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34화 (34/210)

# 34화.

분열(2)

[데이브!! 헛스윙 삼진 아웃. 3회 초, 노모 히데오가 경기 4번째 삼진을 잡아냅니다.]

[오늘 속구가 전반적으로 86마일 선에서 형성되는데도 불구하고 삼진율이 굉장히 높습니다. 역시 포크볼의 힘일까요?]

[포크볼도 포크볼이지만 저 토네이도폼의 역할도 무시하기는 힘들죠.]

[토네이도폼이요? 저건 그냥 공의 구위를 높여주는 폼 아닌가요? 구속이 86마일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토네이도폼이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단순히 그렇게 보기는 힘듭니다. 아무래도 저 토네이도폼은 굉장한 디셉션 포인트를 갖고 있거든요.]

[디셉션 포인트요?]

[네, 타자 입장에서 보자면 노모 히데오 선수의 저 폼은 공을 던지는 그 순간까지 무슨 공이 튀어나올지 굉장히 헷갈리게 만드는 폼이에요. 게다가 타이밍 역시 미묘하고요.]

[그렇군요. 아, 타석에 1회 초 선제 홈런을 기록했던 Kang이 들어옵니다. 1회 초에 초구를 받아 그대로 담장을 넘겼었죠?]

[이 선수도 데뷔 1년 차라고는 믿기 힘든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꾸준히 BA 리포트 상위권에 기록되긴 했지만 그게 타격에 대한 기대는 아니었거든요. 메츠는 지금 복권에 당첨된 기분일 겁니다.]

클럽하우스 분위기에 대해 아무리 걱정해봤자 그 부분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고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다. 지금 나는 고작 데뷔 3개월 차의 루키에 불과했다.

‘뭐 발렌타인 감독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감독님도 아니고.’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성실하게 나의 성적을 쌓아 올리는 일이었다. 팀 내에 딱히 사교 관계를 갖고 있지 않던 헨더슨의 한마디에 덕아웃의 상황이 정리되는 것처럼 프로는 결국 성적으로 말하는 법이었다.

[노모 히데오, 1구!!]

마운드의 노모가 등이 훤히 보일 만큼 몸을 크게 비틀었다. 노모 히데오를 대표하는 토네이도폼. 마지막 순간까지 감춰져 있던 볼이 그의 오른손에서 튀어나왔다.

‘좋았어!!’

무슨 생각이었을까? 1회 초 나에게 얻어맞았던 그 허술한 공이 또다시 날아왔다.

부웅!!!

“스트라잌!!”

밖에서 보던 것과 너무 달랐다.

‘뭐야? 이게 포크볼이라고?’

마치 포심처럼 날아와 마지막 순간 휙 가라앉은 포크볼에 나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앞서 피아자를 비롯한 팀의 타자들이 삼진을 당한 것이 단순히 컨디션 탓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9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마구로 이름을 떨쳤던 노모 히데오의 포크볼은 그의 구속이 망가진 지금도 그 위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옷깃을 가볍게 털고 배팅 장갑을 조여 맺다. 포크볼을 보고 생긴 약간의 당황이 가라앉았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95년 96년 리그에 폭풍을 몰고 왔던 그 토네이도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한계까지 쥐어 짜낸 10년간의 피칭으로 너덜너덜해진 산들바람에 불과했다.

물론 그 세월 동안 숙성된 포크볼은 대단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 한들 그는 모든 투수의 기본이 되는 속구를 잃었다. 지금으로썬 내가 그의 속구에 헛스윙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볼카운트는 0-1. 고민은 없었다. 노리는 것은 오직 속구뿐.

[히데오 노모. 제2구!! 바깥쪽 낮은 코스!!]

따악!!

속구였다. 망설임 없이 흘러나간 나의 배트가 노모의 공을 후려쳤다. 낮게 깔린 밀어친 타구가 다저스의 유격수 호세 비즈카이노의 글러브를 스쳤다. 무난하게 도착한 1루. 1루 코치가 나의 등을 두들겼다.

“잘했어!!”

리드의 폭이 넓었다. 힐끔 나를 바라보는 노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타석에 브라이언 놈이 들어왔다. 짜증 나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그라운드에 선 이상은 동료였다.

‘자, 내가 최대한 흔들어 줄 테니까, 실력 발휘 좀 해보라고.’

노모의 투구 자세가 달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1루에 나를 두고 토네이도 폼을 고수한다는 것은 2루 자유 입장권을 발급해주는것과 다르지 않았다.

‘뭐, 퀵모션으로 던진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지만 말이지.’

슬라이드 스텝. 노모의 손에서 84마일짜리 공이 흘러나왔다. 속구? 포크볼? 뭐가 됐건 상관없었다. 포크볼이라면 도루가 더 쉬워질 것이고, 속구라면 저 멍청한 브라이언이라고 해도 반반 확률 정도로는 쳐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세이프!!”

나의 왼손이 2루 베이스를 더듬었다. 원 아웃 주자 2루. 노모 히데오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3회 초 1사 2루. 2:1로 뒤지는 상황, 적시타 한방이면 영웅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타석에 선 브라이언 놈은 역시 브라이언 놈다웠다.

허무한 삼진 아웃. 하나의 아웃카운트가 더해졌다.

2사 2루.

타석에 래니 해리스가 들어왔다.

‘제발,’

펜스를 직격할 만큼 커다란 타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내야를 넘기는 안타. 이왕이면 내가 홈까지 달려갈 수 있는 아주 조금 커다란 안타 하나면 충분했다.

볼, 파울, 볼, 볼.

그리고 타격.

외야로 향하는 제법 큼지막한 타구였다. 2아웃 상황. 공이 잡힌다면 어차피 이닝 종료였다. 간을 볼 필요 따윈 없었다. 3루 베이스를 스친 나의 몸이 홈으로 향했다.

‘젠장!!’

아직 외야로부터 공이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절반쯤 홈플레이트를 가로막고 있는 포수의 모습이 보였다.

찰스 존슨. 120kg이 넘어가는 거대한 사내였다. 더욱이 지금은 1998년이었다. 아직 홈 충돌방지규정같이 말랑말랑한 룰은 논의 조차 되지 않았다.

‘피할까? 아니면······.’

두 개의 선택지가 내 앞에 놓였다. 달리는 힘 그대로 녀석을 날려버리던지, 아니면 어떻게든 녀석을 피해 홈 베이스를 건드리던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어딜!!!”

존슨의 왼쪽 다리가 옆으로 빠져나왔다. 통나무를 연상케 하는 굵은 다리. 하지만 이미 예상하던 반응이었다. 옆으로 크게 빠져나온 나의 왼손이 홈플레이트를 향했다.

뻐엉!!

2루수가 던진 공을 받아낸 찰스 존슨의 글러브가 나의 등을 향했다.

위기의 순간. 나의 몸이 비틀리듯 뒤집혔다. 찰스 존슨의 글러브가 허공을 갈랐고, 나의 오른손은 홈플레이트를 짚었다.

“세이프!!!”

4회 초, 내가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경기가 이어졌다. 노모 히데오는 끈질겼다. 하지만 작년 말 수술로 망가진 그의 팔꿈치는 완전하지 못했다. 점점 떨어지는 구위, 그리고 그에 비례해 늘어나는 우리 팀의 출루. 결국, 피아자의 홈런이 터졌고, 7회 초, 노모가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물론 다저스 역시 쉽게 경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아직 시즌은 중반에 불과했다. 서부지구 1위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다저스는 제법 차이가 났지만, 다저스 역시 남은 경기들을 잘 치러낸다면 1위까지 치고 올라갈 가능성은 아직 충분했다.

게다가 선발투수인 데이브부터 해서 우리 팀의 투수들은 전반적으로 그리 대단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화끈한 타격전이 이어졌다. 우리가 점수를 내면 다저스가 따라왔고 다시 우리가 멀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9회 말.

“마이 볼!!!”

크게 떠오른 공이 나의 글러브에 들어왔다.

11:9. 다저스와의 2차전이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

96년 하반기 메츠의 감독으로 부임해온 바비 발렌타인은 자신의 능력을 훌륭하게 증명했다. 97년 메츠는 88승 74패로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3위, 전체 4위를 기록했다. 그것은 만약 메츠가 중부지구였다면 포스트 시즌에 직행할만한 성적이자 91년 이후 단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던 5할 이상의 승률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98년에도 그 기세는 끊어지지 않았다. 메츠는 여전히 패배보다 승리가 많았다. 조금만 더 승리를 가지고 온다면 88년 이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포스트 시즌에 나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98년의 메츠는 아껴둔 유망주들을 하나, 둘씩 지불 하면서 달려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논웨이버 트레이드 데드 라인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7월 말. 메츠는 54승 48패.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2위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단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지금 팀 상황을 보세요. 이쯤에서 포기하고 쉬어가야 합니다. 매몰 비용을 아까워할 상황이 아니에요.”

“아닙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중부지구 2위인 컵스와 서부지구 2위인 자이언츠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감독의 말을 신뢰하고 조금 더 힘을 실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봐요, 지금까지 우리가 소모한 자원만 하더라도 제프 괴츠, 에드 야널, 알렉스 에스코바, 거기에 요한 페레즈에 그렌트 로버츠, 그리고 브라이언 콜까지 지난 몇 년간 드래프트와 국제 드래프트로 긁어모았던 유망주 대부분이 날아갔어요. 이제 BA 100위권 유망주라고는 프레스톤 윌슨과 옥타비오 도텔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친구들까지 소모하자고요?”

“그렇게 집어넣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도전해 봐야죠. 주저할 때가 아닙니다.”

“거, 참 도박장 가면 패가망신 당하기 딱 좋은 마인드로군요.”

“그런 겁쟁이 같은 마인드 때문에 번번이 대권을 못 잡았던 겁니다.”

프런트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스티브 필립스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인생이 그렇듯 구단의 운영 역시 확실한 정답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쪽의 이야기이건 설득력은 있었다.

“단장님, 만약 이대로 생각 없이 달리다가 무너진다면 이번에는 또 몇 년을 더 암흑기로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 시장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우리 지구야 브레이브스가 독주하고 있다지만 중부지구와 서부지구는 여간 혼탁한 게 아닙니다. 셀링 팀으로 돌아설 팀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달려야 하는 겁니다. 지금 리그 상황을 본다면 우리 팀의 와일드카드 진출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끝까지 달려보느냐, 아니면 이쯤에서 숨을 고를 것이냐. 남은 것은 필립스 자신의 선택뿐이었다.

***

-메츠의 Kang. 다저스를 침몰시키다.-

-5타수 3안타 1홈런. 무서운 신인의 괴력. 메츠를 위기에서 구해내다.-

-메츠, 선수단 불화설!!-

-ESPN 평론가, 크레이그 키메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메츠는 Kang을 중심으로 팀을 정비하고 다음을 내다봐야 한다.’-

-박찬화. ‘아, 전날 통화요? 하하하. 전날에 통화는 그저 짧은 격려 인사였을 뿐,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조언을 해주기에 진호는 이미 저보다 훌륭한 타자였거든요. 물론 메이저리거로서는 제가 선배죠. 그러니까 짧게 이야기하자면 제가 LA행 비행기를 탔을 때······(중략)입니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어제 경기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데이브와 허스키에게 징계가 주어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수준의 징계가 주어질 것인가였다.

덕아웃에서 짜증을 냈던 데이브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전용기가 선 자리에 구단 버스가 들어왔다. 메이저리거의 특권이랄까? 특별한 보안체크도 없이 탑승한 버스가 구장까지 직행했다.

“괜찮을까요?”

“뭐가?”

“우리 팀이요. 오늘로 54승 48패인데 포스트 시즌 나갈 수 있을까요?”

“글쎄, 뭐 그런 고민이야 프런트랑 코치들이 할 일이고, 난 그냥 경기나 좀 더 내 보내줬으면 좋겠네. 솔직히 어제 경기도 내가 나갔으면 훨씬 쉬웠을걸? 히데오 같은 타입의 투수는 내가 정말 잘 요리할 수 있단 말이지. 뭐 타입을 떠나서 이 몸이 요리하기 힘든 투수 따윈 없지만 말이야.”

헨더슨의 자기 자랑에 대충 답하는 사이 구단 버스가 멈춰섰다. 셰이 스타디움. 오늘 오후에 있을 경기에 대비해 서둘러 몸을 풀 시간이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기 위해 라커룸으로 향했다.

“어?”

그리고 그곳에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이 앉아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하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

“오랜만이야.”

“프레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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