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에이전트(1)
‘흠, 이 돈벌레가 어쩐 일이지?’
바비 발렌타인은 한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스티브 필립스, 사사건건 자신의 일에 태클을 걸어대는 그 수전노가 무슨 일인지 자신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분명 이대로라면 슈퍼2에 걸릴 텐데.’
발렌타인 감독의 생각처럼 5월 초 콜업된 진호라면 2년 뒤, 슈퍼 2 조항에 의거 연봉협상자격을 얻게 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메츠의 단장인 스티브 필립스 역시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풀타임 2년 차에서 3년 차 중 메이저 로스터 등록 기간 상위 17%를 대상으로 하는 슈퍼2 조항이 적용된다는 것은 메이저 4년 차가 아닌 3년 차부터 연봉협상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매년 객관적 지표에 따라 연봉이 증가하는 시스템상 이는 구단에게 매우 큰 부담이 된다.
하지만 진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분명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생긴 티켓파워는 상당했다. 다만 스티브가 생각하기에 진호는 매년 성적에 따라 연봉을 인상시킨다 할지라도 상식을 초월한 성적으로 터무니없는 연봉을 받아갈 만한 인재는 되지 못했다.
진호의 잔류가 확정됐다.
***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버나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뉴욕이 아닌 노포크로 돌아갔다. 3번째 옵션의 사용이었다. 아마 그다음은 웨이버가 될 것이다. 그가 올해 보여준 퍼포먼스를 생각한다면 DFA 혹은 그저 그런 마이너리그 선수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나와의 경쟁에서 패배해 내려갔다는 점 때문에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진짜 빅리그에서 뛸 기량이 있다면 어떻게든 다시 올라올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조금 일찍 내려간 것뿐이었다. 빅리그는 본래 그런 곳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나의 신체데이터를 갱신한 일이었다.
“흐음, 역시.”
“무슨 일이죠?”
“진호씨, 여기, 이거 한번 보시죠.”
가리비아가 내민 데이터에는 콤마 두 번째 단위까지 체크되는 키와 체중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제법 다이나믹하게 변화되는 수치들. 일정하게 조금씩 증가하는 체중이 눈에 띄었다.
“이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여기, 여기를 주목해 보세요.”
하지만 가리비아가 가리킨 것은 체중이 아닌 신장 쪽이었다. 아주 약간의 변화. 하지만 사람의 키라는 것은 원래 일정한 것이 아니었다. 추간 디스크의 이완과 수축으로 인한 신장 변화는 당연한 일이었다.
“음 6개월 전과 비교했을 때 진호씨, 키가 조금 큰 것 같습니다.”
“네?”
“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진호씨 아직 생일이 안 지났으니 21살이죠? 뭐 그 나이라면 아직 성장이 끝난 나이라고 확신하긴 좀 이르죠. 물론 보통 팔다리 성장은 17세 정도에 끝이 납니다만 척추의 성장은 2~3년 정도는 더 늦게 끝나고, 그것도 개인차가 있으니깐요.”
가리비아의 말에 따르자면 그를 만나고 지난 6개월 사이 나의 키는 대략 0.3cm가량 자랐다. 그의 새로운 메뉴가 나의 몸을 자극해서인지, 아니면 본래 나에게 성장 포텐셜이 남아있어서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찌 됐건 사이즈가 커진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깐, 결국 허리가 0.3cm 길어졌다는 이야기네요?”
“뭐,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런 셈이죠.”
그 성장이 앉은 키에 국한됐다는 점은 조금 슬펐지만 말이다.
***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보스턴에서의 그 2루타 이후 타격에 조금 더 자신감이 붙었다는 것, 그리고 나의 근력이 조금 더 강해졌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그 조금의 차이가 불러일으킨 결과는 지대했다.
따악
[우중간 우익수 머리를 넘기는 강한 타구. 타자는 1루 돌아 2루로.]
[그 사이 2루 주자는 홈까지.]
6회 말 5:3 상황.
나의 2루타에 2루에 있던 리키 헨더슨이 홈으로 들어왔다. 이번 경기 두번째 타점이었다.
[Kang의 1타점 적시 2루타. 템파베이 데빌레이스와의 2차전 경기 Kang이 또 다시 멀티 히트를 기록합니다. 저 선수 최근 컨디션이 보통이 아니네요. 보스턴과의 1차전 멀티히트 이후로 벌써 다섯 경기째 연속 안타에요. 그리고 그중 멀티히트만 세 번째입니다.]
[와우.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시즌 타율이 2할 5푼대까지 치고 올라왔네요. 사실 수비나 주루 등을 보면 알수 있듯이 Kang이 툴 적인 부분에선 아주 높은 평가를 받던 선수거든요. 다만 타격에서는 조금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만, 최근 모습은 타격까지도 자신의 포텐셜을 폭발시킨듯한 모습입니다.]
물론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팀에 새로 합류한 39살, 한국 나이 41살의 리드오프 리키 헨더슨. 그의 활약 역시 나의 타격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뻐엉!!
특유의 낮은 자세로 공을 기다리던 리키 헨더슨이 그대로 방망이를 내던지고 1루로 향했다. 이번 경기 두번째 볼넷이었다.
[6구째 볼!! 리키 헨더슨 이번 경기 3번째 출루입니다.]
[리키 헨더슨 정말 대단한 선구안입니다. 현재 양대 리그를 통틀어 가장 많은 볼넷을 얻어내고 있어요.]
리키 헨더슨이 팀에 합류한 이후, 나는 붙박이처럼 묶여있던 1번 타자에서 벗어나 2번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감독이 나를 1번으로 놔뒀던 것은 팀에 출루율이 괜찮은 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주루가 괜찮은 선수가 나뿐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선택이었다. 출루율 4할에 가까운 리그 최고의 대도가 합류했는데 나를 계속 1번 타자에 묶어둘 이유 따윈 없었다.
그리하여 나에게 주어진 타순은 헨더슨의 바로 뒷자리인 2번 타순.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는 아주 큰 복으로 다가왔다.
뻐엉!!
[투수 견제!! 리키 헨더슨 아주 여유롭게 귀루합니다.]
올 시즌 양대리그 최다 도루, 그리고 80%에 이르는 도루 성공률. 리키 헨더슨은 주자로서 정말이지 완벽했다. 그는 오랜 시간 쌓아올린 경험을 통해 마운드의 투수를 효과적으로 자극할 줄 알았다.
1루로 귀루한 그가 천연덕스럽게 가슴의 흙을 털어내며 또다시 네 걸음 반의 리드폭을 가지고 가곤 했는데, 결국 투수는 종종 그의 도루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포수가 2루로 송구하기 쉬운 바깥쪽 높은 코스 빠른 공을 선택하곤 했다.
따악!!
그리고 나에게 그런 공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8회 말, Kang의 3번째 안타!! 템파베이 데빌 레이스와의 경기. Kang이 4타수 3안타를 기록합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카메라, 인터뷰 등에 능숙했다. 중학 시절부터 나는 가장 빛나는 스타였고 경기가 끝난 뒤 나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Kang선수 우선 승리 축하 드립니다. 오늘 그야말로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는데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 활약도 활약이지만 팀이 승리했다는 점이 가장 좋군요. 그리고 최근 타격감이 좋았던지라 멀티안타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내심 욕심냈는데 3안타를 치게 돼서 매우 기쁩니다.”
“앞으로의 목표 같은 건 어떤 게 있으신가요?”
“당장 눈앞의 목표라면 메이저 1호 홈런이 목표라면 목표겠네요.”
“아, 그러고 보니 2루타를 7개나 기록하셨는데 아직 홈런은 없으시네요. 부디 빠른 시간 내에 메이저 1호 홈런 기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국중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뉴욕주와 플로리다주 전체에 송출되는 방송에 나의 얼굴이 박힌 인터뷰가 뿌려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진호 선수다!!”
“강진호 선수, 오늘 4타수 3안타로 혁혁한 공을 세우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한국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근 부모님께 집을 장만해드렸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인가요?”
최근 며칠 계속되는 활약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한국인 기자들은 어느새 무리라고 칭해도 충분할 만큼 불어났다. 구단 역시 그것을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얼핏 듣기로는 나의 유니폼 판매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준이라고 했다.
“고국에 계신 팬분들의 성원에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더 좋은 활약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의 강진호. 5경기 연속 안타!!-
-4타수 3안타. 이날의 선수 선정-
-강진호 메이저 정복 선언? ‘앞으로 더 좋은 모습 기대하셔도 됩니다.’-
-오늘만큼은 내가 뉴욕의 4번 타자!!-
신문을 내려놓는 주상훈 국가대표팀 감독의 표정이 사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