
“마이 볼!!”
그리고 그 과감성만큼이나 야수들의 움직임 또한 바빠졌다. 1:0의 경기가 이어졌다.
***
“이거 재밌는데요?”
불혹을 넘긴 나이라 믿기 힘든 장난기 가득한 얼굴. 자신의 오클랜드 초창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경기를 바라보며 리키 헨더슨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