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에이전트(4)
경기가 시작됐다.
시합 직전에 했던 페퍼 게임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리키 헨더슨이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헨더슨이 초구 몸쪽 공을 끌어당겨 안타를 만들었다.
[1회 초 노아웃 주자 1루. 메츠의 신인타자 Kang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저 선수 최근 굉장한 기세입니다. 한때 2할도 위태로웠던 타율을 불과 여섯 경기 만에 2할 5푼까지 끌어올렸어요.]
[최근 여섯 경기 22타수 11안타. 무려 5할의 타율입니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라이언 뎀스터. 올 5월 콜업되서 불펜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곧바로 선발로 투입된 23살의 젊은 루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빽빽한 수염이 인상적인 녀석은 나와 초면이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저 두 선수 2년 전 마이너에서 마주친 적이 있네요.]
[호, 그렇군요, 플로리다 리그에서 한 번 만났었네요.]
[그날 경기에서 Kang의 성적이, 아 3타석 2타수 1삼진 1볼넷 1도루로군요.]
제법 인상 깊은 상대였다. 95마일 전후의 빠른 공은 그리 특출나지 않았지만, 슬라이더만큼은 일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완투수 주제에 나에게 백도어 슬라이더로 루킹삼진을 뽑아낼 만큼 배짱도 두둑했다.
‘예전의 내가 아니란 걸 보여주겠어.’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프로의 쓴맛을 느끼던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천지 차이였다. 우투수의 백도어 슬라이더에 속아 넘어가는 멍청한 짓은 더는 없을 것이다.
뎀스터의 시선이 수시로 1루를 힐끔거렸다. 1루에는 특유의 자세로 뎀스터를 도발하는 헨더슨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내 마운드의 뎀스터가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지극히 올드스쿨스러운 폼. 그 순간이었다.
[라이언 뎀스터. 세트 포지션!! 어? 1루 주자!! 1루 주자 2루로!!]
1루에 있던 헨더슨이 2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뎀스터의 폼이 흔들렸다.
뻐엉!!
어이없게 빗나간 공. 2루에 선 헨더슨이 씨익 웃었다.
[리키 헨더슨이 도루에 성공합니다. 볼카운트는 1-0. 마지막 순간에 투수가 당황했어요.]
[아무래도 오늘이 커리어 첫 선발등판인 만큼 여러 가지로 긴장이 될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흔들리는 건 곤란하죠. 방금도 저렇게 어이없게 빗나가는 공만 아니었다면 포수가 1루 주자를 잡아낼 가능성은 충분했어요.]
마이너 시절. 나름대로 배짱 두둑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메이저 선발 데뷔는 특별했다. 마운드의 뎀스터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타석까지 전해졌다. 그러고 보면 녀석도 참 운이 없었다. 하필 메이저 선발 데뷔전 첫 상대가 바로 저 리키 헨더슨이라니 말이다.
‘좋았어.’
하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가 불운하다는 것은 타석에 선 타자가 운이 좋다는 말과도 같았다.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고작 이런 소소한 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오늘 나에겐 더 큰 운이 필요했다. 아주 아주 커다란 대운이 말이다.
[투수, 세트 포지션.]
홈플레이트 너머 포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트 포지션. 뎀스터의 시선이 2루에 못 박혔다. 소소하게 시작된 행운이 점점 부풀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움켜쥔 배트는 가벼웠다. 뎀스터의 손끝. 마침내 공이 날아들었다.
야구공이 수박만 하게 보인다는 표현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수박이 있었다.
따악!!
[2구째, 잡아당긴 타구!!]
[우중간 큽니다!!]
1루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1루 코치의 환한 미소가 보였다. 1루를 지나 2루로 향하는 사이 3루 근처에서 뭉그적대고 있는 헨더슨의 모습도 보였다. 그의 손가락이 나의 등 뒤를 가리켰다. 우중간 펜스 앞 플로리다의 외야수가 허탈하게 서 있었다.
[넘어갔습니다!!]
[1회 초, 메츠의 2번 타자 Kang의 선제 2점 포!!]
5월 콜업된 이후 근 한달 반의 시간 만에 터진 1호 홈런. 머릿속이 새하얗게 달아올랐다. 가슴은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 쳤다. 2루 베이스를 돌아 3루로, 그리고 홈까지. 전광판에 새겨진 2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느긋하게 베이스를 돌았음에도 인터벌 트레이닝이라도 한바탕 한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돌아온 덕아웃이 적막했다.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선수, 그리고 코치진. 아주, 아주 긴 시간 동안 상상해왔던 광경이었다. 나의 몸이 그 상상속에서처럼 움직였다. 허공을 향해 하이파이브하고 마치 누군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멋지게 껴안았다. 물론 잡히는 것은 공기뿐이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
“잘했어!!!”
“매일 빨빨거리고 달리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시원하게 배트도 휘두를 줄 아는구만.”
침묵하던 선수들이 삽시간에 다가와 나의 머리를 헝크리고 몸을 두들겼다. 그리고 헨더슨이 나를 껴안았다.
“좋은 스윙이었어. 루키.”
1회 초 2점의 선취득점. 분명 큰 점수였다. 하지만 승리를 확신할 만큼 큰 점수는 아니었다. 기선은 제압했지만, 야구는 9회까지였고 아직 상대방은 단 한 번의 기회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팀에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형 포수가 존재했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평균 OPS 0.972의 MVP급 타자. 마이크 피아자의 배트가 또 하나의 홈런을 만들었다.
[마이크 피아자, 홈런!! 홈런입니다. 3:0. 메츠가 플로리다를 상대로 1회 초 석 점을 달아납니다.]
뎀스터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선발 데뷔전에서 1회에만 2개의 홈런이라니. 결국, 뎀스터는 1회 초, 단 1개의 아웃카운트만을 잡아낸 채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물론 뎀스터가 물러났다고 해서 경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빅 다렌스버그부터 제이 파웰에 이어 커트 오알라까지. 플로리다의 불펜들이 연이어 경기에 투입됐다.
그리고 경기가 폭발했다. 11대 2의 대승리.
5타석 4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 2득점 1볼넷.
아직 전체 타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비율 스탯이 올라가는 속도가 가팔랐다. 경기 직전 0.256이던 타율은 0.264까지 치솟았다.
또한, 예상치 못했던 소득까지 하나 생겼다. 오늘 경기에 Player of the Game으로 선정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축하드립니다. 3경기 만에 또 Player of the Game에 선정되셨네요. 게다가 오늘까지 하면 무려 7경기 연속 안타 행진까지!!””
“감사합니다.”
Player of the Game. 제법 거창한 이름이었지만 사실 이름과 달리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사무국, 혹은 공신력 있는 단체에서 지정하는 것이 아닌 그저 중계 채널에서 경기 직후 제일 잘한 것 같은 선수를 한 명 붙잡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나흘 전 인터뷰에선 당장 눈앞의 목표가 메이저 1호 홈런이라고 하셨는데요. 그 목표를 달성하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우선, 팀의 승리에 보탬이 되는 홈런을 쳤다는 게 좋고 메이저리거로서 한 걸음씩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눈앞의 목표를 하나 달성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제 다음 목표는 뭔가요? 그리고 장기적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지도 궁금하네요.”
“메이저리그에 이름을 남기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저기 리키 헨더슨 선수처럼이요. 그렇게 해서 조국에 계신 팬들이 저를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 별것 아닌 Player of the Game으로 인한 인터뷰가 나에게 주는 것은 실로 막대했다. 단순히 뉴욕과 플로리다 지역에 나의 얼굴을 알리는 효과 때문이 아니었다.
1998년, 대한민국은 아직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커다란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미국의 방송에서 다뤄진다는 것은 한국의 주류언론에서 다루는 것 이상으로 큰 효과를 발휘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이 인터뷰는 지금 나를 취재하러 온 한국의 스포츠 신문들 말고도 한국의 다른 많은 매체에서 나를 다루도록 만들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
‘운이 좋았어.’
그리고 그것은 주감독을 압박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뭐 이젠 어찌 됐건 아무 상관 없겠지만 말이다.
***
-강진호, 시즌 1호 홈런포!!-
-강진호!! 불과 나흘 사이 두 번째 경기 MVP에 선정-
-대한의 건아 강진호 ‘언제나 조국의 팬들을 생각하며 경기에 임하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거 강진호. ‘인생의 목표는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는 것.’-
CBS를 통해 방송된 인터뷰의 효과는 놀라웠다. 한국의 많은 신문, 심지어 TV 뉴스까지도 연달아 나의 소식들을 쏟아냈다.
“아, 루키? 여기야 여기!!”
우리가 머무는 호텔의 커피숍. 헨더슨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