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타이틀(3)
경기가 이어졌다. 우리 팀의 에이스인 알 라이터의 커터가 양키스의 타자들을 윽박질렀다. 내야 땅볼, 팝플라이, 그리고 삼진. 호르헤 포사다부터 버니 윌리엄스까지, 양키스의 쟁쟁한 타자들이 1루도 채 밟지 못한 채 물러났다. 연이은 삼자범퇴.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알 라이터의 표정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페티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알 라이터처럼 95마일에 가까운 강속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커터, 싱커, 투심, 포심의 다양한 패스트볼과 종종 튀어나오는 강력한 12 to 6 커브가 타자들을 농락했다.
그리하여 3회 말 2아웃 주자 없는 상황. 헨더슨의 타석이 돌아왔다.
“기대하라고.”
첫 타석에서 아웃당한 이후 세월의 야속함을 이야기하던 헨더슨이 단단한 모습으로 타석에 나갔다. 상체를 바싹 숙인 채 공을 기다리는 헨더슨.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의 페티트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3회 말.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메츠의 두 번째 타순이 돌아왔습니다.]
[리키 헨더슨 선수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페티트 초구 바깥쪽 낮은 코스, 헨더슨이 잘 골라냅니다.]
상당히 긴 싸움이 이어졌다. 볼, 파울, 스트라이크, 볼, 파울, 그리고 볼. 3분이 넘는 싸움 끝에 헨더슨이 1루로 걸어갔다.
[시즌 53호 볼넷으로 리키 헨더슨 선수가 출루에 성공합니다, 이 선수 올 시즌 지금까지 타율이 0.239인데 출루율은 0.359이나 되는군요.]
[아무래도 타율과 출루율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역시 볼넷 개수겠죠? 이 정도면 거의 매 경기 볼넷으로 출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1루의 헨더슨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수준이 뭔지 보여준다는 것이 볼넷이라는 것은 조금 그랬지만 39살의 타자가 아직까지도 메이저 최고 수준의 투수를 상대로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판이었다.
[투수. 세트 포지션, 1루 견제!! 세이프.]
[벌써 두 개째 견제구입니다.]
[커리어 통합 1,263도루를 기록 중인 리키 헨더슨입니다. 게다가 39살이라고는 하지만 이번 시즌도 여전히 양대리그에서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 중이에요. 투수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아무리 헨더슨 선수라고 해도 견제의 달인 페티트 선수를 상대로는 뛰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자, 투수 초구!! 어?]
페티트의 공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그 순간, 헨더슨의 몸이 번개처럼 2루로 쏘아졌다. 그야말로 투수의 호흡을 완벽하게 빼앗는 도루 타이밍. 서둘러 공을 받은 호르헤 포사다가 2루로 공을 뿌렸지만 헨더슨의 오른손이 2루 베이스를 훔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이프!!”
[도루 성공. 리키 헨더슨이 시즌 33번째, 커리어 1264번째 도루를 양키스의 앤디 페티트를 상대로 성공시킵니다.]
가슴팍의 흙을 털어내는 헨더슨의 표정이 환했다. 귓가에 ‘내가 수준이 뭔지 보여준다고 했지? 넌 못했던 도루. 난 성공했다’라고 우쭐거리는 헨더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하, 이건 정말이지.’
매일같이 나와 함께 웃고 떠들며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저 영감님이 진짜 메이저리그의 전설 리키 헨더슨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훅하고 다가왔다. 그 와중에 3루 베이스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헨더슨을 보고 있자니 1회 초 페티트에게 느꼈던 압박감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어깨를 딱딱하게 만들던 긴장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마운드의 투수는 더이상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핀 스트라이프를 걸친 건방진 한 명의 양키에 불과했다.
[2구째, 바깥쪽 낮은 공. 참아냅니다. 볼카운트 1-1.]
[방금은 제구가 제대로 안 된 것 같았죠? 조금 멀리 빠졌습니다.]
[자 3구. 이번에도 역시 낮은 코스. 아, 볼이네요. 이건 잡아줄 법도 했는데,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운이 좋았다. 조금 전 공은 사실 스트라이크를 줘도 크게 할 말이 없는 공이었다. 다만 쳐낸다고 해도 제대로 된 타구가 나올 확률이 낮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참았는데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제 볼카운트는 2-1.
나의 뒤로 줄줄이 장타력이 있는 타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만큼 비어있는 1루에 굳이 나를 채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후속 타자들에 비해 장타력이 부족한 나를 땅볼로 잡아내기 위해 적극적인 승부를 걸어올 확률이 높았다.
4구.
‘커터!!’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39살의 늙은 주자에게 도루를 허용한 지금의 페티트라면, 2개의 카운트를 그냥 헌납한 페티트라면 자기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예감이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커터의 라인을 따라 배트를 움직였다. 물론 페티트의 커터가 항상 같은 변화를 보이는 것이 아닌 만큼 무조건 이 코스로 공이 들어올 리는 없었다. 다만 그 근처에라도 공이 온다면 배트 컨트롤을 통해 충분히 공을 쳐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정도는 가능했다.
‘어?’
그리고 만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4구, 바깥쪽 높은 코스!! 쳤습니다!!]
단지 예감을 기반으로 한 예측에 불과했다. 아마 확률로 환산한다면 수백분의 일, 어쩌면 수천분의 일까지 떨어질지도 몰랐다. 페티트의 커터가 그림처럼 나의 예측 경로로 휘어 들어왔다.
[우중간으로 향하는 강한 타구!! 넘어가나요? 넘어가나요? 넘어갔습니다!!]
[3회 말. 2아웃 0:0 상황. 메츠의 Kang이 팽팽하던 균형추를 깨고 2점 홈런을 기록합니다.]
[커리어 5호 홈런이죠? 볼티모어와의 지지난 경기에서 멀티 홈런 이후 불과 이틀, 두 경기만의 홈런포입니다.]
[마이너에 있을 당시, 수비, 주루 쪽 실링으로 크게 주목받던 유망주인데 지금으로 봤을 땐 타격 쪽 포텐셜도 만만치가 않아 보이는군요.]
홈경기 첫 홈런이었다. 원정에선 받아 보지 못했던 거대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1루를 지나 2루로 향하는 사이 중앙펜스 뒤편 거대한 중절모(Mets Magic Top Hat) 속에서 홈팀의 타자가 홈런을 쳤을 때만 튀어나오는 셰이 스타디움의 명물 빅 애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이번 주에는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멀티히트, 그리고 홈런까지. 지난주보다 오히려 더 나은 성적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주 일정은 오늘로 끝이었고, 오늘의 홈런을 제외해도 나의 이번 주 성적은 내셔널리그를 통틀어 발군이라고 할 만했다. 경쟁자라고 해봐야 맥과이어 정도였는데 타율과 출루율에서 내가 앞서고 있었고, 오늘 홈런으로 홈런 개수까지도 내가 앞섰다. 지난주 새미 소사가 보여준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활약만 나오지 않는다면 ‘이주의 선수’는 이대로 나의 것이 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이주의 선수’가 아주 대단한 타이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수도 없는 것이 Player of the Game과 다르게 사무국에서 수여하는 공신력 있는 타이틀 중 하나였고, MLB.com이나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com 등에도 수상실적으로 기록되는 타이틀이었다. 지금 당장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저 헨더슨조차도 20년 동안 5번밖에 받아 보지 못한 타이틀인 것이다.
덕아웃의 많은 선수가 나를 가볍게 두들기며 환영했다. 다만 팀의 성적보다 자신의 활약을 더 중요시하는 헨더슨은 자신의 멋진 도루가 별 의미 없는 퍼포먼스가 됐다는 사실에 살짝 삐진 눈치였다.
“헨더슨 씨 도루 멋졌어요.”
“어차피 후속 타자가 홈런을 쳤는데, 별 의미도 없는 도루였지 뭐.”
“의미 없기는요. 헨더슨 씨 도루 덕분에 투수가 얼마나 흔들렸는데요.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전 그 동작을 아무리 봐도 던지기 직전까지 견제인지, 투구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던데. 게다가 좌완투수라서 끝까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긴장도 되고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금방 가라앉긴 했지만 실제로 2구째에는 흔들린 기색이 역력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나의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헨더슨의 표정이 금새 풀어졌다.
“좌완투수? 너도 어차피 평소에 좌완이건 우완이건 별 구분 없이 도루 잘하잖아.”
“에이, 그럴 리가요. 평소에도 좌완이면 좀 껄끄러워요. 게다가 저 이전에 도루 실패한 것도 좌완투수였잖아요.”
실제로 좌완투수의 경우 투구 동작 직전까지 1루를 바라볼 수 있는 만큼 우완보다 도루하는 것이 훨씬 껄끄러웠다. 게다가 견제구를 던지는 동작 역시 양쪽 발이 모두 1루를 향해야 한다는 보크 규정에 따라 몸을 180도 돌려서 던져야 하는 우완투수에 비해 그대로 오른발만 내디디고 견제구를 던질 수 있는 좌완투수 쪽이 훨씬 간결했다.
“확실히 좌완 쪽이 끝까지 나를 쳐다보니까 좀 껄끄러울 수 있지. 근데 그럴 땐 눈빛으로 빡!! 제압하는 거지.”
“아아, 네. 그렇군요. 눈빛으로 빡, 제압하는 거군요. 그런 좋은 방법을 알려주시다니 앞으로 두고두고 잘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헨더슨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나라고 해도 이건 들어주기 힘들었다. 아니 무슨 야구가 눈싸움도 아니고 눈빛으로 제압하라니. 나의 영혼 없는 대꾸에 헨더슨의 얼굴에 당황이 드러났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아, 우리 공격 끝났네요. 또 한 번, 잘 막아보죠.”
“진짜 눈으로 보면 대충 어떤지 감이 온다니까? 진짜라고.”
헨더슨의 이야기에 대충 대꾸하며 그라운드로 걸어나갔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종종 논리가 아닌 직감의 영역에서 플레이를 결정짓곤 했으니 말이다.
‘결국, 경험인가?’
물론 논리가 아닌 직감이라고 해서 단순히 때려 맞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투수의 위화감을 느끼는 직감이란 결국 경험의 다른 이름이었다. 현재 헨더슨이 기록한 도루의 숫자는 무려 1,263개. 메이저 역사상 헨더슨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도루가 루 브록의 938개였으니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2점을 등에 업은 알 라이터의 공은 매서웠다. 2번째 타순, 그리고 3번째 타순이 지날 때까지 몇 번의 출루만을 허용했을 뿐, 양키스의 타자들은 점수를 뽑아내지 못했다.
2:0 완봉승.
9회 초, 마운드의 알 라이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야, 너 진짜 상 하나 타겠는데?”
“데뷔하고 두 달 만에 타이틀이라니 미리 축하한다.”
“에이, 아직 다른 팀 경기도 많이 남았는데요. 뭐.”
라커룸에서 많은 동료가 나에게 건네는 축하에 겸손하게 답하기는 했지만 내심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7경기 29타수 12안타에 2루타 하나 홈런 세 개로 슬래시 라인이 무려 0.414/0.433/0.759라는 터무니없는 성적은 지난주 소사가 기록한 0.433/0.452/1.333이라는 성적엔 미치지 못하더라도 분명 대단한 성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핸드폰을 확인하던 팀의 주전 2루수 카를로스가 나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야 잠깐만, 루키 너 이번 경기 전에 맥과이어랑 홈런 2개로 동률이었지?”
“네. 그런데요?”
덮쳐오는 불안감. 언제나 그렇듯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말없이 TV 채널을 돌렸다.
따악!!
그곳에는 새미 소사와 함께 올해 홈런왕을 다투는 마크 맥과이어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대 미네소타전 2차전. 마크 맥과이어 시즌 35, 36, 37호 멀티 홈런 기록!!]
“하하하······.”
“그, 그래도 루키 네가 타율이랑 출루율은 훨씬 괜찮지 않나?”
산 넘어 산이라더니. 지난주 약쟁이에 이어 또다시 약쟁이가 막판 몰아치기를 시전 했다.
***
결국, 6월 넷째 주 ‘이주의 선수’ 타이틀은 마크 맥과이어에게 넘어갔다. 장타율이 1을 넘어 1.1에 육박하는 데에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7월 초. 오래간만에 프레스톤에게서 전화가 왔다.
“짜식, 먼저 메이저 올라가더니만 거기 물이 좋긴 좋나 보다. 결국, 한 건 해냈네. 축하한다.”
“물이 좋기는. 그냥 실력이지. 프레스톤 너야말로 언제까지 빌빌거릴 생각이야. 빨리 올라와야지.”
“빌빌거리다니. 나도 엄청 날아다니고 있거든? 그냥 자리가 없어서 기회를 못 받는 거뿐이야. 내가 9월 확장 때 올라가서 아주 메이저를 폭격해줄테니 기대하라고. 어쩌면 내년에 내가 메이저에서 시작하고 넌 노포크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글쎄다. 절대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와, 여유 부리는 것 좀 보게. 타이틀 하나 땄다 이거지?”
“에이, ‘이달의 선수’가 뭐 대단한 상이라고 여유는. 그래도 신인왕 정도는 따야 타이틀 하나 땄다고 여유 부리지 않겠어?”
6월 Player of the Month, 뉴욕 메츠. Jin-ho Kang.
97타석, 88타수, 34안타(2루타 6개 홈런 5개), 5볼넷, 1사구, 1 희생 번트, 2 희생 플라이.
0.386/0.421/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