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전설과의 만남(2)
-마이크 피아자 ‘나를 트레이드 시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이봐, Kang. 잠깐 나 좀 보자고.”
사실 비슷한 시기에 트레이드로 팀에 합류했음에도 헨더슨과 달리 피아자는 나와 별다른 친분이 없었다.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 정도랄까? 그런 만큼 피아자의 부름은 뜻밖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내일 경기 대비해서 약간의 연습을 할 생각인데 함께 가자고.”
당황스러운 권유였다. 당장 내일이 시합인 상황에서 갑자기 연습이라니. 무슨 중, 고등학교 시험도 아니고 야구 경기, 그것도 메이저리그 경기에 벼락치기가 통할 리 만무했다.
“아뇨,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로 휴식일 없이 경기를 뛰었더니 좀 피곤해서요. 간만의 휴식일인데 푹 쉬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러지 말고 함께 가자니까. 장담하는데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재차 권유하는 피아자에게 다시 한번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려는 찰나 문득 그가 지난 5년간 다저스 투수들의 공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아, 설마 내일 선발로 나올 찬화 선배 공략법이라도 있는 건가? 근데 그런 거라면 팀 전체한테 알리던지 그것도 아니면 버나드나 에드가르도처럼 친한 사람한테나 알려줘야지 왜 하필 나에게?’
“대체 무슨 연습인데요.”
“타격 연습.”
“그러니까 무슨 타격 연습이요. 당장 내일이 시합인데 지금 배트 좀 휘두른다고 뭐 달라지겠어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근데 장담하는데 절대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나도 이런 거 아무에게나 권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만만한 피아자의 이야기. 상식적으로라면 무시하고 이대로 푹 쉬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불쑥 생겨난 호기심은 피아자의 권유를 받아들이라고 속삭였다.
“후, 알겠습니다. 뭐 속는 셈 치고 한번 가보죠.”
대체 언제 준비해둔 것인지 호텔 앞에는 차량까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차를 타고 약 20분 정도 이동했을까? 제법 커다란 실내 체육관 앞에 자동차가 멈춰섰다.
“여기야.”
차에서 내린 피아자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그리고 그곳에 타격의 신이 있었다.
“테, 테드 윌리엄스?”
넓은 체육관 안, 그곳에는 바로 그 테드 윌리엄스가 방망이를 짚고 서 있었다.
메이저 올타임 기준 타율 7위(0.344) 출루율 1위(0.482) 장타율 2위(0.634). 그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한 사람은 모두 1920년대 이전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선수들뿐이었고 그보다 높은 장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바로 그 ‘야구의 신’뿐이었다.
“나를 아나 보군.”
“네, 넵!!”
“그나저나 한국 출신이더군. 허허, 참, 그 잿더미 같던 나라에서 설마 메이저리거를 배출할 줄이야.”
테드의 눈빛이 아련했다. 그리고 나의 정신은 혼미했다. 테드 윌리엄스라니. 물론 단순히 그가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타자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놀라기에 그가 뛰었던 1940년대는 나에게 너무 먼 옛날이었다.
“한국을 아십니까?”
“그럼, 잘 알지. 52년 4월 30일이었어. 디지 트라웃이 던진 몸쪽 낮은 볼을 펜웨이파크 우측 담장으로 넘기고, 바로 한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었지. 솔직히 말해서 난 그 나라가 평생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자네나, 다저스에서 뛴다는 그 친구를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
아, 듣고보니 이제야 생각이 났다. 테드 윌리엄스가 그 대단한 비율스탯에도 불구하고 2,654안타와 521홈런에 그친 것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타자로서 가장 활발한 시기의 5년을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덕분이었다.
“네, 아마 다시 또 가보신다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곳 LA에 못지않은 마천루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허, 거 놀랍구만. 하긴, 그때도 사람들만큼은 대단했어. 그 잿더미 속에서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 학교였으니 말이야.”
한국이 발전했다는 이야기에 눈을 똥그랗게 뜬 테드가 자신의 군대 시절 이야기들을 신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국전쟁, 그리고 1950년대에 대해선 거의 몰랐다. 애당초 학교 다닐 때도 야구만 했을 뿐 수업이라곤 제대로 들은 기억이 없었고 그런 역사에 관한 관심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다행히 그런 테드의 이야기를 옆에 서 있던 피아자가 적절히 끊어주었다.
“저기, 선생님?”
“아, 아. 참. 그래. 모처럼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놨구만. 일단 이리 와서 방망이 좀 들어보게. 영상으로 미리 확인하고 오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봐야지.”
테드가 방망이를 내밀었다.
‘맙소사, 뭐 체육관에 있는걸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진짜 나에게 레슨을 해주는 거구나.’
마지막 4할 타자라는 말이 증명하듯 테드 윌리엄스는 천재였다. 심지어 단순히 타율만 높은 똑딱이가 아닌 그 ‘야구의 신’을 제외한다면 가장 멀리 공을 보낸 타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위대한 기록이 오직 그의 번뜩이는 천재성에서만 비롯된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감각적인 천재성만을 따진다면 동시기 카디널스의 전설적인 타자 스탠 뮤지얼 쪽이 더 뛰어났다.
‘내가 어떻게 공을 잘 치냐고? 글쎄, 딱히 고민해 본 적은 없는데. 그냥 나는 원래 공을 잘 맞히는 사람이야.’
반면 테드 윌리엄스는 항상 고민하고 연구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스포츠는 야구공을 때리는 일이다.’라는 명제하에 그는 그 ‘야구공을 때리는 일’을 잘하기 위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들을 연구했고, 마침내 1970년 ‘타격의 과학(The Science of Hitting)’이라는 야구계의 영원한 명작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그랬다. 그는 선수로서 위대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선생으로서도 위대했다.
“음······.”
“뭐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나의 폼을 지켜본 테드가 작게 신음했다.
“아니야. 간결하고 아름다운 폼이네. 애당초 메이저에서 3할을 치는 타자의 폼을 멋대로 손댈 수는 없지. 다만 혹시 아는지 모르겠네만 나는 웨이트 시프트 시스템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뭐 타자마다 자신에게 맞는 폼이란 게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유명한 이야기였다. 로테이셔널 히팅 시스템을 주장하는 타격의 과학과 웨이트 시프트 시스템을 주장하는 3할의 예술(The art of hitting .300)은 70년대 이후 꾸준히 부딪혀왔다. 본래라면 조금 더 강경하게 로테이셔널 히팅 시스템을 주장해야 할 테드였지만 60년대 웨이트 시프트 시스템의 이론에 입각했던 행크 아론의 활약을 지켜봤던 만큼 어느 정도 그것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메이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아무래도 제 빠른 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아시다시피 타구질보다는 내야 땅볼이라도 최대한 많이 생산하는 쪽이 저에게 더 유리한지라 일단은 별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호, 자네, 생각보다 타격에 대해서 많이 아는군.”
“네. 타격의 절반은 머리로 하는 거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 지금은 도입되지 않은 여러 측정 장비들의 발달은 타격의 과학과 3할의 예술에서 연역의 영역으로 다투던 논리들을 귀납적인 방법으로 결론지어 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 60년 가까이 수많은 타자를 지켜보고, 연구해온 사람의 조언은 소중했다.
“흐흐, 이 친구 제법 마음에 드는 친구로구만. 그래 맞아. 타격의 절반은 여기로 하는 거지.”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기며 테드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 어쨌든 타격을 공부했다면 생각보다 이야기하기 쉽겠구만.”
.
.
.
***
“야, 야. 인마 일어나!!”
“아, 왜 꼭두새벽부터 왜 깨우고 지랄이야.”
“꼭두 새벽은 무슨!! 지금 벌써 11시다 인간아, 네가 오늘 박찬화랑 강진호 붙는 거 본다고 깨워 달라며.”
“벌써?”
[시청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저스 대 메츠. 박찬화 대 강진호. 대한민국이 낳은 위대한 야구영웅들의 맞대결이 오늘 이곳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이제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긴장되는 순간이로군요.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박찬화 선수 같은 경우 94년 메이저에서 처음 공을 던진 이후, 96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을 시작했는데요. 올 시즌 다저스의 실질적인 1선발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대하는 강진호 선수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비록 올 5월에 갓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신인이기는 합니다만 데뷔 두 달 만에 내셔널리그 이달의 선수를 수상하며 전미를 들썩이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마운드에 우리 박찬화 선수가 올라오는군요.]
[오늘 경기 같은 경우 LA다저스의 홈경기인 만큼 선공은 멀리서 찾아온 강진호의 뉴욕 메츠부터 시작될 예정입니다. 오늘 강진호 선수의 타순은 2번이군요.]
[어? 2번 타자라면 작전형 타자 아닌가요?]
[하하, 그게 한국에서야 2번 타자라고 하면 공을 좀 못 치는 작전형 타자라는 인식이 강합니다만, 최근 메이저리그의 분위기는 조금 다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메이저리그라는 곳이 힘의 야구거든요. 2번 타자도 번트를 대기보다는 강공을 주로 하고, 특히 메츠의 경우 1번 타자인 리키 헨더슨의 출루와 도루,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강진호 선수의 안타가 주요 득점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타석에 리키 헨더슨 선수가 들어오는군요.]
[지금 타석에 들어오는 리키 헨더슨 선수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자면 42살의 베테랑으로 젊었을 적에는 이정범 선수처럼 타격도 좋고 홈런도 많이 치고 발도 빠른 그런 선수였습니다만 나이를 먹은 지금은 주로 볼넷으로 출루해서 도루를 기록하는 그런 타입의 타자입니다.]
“와, 저긴 평일에 야구 경기하는데 사람이 저렇게 바글바글해?”
“미국이잖아. 우리나라보다 사람이 몇 배 많으니까 그렇겠지.”
“그런가? 근데 넌 오늘 경기 누가 이겼으면 좋겠냐?”
“그야 당연히 다저스지. 박찬화 선수 이번 달에만 4승째야. 오늘 이기면 시즌 10승째인데, 잘하면 올해엔 20승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더라. 뭐 거기까진 못하더라도 어쨌든 노모 그놈의 16승 기록은 깨야지.”
“하긴, 그럼 나도 오늘은 다저스 응원할란다. 뭐 경기는 다저스가 이기고, 강진호도 안타 좀 기록하면 딱 좋겠네.”
***
뻐엉!!
어마어마한 포구음이 그라운드를 울렸다. 그리고 그것은 대기타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나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스트라잌!!”
타석의 헨더슨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찬화 선배 같은 타입의 선수는 헨더슨에게 쉽다면 한없이 쉽고, 어렵다면 한없이 어려울 수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너무 명백하게 후자 쪽이었다.
‘이번 달 기세가 범상치 않다고 하더니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데?’
투구추적시스템이 아직 개발조차 되지 않은 지금, 스피드 건으로나마 측정한 구속을 전광판에 띄워주는 구장은 많지 않았다. 우리 메츠의 홈구장인 셰어 스타디움 역시 구속을 전광판에 표시하지 않았는데, 신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인 LA 다저스답게 다저 스타디움의 전광판에는 지금 찬화 선배의 구속이 재깍재깍 올라오고 있었다.
96마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