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에이전트(5)
“아 헨더슨씨.”
나를 향해 손짓하는 헨더슨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190cm 정도의 건장한 중년 남자가 함께하고 있었다. 헨더슨의 에이전트인 제프 보리스였다.
“안녕하십니까. Kang. 제프 보리스입니다.”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보리스씨.”
제프 보리스. 그는 배리 본즈, 리키 헨더슨, 커트 실링, 트레버 호프만 등을 포함한 약 80여 명의 메이저리거와 계약 중인 거물 에이전트이자 우수한 변호사였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었다.
“이야기를 대충은 전해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리 복잡한 문제는 아니더군요.”
“들어서 아시겠지만, 돈으로 해결할 생각은 없습니다. 병역은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민감한 주제고 거기에 돈이 끼어드는 건 국민 정서가 용납하지 않아요.”
“물론이죠. 애초에 메이저리거가 다른 종목도 아니고 야구 국가대표로 합류해주겠다는데 돈을 내라니. 하하. 참 터무니가 없는 이야기로군요. 게다가 그걸 선수가 직접 나서서 걱정하고 해결책을 찾는다니. 후······.”
제프 보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일은 깔끔하게 처리될 겁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말이죠. 솔직히 말해서 남미 쪽 국가들에 비하자면 한국은 무척 쉬운 편이거든요. 더불어서 앞으로 이런 류의 문제에 관해서는 일체 신경 쓰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여기 표준 계약서입니다. 읽어 보시고 수정할 부분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애당초 내가 경기 외적인 일들에 이렇게 신경을 쏟게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선수가 에이전트에게 자신의 수익을 나눠주는 것은 야구 외적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야구에 몰입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야구였지 비즈니스가 아니었다.
표준 계약서를 건넨 제프 보리스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일개 소악당이 상대하기에 이 변호사는 너무나도 큰 거물이었다.
***
제프 보리스가 미소 지었다.
‘흥미롭긴 한데, 이게 과연 얼마나 이익이 될지는 잘 모르겠군.’
오랜 고객이자, 이제는 친구나 다름없는 리키 헨더슨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막 메이저의 문을 두드리는 루키, 그것도 다른 에이전트와 이미 계약이 되어있는 복잡한 루키를 상대하기에 보리스는 너무나도 거물이었다.
‘게다가 사실 이런 일에는 나보다는 보라스 그 친구와 더 어울리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말이지.’
스캇 보라스. 최근 룰4의 허점을 파고들어 신인선수들에게 천문학적인 계약금을 안겨줬던 그의 동료가 떠올랐다.
‘하긴, 그 친구라면 돈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에 성큼 나설 리가 없긴 하겠군.’
90만 달러의 계약금, 그리고 4년 만의 빅리그 진출과 그 어마어마한 툴을 고려한다면 진호는 분명 미래가 유망한 선수였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빅리그를 1년도 채 소화 시키지 못한 애송이였다. 그가 돈이 되기까지는 앞으로 2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고, 그 기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좋습니다. 계약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네요.”
“워워, 급하게 굴지 마시고. 일단 들고 가서 변호사와 상담해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사인할 결심이 서면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명색의 메이저리거인데 좀 떠들썩하게 해야죠.”
하지만 이왕지사 나선 일이었다. 가장 효과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KBSA라고 했나? 뭐, 살짝 건드려보면 알아서 쳐내겠지.’
***
뉴욕 힐튼 호텔의 리셉션룸. 스무 명이 넘는 기자들이 연신 카메라를 눌러댔다. 물론 한국 기자들이 더 많긴 했지만, 현지 기자들의 숫자 역시 상당했다.
“강진호 선수, 재계약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았는데, 굳이 시즌 중반에 이렇게 기존 에이전트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에이전트와 계약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한국 기자의 질문에 보리스가 손을 들었다.
“아, 그건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아시다시피 이전 강진호 선수의 에이전트인 토마슨 최의 경우 특별한 소속사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하는 에이전트였습니다. 반면 저희 베벌리힐스 스포츠 카운슬의 경우 홍보와 스케쥴 기타 법적인 문제까지 모두 관리할만한 인력과 자원이 있고요. 즉 메이저리거에 대한 완벽한 지원이 가능하단 이야기 입니다. 사실 강진호 선수의 현재 위치를 생각할 때 이건 오히려 너무 늦은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선 토마슨 최 역시 동의했고 원만한 합의 끝에 계약을 인계받았습니다.”
보리스의 이야기처럼 토마슨과의 계약해지는 원만했다. 그는 무능했지만 선량했고 내가 대형 에이전시와 계약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물론 그 진심에는 내가 내민 상당한 액수의 위약금이 차지하는 지분이 상당했겠지만 말이다.
“앞으로 저희 베벌리힐스 스포츠 카운슬은 강진호 선수가 오직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진호, 제프 보리스와 에이전트 계약 체결. 강진호와 계약한 제프 보리스는 배리 본즈, 리키 헨더슨, 커트 쉴링 등의 메이저 최정상급 선수들을 다수 관리하는 메이저의 거물 에이전트로 알려져 있다.-
-제프 보리스 ‘강진호의 재능은 진짜. 그가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
-토마슨 최 ‘나에게 메이저리거의 관리는 벅찬 일이었다. 강진호 선수와의 개인적인 감정은 없으며, 그가 잘되기를 바란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신문지를 팽개치는 상훈의 얼굴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다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사이, 강진호는 더 유명해졌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에이전트는 해고됐으며 그 자리에는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더이상 그에게 들어오는 연락은 없었다.
“그런다고 그냥 국가대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웃기지 말라고 해. 여기 대한민국이야.”
그는 결코 혼자 먹지 않았다. 협회에 그의 돈을 받아먹지 않은 인간은 거의 없었다. 물론 여론은 무서웠다. 하지만 이번 방콕 아시안 게임은 누굴 데리고 가건 우승은 떼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여론은 성과만 낸다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잠잠해질 것이다.
똑똑
“누구야!!”
“광진대학 박동엽 감독님이 오셨습니다.”
“동엽이 그 자식이?”
뜻밖의 방문이었다. 애당초 연호대학과 라이벌관계인 광진대학의 박동엽과 주상훈은 업계에 소문난 앙숙이었고 이렇게 따로 찾아올만한 관계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리서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을 열고 들어온 동엽의 표정이 밝았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주상훈의 기분이 한층 더 나빠졌다.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까칠하기는, 뭐 나도 너 좋아서 온 거 아니니까 계속 인상 써라.”
“무슨 개 수작이야.”
“너 장난질이 좀 심했던 것 같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KBO쪽에서 협회로 이런 걸 보냈다고 하더라고.”
동엽이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그러기에 작작 쳐 드셨어야죠. 몇몇 구단에서 항의가 들어왔어요. 항의가. 너도 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프로 구단들을 상대로 이렇게 심하게 장난질을 치냐.”
“무슨 개 소리야!!”
상훈이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단축번호 3번. ‘그분.’
“요즘 협회 차원에서 KBO랑 좀 잘 지내보려고 하는 거 잘 알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야.”
위로를 건네는 동엽의 미소가 비릿하다.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협회가 KBO와 잘 지내보려고 하다니. 협회는 언제나 KBO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이제 와서 KBO의 공문 따위에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번 구단별 선수 분배에 관련된 조율은 상훈 혼자서 진행한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런 예민한 문제를 감독 혼자서 진행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이미 협회의 높은 분들과 이야기를 다 끝낸 문제였다.
[전원이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야야, 전화기 내려놔. 그 양반도 지금 자기 앞가림한다고 여간 바쁜 게 아니야. 그냥 조용히 납작 엎드리고 있어. 괜히 일 키우지 말고. 협회에서도 KBO랑 잘 조율해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고 있으니까.”
그저 일상적으로 관례만큼 주고받던 정(情)이었다. 상훈은 왜 하필 자신이 챙겨 먹을 타이밍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치 떨리는 억울함에 이를 갈았다.
“아, 그리고 그, 감독자리 나보고 대신 하라고 하더라고. 뭐 국가의 영광을 위해서 흔쾌히 수락했으니까 그건 그렇게 알아두라고.”
***
보리스와의 계약서에 사인하고 며칠 뒤, 내 앞으로 쪽지 하나가 꽂힌 한국신문 한 부가 날아왔다.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 감독으로 내정되어 있던 연호대학 주상훈 감독(47)이 일신상의 사정으로 사임 의사를 표했다. KBSA는 주상훈 감독을 대신해 광운대학 박동엽 감독(47)을 선임할 계획이다.-
-계약 선물입니다.-
구구절절한 과정 따위는 딱히 알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딱 알맞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