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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27화 (27/210)

# 27화.

타이틀(2)

셰이스타디움의 규모는 5만7천석. 올 시즌 메츠의 평균 관객 수는 2만을 살짝 넘는 수준이었다. 즉 셰이스타디움의 나머지 3만 7천석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핀 스트라이프

하얀 바탕에 검은 세로줄 무늬. 선수의 이름조차 새기지 않는 그 거만한 저지들이 셰이스타디움의 나머지 3만 7천 석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다.

헨더슨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뉴욕이고, 게다가 양키스잖아.”

그의 말처럼 양키 스타디움에서 이곳 셰이 스타디움까지는 지하철로 채 1시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게다가 재작년 우승 이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양키스인 만큼 그 팬들이 무려 3만 명이나 찾아오는 것은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헨더슨씨 양키스에서도 좀 계시지 않았어요? 혹시 막 타석에 나가면 양키스 팬들이 환호해주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글쎄,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워낙 옛날 일이고 이 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키스 성적이 영 안 좋을 때라서 말이지.”

[오늘 메츠의 선발투수는 팀의 에이스인 알 라이터입니다. 87년 양키스에서 데뷔한 이후 꽤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지난 96년 이후로는 확실히 에이스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투수입니다.]

[자, 알 라이터, 와인드업!!]

[몸쪽 낮은 코스!! 척 노블락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중견수 Kang이 무난하게 잡아냅니다.]

어렵지 않은 타구였음에도 마운드의 라이터가 감사를 표해왔다. 현재 우리 팀의 에이스인 알 라이터는 팀에서 가장 예의 바른 선수였는데 외야에서 공을 처리할 때마다 이렇게 일일이 눈을 맞춰주었다.

[자, 타석에 2번 타자 데릭 지터가 들어옵니다.]

이게 홈인지 원정인지 헷갈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박수와 환호가 외야에서 쏟아졌다.

데릭 지터. 1995년 확장 로스터로 데뷔해서 1996년 양키스의 우승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며 신인왕을 차지했던 유격수.

앞으로는 뉴욕의 황제이자 더 캡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바로 그 남자였다.

[데뷔시즌 성적부터가 충격이었던 지터 선수였습니다만 올 시즌은 한층 더 특별합니다. 이번 달 초 부상으로 15일 DL에 올라갔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기가 끝나지 않은 지금 벌써 9개의 홈런을 기록 중이군요.]

하지만 알 라이터 역시 만만한 선수는 아니었다. 선발투수치고 레파토리가 다양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고 93마일의 컷패스트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따악!!

데릭 지터의 배트가 몸쪽 깊숙이 들어오는 알 라이터의 커터를 건드렸다. 3루수 정면으로 가는 땅볼. 지터의 발이 1루를 밟지 못했다.

“아웃!!”

그리고 바로 이어진 3번 타자 폴 오닐 역시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양키스에게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만, 알 라이터 선수, 오늘 공이 아주 좋군요. 몸쪽 커터에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공수교대.

헨더슨이 배트를 들고 타석으로 걸어나갔다.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꼭 들여보내 달라고.”

타석에 선 헨더슨의 자세가 기묘했다. 상체를 깊숙이 숙인 헨더슨 특유의 타격 자세. 물론 스트라이크 존은 일반적인 타격 자세를 기준으로 잡는 것이기는 했지만, 심판도 사람인 만큼 영향을 아예 안 받을 수는 없었다.

[양키스의 선발은 앤디 페티트 선수입니다. 95년 데뷔 이후 지난 3년간 51승을 수확한 양키스의 에이스!! 올해에도 16경기 등판 8승 5패의 좋은 성적을 기록 중입니다.]

[초구 몸쪽 낮은 공. 빠졌습니다. 헨더슨이 잘 참아냅니다.]

[헨더슨 선수, 나이를 먹었어도 선구안만큼은 떨어지지 않았어요. 올 시즌 지금까지 볼넷이 62개로 양대리그를 통틀어 가장 많은 볼넷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전성기 때보다 타율은 상당히 떨어졌습니다만 볼넷 숫자만큼은 전성기에 필적합니다. 눈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2구, 지켜봅니다.]

“스트라잌!!”

[아슬아슬한 코스였는데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오네요. 헨더슨 선수 심판을 빤히 바라봅니다. 이게 어떻게 스트라이크냐 하는 표정이네요.]

[하하, 자신의 존이 맞다 이거죠. 헨더슨다운 어필이었습니다.]

[자, 페티트 3구째. 쳤습니다!! 크게 튕긴 공!! 유격수 데릭 지터 맨손으로 잡아서 1루에. 1루에서!!]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데릭 지터, 데릭 지터!! 대단한 수비입니다. 저 발 빠른 리키 헨더슨 선수를 잡아내네요.]

[괜히 양키스의 10년을 책임질 유격수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그사이 타석에는 요사이 메츠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죠? 2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싱커였지?’

확실히 듣던 것처럼 까다로운 공이었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헨더슨마저도 깜빡 속아 넘어갔으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페티트는 구속이 빠른 투수는 아니었다. 기록상으로는 최대 93마일까지 던진다고 나와 있었지만, 실제 경기에서 그의 포심은 80마일 후반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투수 중 하나였으며 양키스라는 거대한 팀의 에이스였다.

앤디 페티트의 양손이 머리 위로 올라왔다. 2미터에 가까운 키의 좌완 오버쓰로잉. 몸쪽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빠른 공에 나의 배트가 움직였다.

[초구, 몸쪽 낮은 코스!! 쳤습니다!! 빗맞은 타구. 1루 파울라인을 벗어나네요.]

[볼 카운트는 0-1. 아무래도 싱커에 손이 나간 것 같군요.]

‘젠장. 생각보다 변화가 훨씬 심한데.’

마지막 순간 볼 끝의 변화가 생각보다 극심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라인 안쪽으로 들어갔더라면 1루로 살아나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마운드의 투수가 두 번째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같은 코스?’

이번에도 몸쪽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빠른 공. 하지만 마지막 순간 공의 움직임이 달랐다.

부웅

마지막 순간 몸쪽이 아닌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공에 나의 배트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커터? 슬라이더? 슬라이더라기엔 구속이 너무 심하게 빨랐다. 속구에 뒤지지 않는 구속. 커터가 맞을 것이다.

‘이거, 싱커 보고 변화가 심하다고 한 말 취소해야겠는데. 진짜 터무니없는 공이네.’

공의 변화를 눈치챈 순간 최선을 다해 손목을 틀었지만 부족했다. 기본적으로 커터는 변화구가 아닌 속구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만큼 그 변화가 그리 큰 공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볼카운트 0-2. 앤디 페티트가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0-2라는 극히 불리한 볼카운트. 유인구가 나올 확률이 높았지만, 공 하나면 아웃이 되는 상황에서 그런 안이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코스로 들어온다면 무조건 배트를 휘둘러야 한다.

중앙으로 몰린 높은 공. 공을 던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커브다.’

미리 구질을 안다고 해도 치기 까다로운 12 to 6 커브였다. 강하게 후려 친다기 보다 어떻게든 공을 때려낸다는 느낌으로 휘두른 배트에 페티트의 공이 걸려들었다.

따악!!

타석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내야를 강하게 두들긴 공이 높이 떠올랐다. 직전 타석, 헨더슨이 아웃됐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타구. 나의 몸이 1루를 향해 질주했다.

[3루 스콧 브로시우스, 그대로 공을 잡아 1루로!! 1루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메츠의 Kang이 조금 더 빨랐습니다.]

[조금 전 헨더슨 선수가 아웃됐던 타구와 아주 흡사한 타구였는데 Kang은 살아나갔네요.]

[그야 브로시우스 선수의 수비도 나쁘진 않았습니다만······. 조금 전 지터 선수가 보여준 베어 핸드 수비는 정말 전 경기를 통틀어 일주일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비였거든요.]

[그렇군요.]

[게다가 조금 전 타구는 설사 베어핸드로 잡아서 바로 던진다고 해도 세이프가 됐을 확률이 높았어요. 타구 자체도 헨더슨 선수의 타구보다 3루 쪽으로 많이 치우쳤고, Kang의 경우 좌타자라서 헨더슨 선수보다 1루까지 도착하는데 많이 유리합니다.]

‘운이 좋았어.’

1루 코치에게 장비를 건넸다. 뜻밖의 내야안타를 허용했음에도 패티트의 무뚝뚝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세 걸음 반. 그리고 무게 중심은 1루 쪽으로. 뛰어난 견제 솜씨로 소문 난 페티트가 마운드에 서 있는 만큼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부웅!!

3번 타자인 버나드가 헛스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페티트의 셋업 모션은 간결했고 그만큼 도루 타이밍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볼카운트 0-1.

세 걸음 반. 깊숙하게 숙인 자세 그대로 페티트의 피칭을 노려보았다.

2구째 세트 모션. 축이 되는 왼발은 투수판을 밟고 있었다. 깊게 숙인 고개, 높게 들린 오른 다리. 조금 전 버나드에게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던 모션과 완벽하게 동일한 모션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나를 자극했다. 그것은 등골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불길함이었다.

‘견제?’

아무런 근거는 없었다. 만약 견제구가 아니고, 버나드가 이번 공을 쳐 낸다면 나의 이 선택은 두고두고 기록에 남을 멍청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1루로 향하는 나의 슬라이딩에 망설임은 담겨있지 않았다.

“세이프!!!”

간발의 차이였다. 나의 왼손이 1루 베이스를 짚자마자, 패티트의 공이 1루수의 미트에 꽂혔다. 그 자신감 넘치는 헨더슨이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해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페티트의 세트 모션은 공을 던지기 직전까지 그것이 투구인지 견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 정말 메이저리그는 메이저리그라 이거네. 어떻게 사흘 건너 한 번씩 괴물이냐.’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시점에서 나에게 가장 경쟁력 있는 능력은 주루였다. 물론 수비 역시 훌륭하긴 했지만 1998년의 야구에서 수비는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힘들었다. 물론 FPct나 RF, ZR 등의 기준이 있긴 했지만, 너무 빈약했다. 최소 2002년의 UZR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비는 그저 보조적인 임팩트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타격 역시 지금 당장은 매우 훌륭한 성적을 보여주고 있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행운이 따른 결과였다. 언제까지 타구의 5할 이상이 안타가 될 수는 없었다.

‘메이저를 통틀어서 다섯 손가락.’

누군가는 과도한 자신감이라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보수적으로 본다고 해도 나의 주루 능력은 메이저 전체를 통틀어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했다. 그리고 그것은 저 리키 헨더슨조차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뭐 얼추 내 전성기의 절반 정도는 되는 것 같네.”

“고작 절반이요?”

“그 정도면 잘 쳐준 거지. 솔직히 내 전성기의 절반이면 지금 빅리그에선 나를 빼고 1, 2위를 다툴만한 능력이야. 하, 네가 진짜 전성기에 내 주루를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그거 헨더슨씨가 지난 주에 2시간짜리 하이라이트 필름 억지로 보여줘서 봤잖아요.”

“영상이랑 실제랑은 또 달라요.”

자칭, 그리고 타칭 메이저 최고의 리드 오프이자, 실시간으로 메이저 최다도루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전설. 리키 헨더슨의 평가였다.

하지만 고작 세 걸음. 페티트를 상대로 나는 세 걸음 이상을 나갈 수 없었다.

좌완투수인 페티트의 시선이 나를 스쳤다. 마운드를 지배하는 무뚝뚝한 얼굴의 괴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박력. 여기서 한 걸음만 더 2루 쪽으로 나가도 위험할 것 같다는 예감이 나를 지배했다.

부웅!!

[페티트, 4구째!! 스윙 삼진. 버나드 길키 선수 페티트 선수의 커브에 배트가 헛돌아갔습니다.]

[2아웃 주자 1루 상황. 타석에는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들어옵니다.]

[지금 루상에 나가 있는 Kang이 굉장히 빠른 선수거든요. 큼지막한 2루타 한 방이면 단번에 득점도 가능합니다.]

[자 페티트 초구!!]

따악!!

[쳤습니다!! 마이크 피아자 큼지막한 타구!! 아, 하지만 코스가 좋지 못하네요. 미리 대기하던 우익수 채드 커티스 선수가 공을 잡아내며 이닝 종료됩니다. 잔루는 1루. 앤디 페티트가 버나드 길키를 삼진, 마이크 피아자를 외야 플라이로 처리했습니다.]

‘젠장.’

분명 안타를 치고 루상에 나갔음에도 기분이 더러웠다. 물론 도루란 그저 보너스일 뿐, 출루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나는 나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완벽하게 봉쇄되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어떻게 본다면 쓸데없는 자존심일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젠장!! 내가 6개월만 젊었더라도!!”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그렇게 불쾌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공수교대를 위해 글러브를 챙겨 드는 사이에도 헨더슨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 녀석 어땠어? 내 말대로 만만치 않았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거기다가 좌완이라 그런지 더 힘드네요”

“뭐, 아직 네 수준에서는 좀 그렇지.”

“수준이요?”

약간의 장난을 담은 반문.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본인은 아웃이 되고 나는 출루를 했다는 것이 마음에 남았는지 헨더슨의 반응이 날카로웠다.

“이게, 나보다 운이 조금 좋아서 나간 주제에, 내가 수준이 뭔지 다음 타석에서 보여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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