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26화 (26/210)

# 26화.

타이틀(1)

살짝 들려있던 오른발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전진운동의 에너지가 배트에 고스란히 실렸다.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배트 헤드. 찌르르 손바닥이 울려왔다.

따악

등을 돌려 타구를 바라보던 투수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홈런, 홈런입니다. 3:1로 메츠가 앞서가는 가운데 Kang이 석 점 홈런을 기록합니다.]

[지금 이게 Kang의 시즌 세 번째 홈런이었던가요?]

[맞습니다. 지난 12일 플로리다 전에서의 마수걸이 홈런 이후 고작 이 주 사이 세 개째 홈런입니다.]

[6월 들어서 Kang의 성적이 대단하군요.]

[홈런도 홈런이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타율과 장타율입니다. 6월 성적만 본다면 리그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타격 성적이에요.]

지난 보스턴전 이후 슬슬 올라왔던 나의 타격감은 템파베이 전에서의 홈런으로 절정을 찍은 뒤 도무지 내려갈 줄을 몰랐다. 덕분에 6월, 지금까지 총 21경기 중 내가 스타팅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것만 16경기. 대타나 대주자로 출전한 것도 3경기에 달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좌투수가 선발 등판하는 경기에도 나의 이름이 스타팅 라인업에 올라갔다.

이번 달 1.2,3주 나의 성적은 무려 71타석 65타수 24안타(2루타 4개, 홈런 3개) 4볼넷 1희생 번트 1희생 플라이. 0.369/0.400/0.569라는 터무니 없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번 달만으로 한정 짓는다면, 나의 성적은 팀 내에서 가장 훌륭했다. 심지어 저 마이크 피아자보다도 말이다.

“이 자식!! 요새 아주 날아다니는구나.”

“잘했어!!”

“이봐 루키, 보리스가 요새 아주 좋아 죽으려고 그래. 나한테 너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근사하게 한턱내겠다고 하더라니까.”

베이스를 한 바퀴 돌아 덕아웃으로 돌아온 나를 향해 팀원들의 칭찬이 쏟아졌다.

“하하, 고마워요. 보리스가 한턱낼 때는 저도 꼭 불러줘야 해요.”

물론 이런 터무니 없이 훌륭한 성적이 온전한 나의 실력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좋은 공을 쳐내는 것은 실력이었지만 그 좋은 공이 안타가 되는 것은 실력 외에 행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6월, 나의 운은 상당히 좋았다. 당장 두 번째 홈런만 하더라도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인 쿠어스 필드가 아닌 우리 셰이 스타디움이었다면 담장 근처에 떨어지는 타구에 그쳤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런 식이면 이번 주에는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게, 루키 너 지금 이걸로 홈런이 더해졌으니 이번 주도 성적 제법 괜찮은 거 아니야?”

방금 홈런으로 이번 주 나의 성적은 5경기 선발 출전에 8안타. 2루타와 홈런이 각각 한 개씩으로 쿠어스 필드 3연전이 있었던 저번 주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게 훌륭했다.

“그렇기는 한데, 고작 1홈런 가지고 되겠어요? 저번 주에도 새미 소사 선수가 막판에 홈런 5개나 몰아치는 바람에 제대로 물먹었잖아요.”

“에이, 그거야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었지. 3경기 만에 5홈런 치는 그런 일이 또 있으려고.”

“글쎄요······.”

지난주 초 쿠어스 필드 3연전으로 얻은 좋은 성적 덕분에 나는 유력한 '이주의 선수' 후보로 손꼽혔었다. 3경기 14타석 13타수 6안타(2루타 2개, 홈런 1개) 6타점 4득점 1희생 플라이라는 성적은 분명 그것을 기대할만한 아주 훌륭한 성적이었다.

만약 올해가 1996년이나 1997년이었다면 말이다.

-새미 소사, 필라델피아와의 2차전 멀티 홈런!!-

-새미 소사, 2차전에 이어 3차전까지 2경기 연속 멀티 홈런!!-

-새미 소사!! 필라델피아와의 4차전 마지막 경기 만루 역전 홈런!!-

천재지변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야구 천재가 세 번째 불알을 달았을 때 나올 수 있는 그냥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빌어먹을 약쟁이들 같으니.’

성질 같아서는 매스컴에 확 터트리고 싶었지만, 문제는 증거도 없이 그래 봐야 별반 소용이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98년부터 2002년까지 BLACO(Bay Area Laboratory Co-operative)라는 스포츠 관련 제약회사를 조사했던 연방 조사관들이 그 5년에 걸친 조사자료를 2003년에 발표했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2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심지어 사람들 사이에 그것이 받아들여진 이후에도 사무국 차원의 징계가 제대로 이뤄지기까지는 더욱 긴 세월이 더 필요했다.

따악!!

[마이크 피아자, 홈런!! 홈런입니다. 시즌 13번째 홈런.]

[8회 초, 6:1의 점수 차이가 8:1까지 벌어지네요. 이건 사실상 뒤집기 힘들다고 봐야될 것 같습니다.]

[테리 메튜스가 마운드에서 내려가네요. 메튜스를 대신해 마운드에 올라 온 투수는 크리스 퍼셀, 올해 처음 메이저에 올라온 선수입니다. 5경기에 구원 등판해서 지금까지 7.1이닝 4.9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입니다.]

덕아웃에 앉아 동료들과 잠시 잡담을 나누는 사이, 피아자의 홈런으로 점수는 어느새 7점 차까지 벌어졌다. 8회에만 이미 5점을 얻었음에도 아웃카운트는 여전히 0. 새로 올라온 루키 투수 크리스 퍼셀이 차근차근 장작을 쌓기 시작했다.

이루타, 진루타, 볼넷, 안타, 삼진, 그리고 볼넷.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의 타석이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루라는 밥상이 차려진 채로 말이다.

마운드의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그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단순히 포커페이스가 잘 되는것인지 정말 담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디셉션이 좋은 투수는 아니야.’

앞서 지켜본 몇 번의 타석만으로도 타이밍은 파악됐다. 남은 것은 제대로 지켜보고 제대로 쳐내는 것뿐.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출발했다.

‘아슬아슬 하기는 한데 빠진다.’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아슬아슬한 코스였다. 하지만 나의 판단이 옳았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0.

두 번째, 외곽 낮은 코스. 이번에도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2-0

만루, 2볼 노스트라이크. 이제 빠지는 공 두개면 밀어내기로 점수를 헌납해야 하는 상황. 그야말로 투수에게는 지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운드의 투수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이었다.

세 번째 와인드업.

하지만 안타깝게도 표정이 침착하다고 해서 그의 손을 출발한 공까지 그런것은 아니었다.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루키가 부담감에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손끝에서 공이 미끄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녀석의 손에서 출발한 공이 한가운데에 몰린 채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악!!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큼지막한 타구. 그 와중에도 마운드의 투수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리고

[3구째 잡아당긴 타구!! 우측 담장을 크게 넘어갑니다. 8회 초, 만루 홈런!! 메츠의 Kang이 8회 두 번째 홈런을 쏘아올립니다.]

나의 눈앞으로 이번 주 가장 훌륭한 선수라는 타이틀이 성큼 다가왔다.

***

-6월 식을 줄 모르는 방망이의 주인공 강진호 선수를 만나다.-

지난 5월 2일 더블A 빙엄턴 메츠에서 단번에 메이저리그로 콜업 됐던 강진호 선수. 당시만 하더라도 많은 현지 언론들은 그의 성공에 회의적이었다.

‘Kang? 그는 아직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재능이 뛰어난 유망주지만 아직 빅리그 수준은 되지 못한다.’

‘확장 로스터에 콜업해서 시험해보더라도 늦지 않을 것.’

‘스티브 필립스는 몇 경기 이내로 이 루키를 자신의 자리로 돌려보낼 것이 틀림없다.’

일부 극성맞은 뉴욕의 언론들은 그의 첫 경기 직전까지 이러한 부정적인 기사들을 내보냈다. 하지만 데뷔전에서 강진호 선수는 뛰어난 수비와 주루, 그리고 준수한 공격능력을 선보이며 세간의 우려를 단번에 잠재웠다.

이후 5월 한 달간 준수한 백업 멤버로 활약하던 강진호 선수는 6월, 폭발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0.378/0.418/0.595 그리고 4홈런. 그가 6월에 기록한 성적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6월 한 달로 한정 짓는다면 그는 팀에서 가장 자주 공을 쳤고, 두 번째로 많이 출루했으며, 가장 멀리 공을 쳐 냈다.

“우선은 운이 좋았어요.”

최근 활약의 비결을 묻는 본 기자에게 그가 꺼낸 첫마디는 뜻밖에도 운이 좋다는 말이었다. 기자가 느끼기에 그것은 단순히 쑥스러움이나 겸손함, 혹은 겉치레 가득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프로의 이야기였다.

“쿠어스에서 홈런이야 쿠어스라서 간신히 넘어간 거였고, 최근에 그 볼티모어 3차전에서 그 만루홈런도, 솔직히 투수가 결정적일 때 실투를 해준 덕분에 가능했어요. 게다가 타구 방향들도 대체로 좋았고요.”

하지만 단순히 운이라고 보기에 5월, 평범한 백업 수준이던 강진호 선수가 단숨에 팀내 최고 수준의 타자로 변신한 것은 너무나도 극적이었다. 이에 팀 동료인 리키 헨더슨 선수(올스타 10회, 골드 글러브 1회, 실버 슬러거 3회, 1990년 MVP)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가 이것저것 세심하게 지도해주고 있습니다. 장래가 기대되는 어린 유망주를 교육하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지요.”

메이저리그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잠시 리키 헨더슨 선수에 관해 설명하자면 올 시즌 트레이드로 메츠에 합류한 그는 79년 데뷔 이래 근 20년 가까이 메이저리그 최고의 수위타자로 손꼽히고 있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물론 강진호 선수의 말처럼 약간의 운이 따른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어리지만, 재능만큼은 한국 최고로 손꼽혔던 강진호 선수에게 풍부한 경험을 가진 전설적인 선수의 헌신적인 지도가 더해졌을 때 생겨난 폭발적인 기량 상승이야말로 지금 강진호 선수가 보여주는 대활약의 원동력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남을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함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LA 베벌리힐스 스포츠 카운슬 건물 최상층의 사무실. 한 손에 보고서를 든 채로 부하직원의 보고를 받는 보리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진호의 아시안 게임 출전권을 위해 가볍게 시작했던 한국의 시장조사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돈이 되는 시장이야.’

5천만에 근접한 인구수, 그리고 모든 프로 스포츠 중에서 압도적인 야구의 인기. 작년 한 해 박찬화가 한국에서 광고로 벌어들인 금액은 무려 500만 달러에 육박했다.

우선 아시안 게임의 출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호의 출전에 관해 장애가 되는 것은 한국 야구계 자체가 아닌 KBSA 그중에서도 주상훈 감독과 그 라인의 몇몇 사람에 불과했다. 애당초 공정한 조건으로 선출이 된다면 메이저리거인 진호가 빠질 수 없었던 만큼 그들을 치우고, 진호에 관한 약간의 홍보를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문제는 해결됐다.

“······따라서 한국 쪽 시장에 홍보를 통해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수익은, 단순히 그곳에서 발생하는 마케팅 수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장의 구매력이 구단의 수익에도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연봉협상에서도 상당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됩니다.”

단순히 오랜 고객, 아니 이제는 오랜 친구가 되어버린 헨더슨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어쩌면 정말 큰돈으로 변하고 있었다.

***

뉴욕에는 메이저리그보다 더 유명한 메이저리그 팀이 존재했다.

뉴욕 양키스.

야구라는 틀을 넘어 전 세계 야구를 모르는 이들에게까지도 자신의 이름을 떨치는 악의 제국. 양키스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남달랐다. 물론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철저하게 망가졌던 시절의 양키스라면 이런 압박감은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앤디 페티트. 호르헤 포사다, 마리아노 리베라, 그리고 데릭 지터. 일명 코어4

명가의 재건이라는 전설을 시작한 젊은 코어4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야말로 이기기 위해 찾아왔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표정들.

게다가 오늘 선발은 앤디 페티트. 바로 그 코어 4중에 하나였다. 작년 성적 기준 240.1이닝 16승 11패. ERA 2.88 그야말로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투수였다.

“이봐, 루키. 저 녀석은 조심 해야 돼.”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헨더슨이 페티트를 가리키며 경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앤디 페티트는 나와 같은 타자들에게 천적이나 다름없는 투수였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견제의 달인. 셋 포지션 상에서 피칭과 견제를 구분하기 힘든 그 독특한 투구 폼은 수많은 주자를 비명횡사하게 하였다.

[최근 연승가도를 달리며 기세를 올리고 있는 메츠, 그리고 양대리그 가장 높은 승률을 자랑하고 있는 양키스가 만났습니다. 올해의 서브웨이 시리즈 1차전입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막상막하의 승부가 기대되는군요.]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최근 메츠의 기세가 좋긴 합니다만, 지금 양키스는 더 무시무시하거든요. 시즌 72경기를 앞둔 지금까지 무려 52승 19패의 전적입니다. 지금 같아서는 도저히 양키스가 지는 장면은 연상되지 않는군요.]

“그나저나, 이건 조금 너무 한 것 같은데요.”

“뭐가?”

“저기 저거요.”

나의 손가락이 외야 관중석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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