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32화 (32/210)

# 32화.

전설과의 만남(4)

‘이런!!’

[3구!! 느린 커브!!]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느린 커브였다. 빠른 공만을 생각하던 나에게 들이닥친 기습적인 변화구에 애써 몸을 틀어 공을 건드려봤지만 제대로 된 타구가 나올 리 만무했다.

내야 뜬공.

마운드의 투수는 단순히 빠른 공만 던지는 피칭머신이 아니었다. 새로 익힌 타격 자세를 사용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변화구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나의 멍청함이 최악의 결과를 만들었다.

내가 범타로 물러나고 경기는 답답하게 흘러갔다. 오늘 찬화 선배는 정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압도적인 피칭을 선보였다. 평소 강속구 투수에게 유달리 강했던 피아자조차 제대로 공 한번 건드려보지 못한 채 루킹 삼진을 기록했다.

3이닝 5삼진 0피안타. 0볼넷.

“하, 저거 진짜 괴물인데? 이봐 피아자. 저 녀석 약점 없어 약점?”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들쭉날쭉한 커맨드가 제대로 잡히는 날에는 하······. 그래도 레퍼토리 자체가 다양한 건 아니니까 타이밍만 조금 더 몸에 익으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아니면 그래도 공략하기 쉬운 커브 쪽을 노리시는 게······.”

“저 녀석 지금 3이닝 동안 커브라고는 딱 여섯 개 던졌어. 그중에서 코스로 들어오는 공은 두 개뿐이었고.”

“이제 한 타순 돌았으니 점점 커브 비중을 늘려갈 겁니다. Park은 변화구에 욕심이 많아요. 포심이 아무리 제구가 잘 된다고 해도 그 욕심을 버리지는 못할 거에요.”

“부디 그러기를 바라야겠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찬화 선배는 헨더슨에게 오직 속구, 또 속구, 그리고 더 빠른 속구만을 보여주었다.

[5구째!! 스윙!!!]

[아, 내야 팝플라이. 1루수 잡아냅니다. Park의 96마일 포심에 헨더슨의 배트가 완전히 밀렸습니다.]

[대단합니다!! Park, 오늘 경기에서 승리를 챙기면 이번 달 5승째인가요?]

[Park의 경우 마이너 시절부터 부족한 커맨드를 보충하고 제대로 된 써드피치만 장착한다면 사이 영 컨텐더급 선발로 성장할 거라는 평가였는데 최근 경기들을 보면 그 커맨드가 보충된 것 같습니다. 거기에 오늘 모습만 봐서는 굳이 써드 피치가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아웃당한 헨더슨이 씩씩대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4회 초 1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돌아온 나의 두 번째 타석.

‘속구 위주로 오겠지?’

앞선 타석 생각지도 못한 커브에 당하기는 했지만 역시 오늘 경기 찬화 선배의 메인은 포심패스트볼이었다. 게다가 설사 커브가 날아든다 하더라도 또 당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덕아웃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압도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속구와 달리 찬화 선배의 커브는 아직 조금 미숙했다.

초구 몸쪽 낮은 코스 존에서 살짝 걸친, 혹은 살짝 빠진 공. 매우 나쁜 코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좋은 공은 아니었다. 제대로 쳐내지 못한다면 십중팔구 범타가 될만한 공.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

잠깐의 정적. 나의 시선이 심판에게 향했다. 쭈그렸던 심판이 아무런 모션을 취하지 않은 채 일어섰다. 볼이었다.

[초구 살짝 벗어났네요. Kang 잘 참았습니다.]

[워낙에 빠르고, 볼 끝이 더러워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저 선수 선구안이 훌륭하네요.]

[자, Park. 2구 와인드업.]

‘몸쪽 높은 코스!!’

찰나의 순간. 살짝 들렸던 오른쪽 다리와 함께 왼쪽 다리에 실려있던 몸의 무게가 오른쪽 다리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전진력이 배트에 실렸다.

‘지금!!’

왼팔이 한층 더 단단하게 몸에 붙었다. 그리고 작아진 지름만큼 배트가 그리는 호 역시 작고 빨라졌다. 테드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사이드 아웃 스윙’의 교과서적인 형태.

배트의 스윗 스팟을 살짝 벗어난 위치에 공이 닿았다. 하지만 대둔근에서 시작된 회전력이 방망이를 끝까지 끌고 갔다. 마지막 순간 본래라면 내려놓았을 배트의 윗부분을 잡고 있던 왼손을 안쪽으로 슬쩍 잡아당겼다.

[2구 몸쪽 높은 공!! 쳤습니다!! 2, 3루 간을 뚫어내는 강한 타구!! 좌익수 달려갑니다만 늦습니다. 메츠의 첫 안타. Kang이 1루에 무사히 안착합니다.]

[훌륭한 밀어치기였습니다. 아, 그런데 지금 Kang의 스윙이 조금 달라진 것 같군요.]

[그러네요. 이 선수 본래 팔로 스윙에서 탑핸드를 그냥 풀어버리는 타입이었는데, 지금은 끝까지 끌고 가네요.]

[덕분에 스윙궤적도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만 나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몸에 딱 붙어서 제대로 타이트하게 돌아가는군요. 이거 아무래도 급조한 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최근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는데, 의외의 선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즌 중에 굳이 이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글쎄요, 이제 고작 21살, 메이저에 데뷔한 지도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은 선수예요. 시즌 중이라 해도 상황에 맞춰 조금씩 폼을 수정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이 정도 완성도라면 더더욱 말이죠.]

‘조금 아쉽네.’

1루에서 암 가드와 풋 가드를 벗어 코치에게 넘겼다. 안타는 기쁜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빠르고 강한 타구였다. 좌익수의 커버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2루까진 넘볼 만했다. 지금 타선의 상태와 찬화 선배의 공을 고려해본다면 1아웃 상황에서 1루에 있는 것과 그래도 스코어링 포지션이라 할 수 있는 2루에 있는 것은 분명 달랐다.

‘뭐, 에드가르도랑 피아자를 믿어봐야지.’

타석에 3번 타자인 에드가르도 알폰조가 들어왔다. 최근 조금 부진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기량 자체는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다.

[직전 타석 내야 땅볼로 물러났던 에드가르도 선수입니다.]

[그래도 패스트볼에는 제법 강한 선수인 만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95마일을 상회하는 강속구, 그리고 빠른 인터벌. 덕아웃으로부터 도루 사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폼이 정직해서 타이밍 훔치기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초구 빠른 공. 에드가르도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정직한 피칭 폼이었지만 그 움직임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단독 도루를 하기엔 확실히 아슬아슬할 것 같은 타이밍. 그러나 런 앤드 히트 사인이라도 나와준다면 어찌어찌 해볼 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따악!!

[2구째 잡아당긴 타구!! 유격수 정면!! 유격수 잡아 2루로, 다시 1루로.]

최선을 다해 달려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건 단거리 세계 기록 보유자가 와도 답이 없을 그런 타구였다.

“하······.”

[6-4-3 병살입니다. 메츠의 4번째 공격이 이렇게 끝나는군요.]

[밖으로 빠지는 공을 너무 무리하게 건드렸어요. 잔루 1루. 오늘 Park의 컨디션을 생각했을 때 출루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메츠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결과입니다.]

***

“젠장!!!”

9회 초, 다저스의 마무리 제프 쇼에게 경기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헌납한 피아자가 덕아웃으로 돌아와 자신의 헬멧을 집어 던졌다. 과격한 움직임. 하지만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화내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4타수 무안타 3삼진. 오늘 그의 기록이었다.

다저스와의 1차전. 6:1 패배. 입맛이 씁쓸했다.

“강진호 선수 인터뷰 괜찮을까요?”

“아, 박 기자님.”

샤워를 끝내고 돌아온 라커룸. 스포츠 오늘의 박항식 기자를 비롯한 몇몇 기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5월,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그때처럼 박 기자 홀로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숫자는 매우 적었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이번 원정에는 나를 전담하는 뉴욕의 기자들이 많이 따라붙지 않았다. LA와 뉴욕 간의 거리도 거리였지만, 이곳 LA에 찬화 선배가 있는 만큼 상주하는 기자의 숫자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대부분 찬화 선배한테 몰려갔나 보네.’

하지만 그들도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라커룸 인터뷰를 동시에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아무래도 오늘 승리의 주역이자 기록적인 7월을 보낸 찬화 선배 쪽이 훨씬 매력적인 인터뷰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유를 이해한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팀은 패배했을지언정 오늘 나의 개인 성적은 훌륭했다.

4타수 2안타 1타점.

“오늘 좋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박찬화 선수를 상대로 유일한 안타를 기록하셨는데요,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괜히 코리안 특급이라고 불리시는 게 아니더라고요. 특히 7회에 갑자기 99마일짜리 하이 패스트볼은 후······. 올 시즌 제일 강하게 던지신 공 아닌가요?”

“하하, 올 시즌까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경기에서 전체적으로 94마일에서 97마일 사이로 구속이 형성됐는데 그때 그 공만 유독 99마일이 나오긴 했습니다.”

“뭐, 저에게 특히 전력을 다해주셨다는 말이네요. 이걸 좋아할 수도 없고······.”

.

.

.

“내일 경기에 선발로 나오는 노모 히데오 선수에 대해선 특별하게 준비하신 게 있으신지요.”

“글쎄요, 사실 메이저리그라는 곳이 워낙 대단한 선수들투성이인지라, 매일 매일 특별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보셔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최고 159킬로 강속구!! 박찬화 시즌 10승 수확. 7이닝 9삼진 1피안타.-

-박찬화 가장 까다로웠던 타자로 강진호를 꼽아······.-

-박찬화 선수에게 유일하게 안타를 뽑아낸 강진호 선수의 귀여운 애교. ‘선배님 갑자기 159킬로는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다저스 소속 일본 최초의 메이저리거 노모 히데오. 강진호와 맞대결 성사!!-

-강진호 ‘노모는 평범한 메이저리거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딱히 특별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

어제의 일방적인 패배 때문일까? 라커룸의 다른 선수들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루키, 좋겠네.”

“뭐가요? 아 설마 오늘 1번으로 출전하는 거 말하는 거예요?”

다만 헨더슨은 그런 분위기와 무관하게 단지 오늘 스타팅 라인업에 자신이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툴툴대고 있었다. 사실 내 생각에도 만 39세, 한국 나이로 41살의 헨더슨의 몸을 생각하면 적절한 휴식 타이밍이었다. 물론 헨더슨에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에이, 저야 앞에 헨더슨 씨가 딱 나와주는 게 더 좋죠. 루상에서 헨더슨 씨가 있는 거랑 없는 거랑 확 다르잖아요.”

“그건 좀 그렇긴 하지.”

“게다가 감독님도 마냥 헨더슨 씨를 쉬게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역시 그렇지?”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 헨더슨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하지만 헨더슨 하나가 밝아졌다고 해서 라커룸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헨더슨은 베테랑이었지만 자기 앞가림만 딱 하는 선수였고 팀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현재 메츠에서 그런 역할을 할만한 선수는 경력이나 성적, 그리고 성격을 고려했을 때 피아자뿐이었다. 하지만 다저스에 이를 갈던 피아자 역시 어제의 일방적인 패배와 자신의 성적에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좋지 않은데.’

가라앉은 분위기. 누군가 분위기를 띄울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나설 수는 없었다. 아니 사실 나선다고 해도 딱히 들어줄 이도 없을 것이다. 최근 괜찮은 성적을 내고 있긴 하지만 그래 봐야 아직 난 빅리그 3개월 차의 루키에 불과했다.

[자, 다저스와 메츠의 2차전 경기. 마운드에 히데오 노모 선수가 올라옵니다.]

[작년 말 팔꿈치 수술을 받았던 히데오 노모 선수. 올 시즌 조금 부진한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직구 구속이 많이 떨어진 것이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그래도 SO/9가 10.1이에요. 삼진 숫자만큼은 여전히 리그 최고 수준입니다.]

1번 타자로 타석에 서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마운드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최초의 동양인 투수. 신인왕, 쿠어스 필드 유일의 노히트 노런 등으로 유명한 노모 히데오가 올라와 있었다.

‘히데오? 글쎄, 아무리 그래도 우리 팀 선수인데 약점을 알려달라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에이, 선배님. 오늘 그렇게 저를 묵사발을 내셨는데 이 정도는 도와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제저녁 갑작스럽게 걸려온 찬화 선배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빡빡한 일정 탓에 밥 한번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무려 1시간 가깝게 전화로 잡담을 나눈 그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아마, 작년이나 재작년이었으면 해줄 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글쎄, 해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말.

하지만 첫 타석.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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