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에이전트(2)
“젠장, 이 녀석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이미 다 끝난 일이었다. 이번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권이 걸려있었다. 아시안 게임 최초 프로 선수의 참가 허용. 비록 나눠 먹을 사람들은 늘었지만 그래도 파이 자체가 커진 만큼 주 감독에게 돌아온 금액 역시 짭짤했다.
박찬화의 경우 국민적 인기가 워낙 거셌던 터라 별다른 접촉이 없었음에도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달랐다. 올 초 빅리그에 콜업되긴 했지만, 초반 잠깐 반짝했을 뿐, 그저 그런 백업으로 주목도가 높지 않았었다. 하지만 방콕 아시안 게임 출전 멤버 발표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저렇게 갑자기 물만난 물고기처럼 활약하면서 일은 틀어졌다. 각종 언론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강진호를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요 일간지에 매일같이 얼굴이 올라가는 선수를 국가대표에서 제외한다? 대체 어떤 욕을 들어먹을지 감당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욕만 들어먹는 거면 괜찮지.’
혹여 집중취재라도 들어온다면······. 그러다가 혹시 그분들까지 피해가 간다면, 알량하게 유지하고 있는 대학감독자리도 위태로울 것이 틀림없었다. 주 상훈 감독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에이, x발.”
***
모레 있을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원정 1차전 경기. 선발 명단에 나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 선발인 지저스 산체스가 좌완투수라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진짜 칼 같네,’
물론 좌타자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의 좌투수 상대전적은 영 좋지 않았다. 게다가 도루 역시 좌투수를 상대로 하는 것은 분명 껄끄러웠다. 하지만 최근 나의 타격감은 그야말로 물이 올랐다는 표현이 어울렸고, 바로 어제는 MoM으로, 그리고 오늘까지 한다면 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 중인 상황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다.
“헤이, 루키. 무슨 일이야?”
“아, 헨더슨 씨.”
라커룸에 걸린 A4를 멍하니 바라보는 나에게 리키 헨더슨이 다가왔다. 그는 명성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소탈했는데, 자신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며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보였다.
“어라? 플로리다랑 경기에 빠졌네?”
“네.”
“어디 보자. 아하, 선발이 좌완투수구나. 흐음, 그렇다고 해도 한참 감이 좋을 때는 좌완이건 우완이건 그냥 올려주는 게 좋을 텐데. 정말 저 영감님 명장 놀이를 참 좋아한단 말이야. 그래도 너무 시무룩하게만 있지 말고 기회다. 생각하고 푹 쉬어둬. 지금처럼 활약하면 나중엔 쉬고 싶어도 못 쉰다.”
헨더슨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딱히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처럼 쉴 수 있을 때 쉬어두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운되는 기분을 애써서 달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가리비아가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진호, 에이전트한테 전화 왔었어. 오는 대로 연락 달라고 하더라고. 급해 보이던데?”
“토마슨이?”
현재 나의 에이전트를 담당하고 있는 이는 토마슨 최. 찬화 선배의 에이전트인 스티브 김과 마찬가지로 UC버클리를 졸업한 재미교포 3세였다. 메이저로 진출하던 당시 국내외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재미교포 3세였던 만큼 한국 쪽으론 인맥도 부족했고 능력 역시 딱히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서비스타임 동안 함께하긴 부족하지 않지만, 훗날 연봉협상이나 FA를 함께하기엔 조금 부족한 딱 그런 수준이랄까?
“야, 너도 이제 제법 버는데 제발 핸드폰 좀 사 들고 다녀라. 요새는 그렇게 비싸지도 않아.”
“어차피 구단 아니면 집인데. 뭐 오프시즌 되면 생각해볼게요. 그나저나 빨리 전화하라면서요. 무슨 일인데요.”
“아, 참. 맞다. 이번 방콕 아시안 게임 선발문제로 협회에서 연락이 왔어.”
아시안 게임.
사실 야구선수에게 국제대회란 그리 탐탁한 대회는 아니었다. 1년 중 8개월. 무려 162경기를 뛰는 메이저리거에게 비시즌 중의 휴식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사람의 몸은 강철이 아니었고 혹사를 했다면 그만큼의 휴식이 필요한 법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 나에게 아시안 게임이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진짜요?”
“어, 그런데 그쪽에서 무조건 선발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 어쩐다 그러더라고.”
“형평성이요? 미친.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를 선발하는데 형평성은 무슨 형평성이에요.”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은 아시안 게임 최초로 프로 선수의 참가를 허용한 경기였고, 거기 참가한다는 것은 곧 운동선수들에게 가장 큰 짐 덩이인 병역의 의무를 내려놓는 것으로 직결됐다. 그리고 올해 아시안 게임은 22인 전원을 병역미필자로 선발하는 노골적인 병역면제용 국제대회였다.
“일단 알겠어요. 일단 그쪽에는 적극적으로 합류하겠다는 의사 전달해주고, 박 기자 쪽에 따로 연락해서 인터뷰 좀 잡아줘요. 단독이라고 이야기하면 아마 바로 하겠다고 할거에요.”
빅리그에 적응하는 것에 집중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사실 빅리그에서 활약한다면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었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옳았다. 하지만 형평성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의미였다.
따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박기자님 여깁니다.”
박 기자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집 근처의 한 전통찻집이었다. 물론 퀸스에 위치한 찻집인 만큼 완벽하게 한국식의 찻집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전통차들을 메인으로 중국과 일본 베트남 인도 등등 아시아 각국의 전통차들을 두루 판매하는 일종의 퓨전 찻집이었다.
“단독 인터뷰라는 말에 바로 달려오긴 했습니다만, 갑자기 어쩐 일입니까?”
“어쩐 일은요. 한창 힘들 때 함께 해주셨는데 볕 들어 왔을 때도 함께 쫴야죠.”
“하하, 그것참 고마운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빈말은 아니었다. 지난 몇 주의 시간 동안 지켜본 박 기자는 제법 신뢰할만한 기자였다. 일반적으로 기자에게 붙기 가장 힘든 말중 하나가 신뢰할만한 이라는 접두사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내가 기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급의 칭찬이었다.
더욱이 한국 최고의 스포츠 일간지의 미국파견 기자인 그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 스포츠계의 인맥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정보들이였다. 물론 그것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미국에서 성공할 나에게는 하등 필요 없는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만큼은 예외였다.
“그러면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테이프로 돌아가는 보이스 레코더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의례적이고 뻔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들이 오갔고. 테이프 한 면의 녹음이 끝나갈 때 즈음 마침내 내가 원하는 화제로 들어갈 만한 질문이 들어왔다.
“최근 새로 팀에 합류한 선수들의 면면이 대단합니다. 마이크 피아자 선수에, 리키 헨더슨 선수까지. 팀 내 분위기는 어떤가요?”
“최근 승률을 보면 아시겠지만, 분위기는 매우 좋습니다. 메이저리그의 프로 선수에게 트레이드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게다가 마이크 피아자 선수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깐요.”
“특별한 인연이라면?”
“찬화 선배님이요.”
“아, 그렇군요.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다저스에서 박찬화 선수의 공을 받았었죠.”
“네, 저야 뭐 찬화 선배님과 특별히 마주친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깐요.”
“하긴 강진호 선수는 박찬화 선수와 3살 차이니깐, 딱히 만난 적은 없었겠군요.”
“그래도 청소년대표팀 시절에 선배들에게 찬화 선배님 이야기는 종종 들었고, 제가 이렇게 메이저로 진출한 것도 찬화 선배님의 전례가 있었던 덕분이라서 심정적으로는 굉장히 가까운 기분입니다.”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미국에 진출할 때, 여러 가지 제도적인 부분에서 박찬화 선수라는 전례는 무척 큰 도움이 됐다.
“그러시군요. 그래도 이제 곧 심정뿐 아니라 실제로도 가까워지시지 않을까요? 올해를 기점으로 야구 국제대회 대표팀에 프로 선수들이 참가하는 만큼 말이죠.”
“하하,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네요.”
“국제대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올해 12월에 방콕 아시안 게임이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일정은 10월에 끝나는데 준비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신지요.”
“글쎄요, 저 같은 경우는 올해 빅리그에 풀타임으로 뛴 것도 아니고, 작년 같은 시기에 윈터리그를 뛴 경험도 있으니깐 컨디션 조절은 크게 어려움은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뭐 그것도 일단 선발이 돼야 가능한 이야기겠죠.”
“네? 그게 무슨······.”
“에이전트에게 전해 듣기로는 저를 그냥 선발하기에는 대표팀에서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더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래서 말인데 혹시 박 기자님. 뭐 도는 이야기 같은 거 없습니까?”
“잠시만요.”
딸깍
돌아가던 보이스 레코더가 멈춰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