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33화 (33/210)

# 33화.

분열(1)

‘야구 경기를 보게 된다면, 초구를 치는 타자들의 타율을 살펴봐라. 아마도 1할도 안 되거나, 기껏해야 2할쯤 될 것이다. 배트를 크게 휘두르는 타자는 큰 안타를 치는 선수가 아니라 큰 타구를 날리는 선수일 뿐이다.’

초구를 타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테드의 유명한 이야기와 다르게, 시즌 평균 BABIP과 초구 타격 시 BABIP을 비교해보면 초구 쪽이 매년 6푼 가깝게 더 높은 수치를 보인다. 이유는 간단했다. 좋은 공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테드의 말과 달리 초구가 투수가 던지는 가장 쉬운 공일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따악!!

[초구!! 잡아당긴 타구!!]

[와, 이건 볼 필요도 없겠군요. 담장 넘어갔습니다.]

[1회 초, 경기 시작과 동시에 메츠의 Kang이 홈런을 기록합니다. 1:0]

“잘했어!!”

“와우, 시작하자마자 대뜸 홈런이라니. 이 자식 오늘 아주 단단히 마음먹고 나왔구만.”

축 처져 있던 덕아웃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역시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에는 홈런만 한 것이 없었다.

[아, 히데오 노모 선수. 아직 몸이 덜 풀린 걸까요? 초구가 가운데로 상당히 몰렸네요.]

[안 그래도 작년 말에 받았던 팔꿈치 수술로 구위가 많이 떨어졌다는 평가인데, 이렇게 몰려서 들어와서야 답이 없죠.]

[그래도 아직 1점차, 1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노모 선수, 저력이 있는 선수거든요. 게다가 어제 봐서 아시겠지만, 다저스의 타선도 굉장히 좋습니다. 정신만 바짝 차린다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습니다.]

덕아웃, 헨더슨의 표정이 미묘했다.

“선두타자가 대뜸 초구에 방망이를 휘두르다니. 뭐 홈런이니까 다행이긴 한데. 역시 넌 1번보다는 2번이나 3번이 어울리겠어.”

“그런가요?”

“당연하지. 물론 발도 빠르고 타율이 높으니까 리드 오프로도 훌륭하긴 한데, 장타력이나 성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1번은 좀 그렇지.”

41살 먹은 아저씨의 노골적인 자리 욕심. 하지만 프로 선수가 자기 자리를 욕심내는 것은 당연했고 그것을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쪽이 지금 타석에 나가 있는 브라이언 놈처럼 은근히 비꼬는 이야기를 하거나, 짜증 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게다가 헨더슨의 이야기가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초구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은 1번 타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안타를 만들거나 아예 지금처럼 홈런을 만드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초구 타격 시 리그 평균 BABIP이 0.331이라는 것은 나머지 0.659의 확률로 아웃이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1번 타자의 미덕은 안타가 아닌 출루였다. 0.331은 타율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출루율로 본다면 리그 평균 출루율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수치였고, 그런만큼 선두타자의 초구 스윙은 리그 전체의 평균치로 봤을 때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지금 워낙 좋은 공이 들어와서 방망이를 휘둘렀을 뿐, 내가 초구에 방망이를 자주 내미는 타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에이, 그런데 제가 딱히 초구에 자주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아무튼 내가 봤을 때 넌 타고난 클린업이야. 아예 3번으로 가버리는 건 어떠냐. 내가 바비 저 영감한테 잘 이야기해줄 테니까.”

“어이구, 됐습니다. 어차피 오늘 제가 1번으로 나온 것도 헨더슨 씨 하루 쉬게 해주려고 나온 거잖아요. 솔직히 1번 타자로는 헨더슨 씨가 더 어울려요.”

“역시 그렇지?”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1번 타자의 역할로 한정 짓는다면, 41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헨더슨은 나보다 미묘하게 더 나은 타자였다. 0.245/0.389/0.313의 변태적인 슬래쉬 라인은 그가 1번 타자 말고는 리그에서 활약할 수 없는 타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사이 오늘 헨더슨을 대신해 좌익수로 출전한 브라이언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노모가 부진한 것에 못지않게 최근 브라이언 역시 부진했다. 주전 중견수 자리를 나에게 뺏긴 것, 그리고 띄엄띄엄 있는 출전 기회가 그를 흔든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그에게 동정심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메이저는 이런 세계였다. 이 정도에 흔들리는 정신력이라면 설사 내가 아니었더라도 이곳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3번 타자. 래니 해리스 스윙 삼진.]

[선두타자를 맞이해 홈런을 허용했던 노모 히데오.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타자들을 요리하네요. 벌써 두 타자 연속 삼진입니다. 굉장한 낙차의 포크볼이었어요.]

[이미 많은 분이 아시겠지만, 노모 선수의 포크볼은 메이저의 몇몇 투수들이 사용하는 스플리터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조금 다른 공이거든요. 타석에서 보기에 영락없는 패스트볼인데 배트 컨트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진단 말이죠. 심지어 몇몇 타자들은 높은 패스트볼인 줄 알고 휘두르는데 원바운드가 될 만큼 떨어진단 말이죠.]

두 타자 연속 삼진. 나의 홈런으로 달아올랐던 덕아웃이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타석에 피아자가 올라갔다.

‘그래도 피아자라면.’

비록 어제 4타수 무안타 3삼진으로 부진하긴 했지만 그래도 피아자라면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였다. 90마일도 채 되지 못하는 비리비리한 포심 정도는 얼마든지 담장 밖으로 날려버릴 파괴력을 가진 타자인 것이다.

하지만

부웅

[초구 포크볼!! 피아자의 배트가 헛돌아갑니다.]

토네이도 폼이라 불리는 특유의 자세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포크볼에 피아자의 배트가 헛돌았다.

‘설마······.’

[2구째!! 쳤습니다!! 약한 타구. 2루수 잡아서 1루에. 1루에서 아웃입니다.]

[아, 피아자 선수, 포크볼에 배트가 나갔습니다. 너무 의욕이 넘쳤어요. 이렇게 치려고 하는 의지가 가득한 선수에게는 투수도 좋은 공을 잘 주지 않습니다. 조금 더 침착하게 공을 골라내야 했어요.]

[아무래도 선두타자의 홈런에 다들 조금 들떴던 것 같군요.]

[1회 초, 메츠가 Kang의 솔로 홈런으로 1점을 만들었습니다만 추가점을 끌어내지는 못했네요.]

침울해져 가는 덕아웃의 분위기에 피아자가 쐐기를 박아 넣었다. 조금만 더 참을성 있게 볼을 골랐더라면······. 오늘 노모의 속구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해주기 힘들었던 만큼 상당히 아쉬운 결과였다. 그래도 아직 기회는 많이 남아있었다. 경기는 이제 고작 1회에 불과했다.

오늘 우리 팀의 선발은 데이브 밀리키.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락가락하는 전형적인 저니맨이었다. 하지만 지난 선발 판에서 제법 괜찮은 모습을 보였던 만큼 오늘도 약간은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나의 기대가 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데이브 밀리키. 2아웃 1, 2루에서 또다시 볼넷입니다. 만루를 채우네요. 지금은 두 타자 연속 볼넷. 조금 더 과감하게 승부해도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자, 타석에 라울 몬데시가 들어옵니다.

[2아웃 만루 상황!! 투수 4구째!! 라울 몬데시!! 쳤습니다!! 우익수 방면 높게 뜬 공. 부치 허스키가. 어?]

[빠졌습니다!! 부치 허스키의 글러브에서 공이 빠졌습니다!!]

[그 사이 3루 주자 에릭 영은 홈으로!! 2루 주자 허버드!! 허버드 역시 무사히 홈까지 들어옵니다.]

[부치 허스키, 부치 허스키가 결정적인 순간 에러를 범하네요.]

[1회 말, 다저스가 2:1로 앞서 나갑니다.]

‘미치겠네.’

1회 말. 차근차근 쌓이던 장작 위에 부치 허스키가 불을 붙였다. 솔직히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선발투수는 선발투수대로 볼질을 하고, 부치 허스키는 메이저리그, 아니 프로 선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에러를 저질렀다.

그렇다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부치 허스키가 저지른 일은 감독과 코치가 적절하게 처리할 일이었다. 경기는 이제 초반에 불과했고 지금은 누군가의 잘못을 곱씹기보다 승리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이들이 나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 뭐 이런. 어처구니가 없네.”

덕아웃으로 돌아온 선발투수, 데이브가 글러브를 집어 던졌다.

‘저 미친놈은 또 왜 저러는 거야.’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비난의 대상이 된 허스키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물론 치명적인 에러이기는 했지만, 그에 관해선 팀의 인선을 맡은 감독이나 코치가 이야기할 일이지 저렇게 투수가 직접 비아냥거리는 것은 옳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있던 허스키가 일어나려는 찰나

“자자, 우리 공격 차례잖아. 이제 2회인데 집중 좀 하자고.”

헨더슨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평소 클럽하우스 최고참다운 무게감 따윈 전혀 발휘하지 않던 헨더슨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1번 타자 리키 헨더슨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은근히 나서려던 코치진들 역시 헨더슨의 이야기를 존중했는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론 고작 이 정도에 서로 간의 감정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허스키는 대기타석으로 나갔고 데이브는 투수 점퍼를 걸쳤다.

그리고 내 옆에 주저앉은 헨더슨이 작게 속삭였다.

‘쯧, 하여간 야구도 못하는 것들이 이상한 거로 매일 싸운단 말이지. 안 그래도 경기에 못 나가서 꿀꿀하구만.’

‘그래도 헨더슨 씨 덕분에 대충 봉합은 된 것 같네요.’

‘봉합이라니? 무슨 소리야?’

역시 헨더슨이랄까, 분위기 전환이고, 팀의 화합이고. 그냥 자기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 것뿐이었다.

개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경기가 진행됐다. 투수의 기초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속구가 무너진 노모였다. 하지만 어쨌건 간에 KBO보다 수준이 높은 NPB를 완벽하게 평정하고 메이저의 최상위급 선발로 군림하던 투수라는 것일까? 노모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물론 우리 팀의 분위기가 개판이라는 점 역시 그에게는 제법 도움이 됐을 것이다. 타격이란 모든 스포츠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흐트러진 멘탈은 분명 타격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솔직히 저 정도 공에 왜 속아 넘어가는 건진 이해가 안되네. 낙폭이 제법 크긴 하지만 그래도 전부 볼이잖아. 잘 보고 골라내기만 하면 되는 공인데 말이야.’

대기타석에서 지켜보는 노모의 공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무조건 존 밖으로 떨어지는 그의 포크볼만 골라낸다면 배팅볼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랄까?

타석에 서 있던 9번 타자, 오늘의 선발투수 데이브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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