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전설과의 만남(3)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숫자였다. 아무리 강속구로 유명한 투수라지만 1회 초 선두타자를 상대로 96마일이라니. 만 39세, 타자로서 거의 환갑이나 다름없는 헨더슨에게는 너무 가혹한 공이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찬화선배는 마치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존의 구석구석 절묘한 공간으로 공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경기 전 라커룸에서 피아자가 찬화 선배에 대해 선수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Park은 진짜 무서운 투수야. 그 녀석의 속구는 젊은 시절의 로켓이나 빅유닛이랑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극찬 중의 극찬이었다. ‘클레멘스의 주 무기는 빠른 공, 더 빠른 공, 그보다 더 빠른 공이다.’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젊은 시절 로켓은 불꽃 같은 포심 하나로 리그를 평정했던 전설이었다. 또한, 현재 시점에서 빅유닛 역시 포심과 슬라이더 투 피치로 리그를 평정하고 있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물론 전성기 찬화 선배의 속구가 대단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로켓과 빅유닛이라니, 저건 허풍이 좀 많이 섞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3루수인 에드가르도 녀석이 피아자에게 되물었다.
“허, 로켓이랑 빅유닛이라니, 너무 과장하시는 거 아닙니까? 솔직히 Park의 성적이 괜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리그 최고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포심 만큼은 분명 그 두명에게 필적한다고 본다. 다만 그 둘에 비해서 약점이 조금 뚜렷하지.”
“약점이요?”
문득 이 시기 찬화 선배가 볼넷이 많은 투수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약점이라면 역시 컨트롤인가요?”
“글쎄, 솔직히 말해서 Park만한 공을 던지는 투수가 그 정도 컨트롤이면 나쁜 건 아니지.”
“그렇다고 보기에 올 해 벌써 볼넷이 46개로 2이닝당 1개가 넘는걸요.”
“그 녀석 볼넷은 컨트롤의 문제가 아니야. 그보다 커맨드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게 문제지.”
“커맨드에 신경 쓰는 게 문제라고요? 그게 어떻게 문제가 되죠?”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심하던 피아자가 답했다.
“로켓의 포심을 가진 투수가 마스터처럼 던지려고 한다고 이야기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라커룸의 절반 정도는 피아자의 말을 이해한 것 같은 표정을, 나머지 절반은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냥 중앙에 뻥뻥 던져넣어도 상관없는 공을 가진 투수가, 충분히 그렇게 던질만한 컨트롤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굳이 아슬아슬한 코스로 공을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말이야.”
“아!! 그렇다면!!”
“그래, 그냥 꾹 참다 보면 그냥 좋은 카운트가 될 확률이 높아. 그리고 나면 결국 볼넷을 허용하던지, 아니면 좋은 코스로 공을 욱여넣겠지. 물론 그렇게 욱여넣는 공을 치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굳이 안좋은 코스로 오는 공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라커룸의 멍청한 나머지 절반도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Park도 메이저에서 구를 만큼 굴렀는데 자기가 그런 선수인 걸 잘 알면서 왜 그렇게 커맨드를 신경 쓰는 건가요?”
배커의 질문에 피아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게, 그 녀석이 가끔이기는 한데 말이지······, 로켓의 포심을 마스터처럼 던지는 날이 있어.”
“······.”
잠깐의 정적. 배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런 날이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거야······.”
***
[Park!! 대단합니다!! 97마일의 빠른 공!! 저런 공이 저런 코스로 날아오는 데, 타자로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겁니다.]
5구째 헨더슨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잌!!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삼진입니다. 메츠의 1번 타자 리키 헨더슨이 스윙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싱커였나요? 공의 변화가 굉장해 보였는데요.]
[글쎄요, 싱커를 던진 다는 자료는 없습니다만, 아, 유망주시절 스카우트 리포트 중에 포심 패스트볼이 간간이 싱킹 무브먼트를 보인다는 말이 있군요.]
[허, 그러면 지금 저 공이 포심이었다는 말이로군요.]
[타자로선 정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공입니다.]
뿔이 난 표정의 헨더슨이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기선을 제압하려는 것이었을까? 타석에 들어섰을 때 나를 바라보는 찬화 선배의 표정이 사나웠다. 하지만 그 사나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당하기는커녕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뽀송뽀송하네.’
마운드에 선 찬화 선배의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장발에 수염이 성성한 모습이 아닌 단정한 머리에 맨들맨들한 피부를 자랑하는 20대 청년의 얼굴이었다. 덕분에 제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본다고 한들 위압감은커녕 그저 ‘찬화 선배도 아직 어리구나.’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뻐엉!!
하지만 유감스럽게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공은 그 모습과 달리 폭발적인 위압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몸쪽 낮은 코스로 절묘하게 꽂혀 들어오는 96마일의 빠른 공. 반쯤 돌아간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빠졌겠지?’
나의 기준으로는 존에서 살짝 빠진 공이었다. 하지만 심판의 판단은 달랐다.
“스트라잌!!”
최악이었다. 지금 찬화 선배의 컨디션에 이런 공을 잡아주는 주심까지 더해진다면 이건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역시 이대로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마운드의 찬화 선배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난 헨더슨이 아니야!!’
39살, 순발력과 근력이 모두 떨어진 리키 헨더슨이라면 단순히 빠른 공만으로 제압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물론 이렇게 지저분한 볼 끝과 훌륭한 커맨드의 포심은 흔치 않았지만 그래도 90마일 중반대의 빠른 공이라면 마이너에서 충분하게 경험해 본 구속이었다. 나의 배트가 세차게 움직였다.
‘몸쪽 높은 볼!!’
손바닥이 욱신했다. 빠른 공의 위력이 가장 극대화 되는 몸쪽 높은 코스. 게다가 구속 역시 종전보다 1마일이 더 빨라진 97마일이었다. 나의 배트 스윙이 약간 늦었다. 억지로 밀려 친 타구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3루쪽 내야 관중석 깊숙한 곳으로 떨어지는 공.
물론 단순히 스윙이 약간 늦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윗 스팟에서 크게 벗어난 곳으로 공을 친 탓에 팔이 제대로 끝까지 뻗지 못했다.
어느새 볼카운트는 0-2. 나의 입가가 바싹 말라왔다.
‘젠장, 아직 몸에 완전히 익지도 않은 걸 벌써 써먹고 싶지는 않았는데.’
타석에서 잠시 나와 허공에 배트를 휘둘렀다. 테드가 코치해준 바로 그 자세였다.
***
“그래, 테이크 백을 그렇게 하고 팔로 스윙을 그렇게. 옳지. 좋았어.”
전격적으로 타격 자세를 수정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시즌 중에 벼락치기로 완벽하게 다른 타격 자세를, 그것도 전혀 생소한 형태로 수정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음······.”
나의 타격 자세를 건드리던 테드가 잠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자네 혹시 타격 자세를 이미 건드리고 있었나?”
“······.”
“지금 자세 자체는 크게 손본 게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메커니즘적으로는 상당히 달라진 셈인데, 너무 쉽게 적응하는군.”
“사실 이전부터 준비하던 게 조금 있습니다.”
“그래? 혹시 괜찮다면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전생에서 부상을 입은 후, 그리고 돌아와서 몸을 급하게 불린 이후 사용했던 전형적인 형태의 로테이셔널 히팅 폼을 본 테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 아주 좋은 자세로군. 게다가 이거 내가 보기엔 하루, 이틀 준비한 자세가 아닌 것 같은데?”
“네, 더블A 시절에 준비했던 건데 아무래도 근력 적인 부분에서 많이 부족했고, 컨택에서 지금 사용하는 타격 자세가 훨씬 유리했던지라······.”
“하긴, 안타라는 게 원래 그냥 공에 배트를 가져다 댄다고 다 안타가 되는 게 아니긴 하다지만 자네 주루 능력이라면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안타가 될 확률이 상당하니까 말이지. 어쨌든 좋은 소식이로군.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까지 건드려도 괜찮겠어.”
“본질적인 부분이요?”
테드가 나의 타격 자세를 조금 더 깊숙하게 만지기 시작했다.
“우선 스트라이드 동작을 건드릴 생각은 없네. 테이크 백도 지금 자네에겐 필요해. 하지만 그 극단적인 다운 컷 스윙은 좋지 않아. 지금 그 스윙으로는 배트가 아주 조금만 밀려도 형편없는 타구가 나올걸세. 그러니 팔로 스로우를 이렇게 고치도록 하지. 그 다른 타격 자세를 취할 때처럼 탑 핸드를 안쪽으로 감아줘야 하네.”
테드는 나에 대한 자료를 미리 받아 꽤 많은 연구를 한 상태였다. 지금 나에겐 공을 맞히는 빈도가 조금 줄어들더라도 큰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더 어울린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 현재 나의 장타율이 그렇게 낮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장타율만으로 내가 장타를 많이 쳤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타자 대부분이 단타로 만족할 타구를 종종 2루타로 둔갑시킨 전력이 있었다.
“자네를 보면 선구안이 나쁜 편이 아니야. 그런데 그런 것에 비하면 출루율이 너무 낮아. 뭐 당연한 일이지. 100개의 타구 중에 90개가 단타인 선수에게 볼질을 하는 선수는 없으니까.”
부웅!!
본래 나의 타격 자세는 팔로 스로우에서 방망이를 잡고 있던 위쪽 손을 놓아버리고 아래쪽 손을 끝까지 끄는 형태였다. 기본적으로 내가 오른손잡이로 좌타석에 서는 타자인 만큼 그리 나쁘지 않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테드가 수정해준 자세는 조금 달랐다.
거의 완벽하게 웨이트 시프트 히팅 시스템에 입각해있던 나의 폼에 적절한 범위의 로테이셔널 히팅 시스템이 섞여 들어왔다. 마지막 순간까지 양손으로 배트를 움켜쥔 이 형태는 분명 웨이트 시프트 히팅 시스템에서 이야기하는 무게중심을 이용한 전진력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는 형태였다. 하지만 임팩트의 순간 둔근에서 시작되는 회전력이 적절하게 더해짐으로써 그 손해 이상의 힘이 배트에 실렸다.
이것은 완벽하게 나의 몸통 회전력만으로 장타를 만들어내야 하는 로테이셔널 히팅을 차용하기엔 아직 부족한 나의 근력을 웨이트 시프트로 보충하는 현재의 나에게 가장 적절한 자세였다.
“좋군. 몸을 아주 잘 관리했어. 둔근이 아주 실해. 뭐 아직 조금 어색할 수도 있긴 할 테지만 기본적으로 탑 핸드를 감아주는 요령이 몸에 익어있는 만큼 금방 익숙해질걸세.”
“감사합니다.”
***
찬화 선배의 왼쪽 다리가 크게 올라왔다.
‘왼손을 제대로 감아서 퍼 올린다.’
96마일, 혹은 97마일을 상회 하는 찬화 선배의 몸쪽 강속구를 제대로 쳐내기 위해선 더 빠른 스윙속도 혹은 살짝 밀리더라도 제대로 공을 날릴 수 있는 강한 힘이 필요했다. 찬화 선배의 손에서 공이 출발하는 그 타이밍에 맞춰 살짝 들려있던 나의 오른발이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