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도약(2)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설득력이 충분한 이야기였다. 지난 생애, 데이빗과의 충돌로 인해 무릎이 나갔던 나는 결국 빅리그에 오르지 못한 채 마이너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기억이 무의식 속에서 나의 행동을 결정짓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제 슬라이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트레이드가 결정되고 네 영상을 몇 개 봤을 때부터?”
“그러니까 두 달 전이네요?”
“그렇지?”
“그런데 그걸 지금까지 이야기 안 하신 거예요?”
“어, 안 물어봤잖아.”
***
“흠, 확실히 이야기를 듣고 보니, 벤트 레그 슬라이딩을 해야 할 타이밍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네. 그런데 뭐 이 정도야 크게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은데? 네 도루 성공률이 낮은 것도 아니고, 굳이 잘하고 있는데 이런 걸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팀의 코치인 쿠키 로저스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현재 나의 주루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의 말이 옳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이번 시즌 나의 도루는 매우 훌륭했다. 콜업 된 지 고작 석 달. 출전한 경기 숫자는 60경기가 채 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벌써 24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도루 실패는 오직 두 개뿐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헨더슨의 이야기 쪽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쿠키 로저스의 판단 속에는 내가 그런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발생하지도 않았던 사고. 만약 그런 사고 이후에 나의 플레이가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로저스도 조금은 다르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이걸 어떻게 극복하냐는 건데······.’
차라리 잘못된 습관이나 버릇 같은 것이라면 연습을 통해 교정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정신적인 부분의 문제, 일종의 트라우마라면 이건 정말이지 답이 없는 문제였다.
‘정신과라도 찾아가야 하는 건가?’
94년 총파업 이후 메이저리그의 선수노조는 사무국이나 구단주들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파워로 자리 잡았다. 덕분에 메이저리그 선수에게 주어지는 서비스는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이었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최상의 보험은 물론이거니와 그중에는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케어 역시 포함되어있었다.
“어이, 진호. 몸이나 좀 풀자고.”
프레스톤이었다.
“몸을? 왜?”
“왜긴 왜야. 이제 3시간 있으면 경기 시작인데 미리미리 풀어둬야지.”
콜업 이후 지난 두 경기에서 프레스톤은 출전하지 못했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고령인 헨더슨은 바로 이틀 전 경기에서 휴식을 취했었고, 허스키 역시 아직 쌩쌩했다. 심지어 프레스톤은 팀의 네 번째 옵션도 아닌 다섯 번째 옵션이었다. 쉽게 기회가 돌아올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네가 왜? 오늘 출전하긴 하는 거야?”
“야!!!”
“하하, 농담이야 농담. 가자고 가. 아무리 벤치만 달구더라도 몸은 풀어둬야지.”
“이 자식이!!”
조금 짓궂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농담을 건네는 나도, 그리고 받는 프레스톤도 이것이 농담임을 알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향후 10년간 메이저리그에서 4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일 진짜배기였다.
따악!!
내가 올려주는 공을 받아치는 프레스톤의 배트에 힘이 넘쳤다. 대체 어째서 발렌타인 감독이 2할 4푼을 치고 있는 부치 허스키 자리에 대신 라인업에 넣어서 시험해보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힘 있는 스윙이었다.
‘그래, 이렇게라도 무력시위를 계속 해 보자고.’
멀리 부치 허스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본인도 자신의 자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49개, 50개. 끝!!! 자 이제 내 차례야.”
“슬슬 감이 좀 오는 거 같은데 몇 번만 더 하자.”
“감 같은 소리 하네. 어차피 벤치에 앉아있는데 감이 오면 뭐하냐. 이리 와서 공이나 던져.”
“쳇.”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자리를 양보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말이다.
***
경기가 끝났다. 몸에 묻은 찐득한 흙먼지를 씻어내고 돌아온 라커룸. 프레스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프레스톤!! 이 근처에 멕시칸 요리 아주 기가 막힌 곳이 있는데, 어때? 오늘은 내가 쏜다.”
“미안, 별로 생각이 없네. 다음에 먹자. 다음에.”
그가 콜업 된 지 정확히 사흘이 지났다. 오늘 있었던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홈 3차전 역시 프레스톤은 출전하지 못했다. 물론 프레스톤은 팀의 다섯 번째 외야수였기에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에서 팀의 주전 우익수인 부치 허스키는 총 14번의 타석에서 1안타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코너 외야수라고 하기엔 처참한 성적이었다. 대타로라도 마이너에서 막 올라온 루키에게 기회를 줘보는 것이 당연한 성적이었다.
‘발렌타인 감독이 프런트랑 힘 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본데.’
답답한 일이었다. 물론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무슨 생각인지는 짐작이 갔다. 팀이 한참 달려나가야 할 시기에 보강이라고 온 인원이 노모 히데오였다. 감독으로선 자신의 불만을 프런트에 표시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하필 프레스톤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프레스톤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최소 2등 당첨은 보장이 된 복권.
본래대로라면 프레스톤은 98년 확장 로스터로 콜업 되고 99년 첫 풀시즌에서 신인왕 투표 2위를 차지한다.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메이저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총액 4천만 달러를 수령 했다는 것은 프레스톤이 그만큼 뛰어난 선수였다는 말이었다.
‘애당초 FA 대박도 아니고 컨트롤 기간일 때 FA기간 1년을 커버하는 조건의 연장계약으로 3,500만 달러를 받아냈던 놈이니까.’
그런만큼 프레스톤이라면 지금 현재 팀에 아주 조금 부족한 그 플러스알파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공이라도 좀 던져주랴?”
“공은 무슨, 오늘 경기도 해서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쉬어. 벤치나 달구느라 찌뿌둥해진 몸이나 좀 풀고 천천히 들어갈 테니까.”
진심으로 혼자 있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런 시기, 괜히 울적한 마음을 달래겠다고 몸을 혹사했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제 실력을 발휘 못하는 것은 곤란했다. 적절한 선에서 제어해줄 필요가 있었다.
“혼자 궁상떨지 말고 해준다고 할 때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무려 6월 이달의 선수이자 98시즌 신인왕 유력 후보의 도움이니까.”
“어우, 이 자식은, 꼭 이런 순간까지 자랑질이네. 젠장할.”
나의 너스레에 프레스톤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가서 볼이나 몇 개 치고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내일 원정이잖아. 요 며칠 허스키나 길키 하는 거 보면 네가 내일 당장 선발라인업에 이름 올려도 이상하지 않겠던걸. 너 빙엄턴에서 성적도 장난 아니었다며. 이번 삼연전 상대였던 밀워키 브루어스야 같은 지구 팀도 아니고, 원체 약팀이니까 발렌타인 감독도 그냥 밀고 간 거고 다음 시리즈 상대한텐 그렇게 못할 거야.”
“그럴까?”
“그래, 인마. 아무리 발렌타인 감독이 꽉 막혔다고 해도 주변에서 보는 눈이 있는데, 그렇게까지 배짱부리지는 못하지. 허스키 최근 7경기 성적이 고작 2안타야. 이정도면 감독 양아들이 아니라 친아들이라도 좀 쉬게 해야지.”
***
‘저 새끼, 진짜 감독 친아들인 거 아니야?’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이건 단지 프런트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표현일 것이다.
‘아니면 감독이 미친건가?’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감독은 NPB나 KBO의 그런 절대적인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바비 발렌타인이 NPB 생활도 하고, 조금 옛날 인간인지라 착각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98년의 메이저리그는 이미 육성은 팜 디렉터가, 선수에 관한 판단은 스카우팅 디렉터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취합된 정보는 감독이 아닌 단장에게 건네졌고, 최종적으로 선수단의 구성은 오롯하게 단장의 몫이었다.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단장이 만들어준 선수단을 최대한 잘 운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약간 피력하는 것까지였다. 결코 단장과 힘 싸움을 벌일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자, 최근 내셔널리그의 상위권 팀들의 다툼이 뜨겁습니다. 아직 시즌이 2달이나 남았음에도 벌써 6개 팀이 와일드카드 경쟁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경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곳에서 펼쳐지는 가장 뜨거운 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업으로 리그가 중단됐던 94년을 제외하고 91년부터 97년까지 무려 6개 시즌에서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내셔널리그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그리고 작년 갑작스럽게 부활하며 또 한 번의 어메이징을 이뤄내려는 뉴욕 메츠의 맞대결!!]
[공교롭게도 현재 동부지구 1, 2위를 다투는 이 두 팀의 맞대결은 지난 4월에 네 경기 이후 오늘이 처음이군요. 일 년에 총 열 두 번의 경기를 치르는 만큼, 앞으로 총 8경기가 남은 두 달간의 일정에 몰려있습니다.]
[양 팀 모두 서로 간의 맞대결 만큼은 놓치기가 싫을 겁니다. 지구 우승을 다투는 두 팀인 만큼 1패를 당한다는 것은 다른 팀에게 2패를 당하는 것만큼 큰 타격이에요.]
하지만 감독이 단장의 선수단 구성에 간섭할 수 없듯, 나 역시 감독의 선수 기용에 간섭할 수 없었다. 그것도 나의 출전이 아닌 친구의 출전에 관해서는 더더욱 말이다. 더더군다나 지금은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당장 눈앞의 투수가 던지는 공 하나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오늘 브레이브스의 선발은 존 스몰츠. 96년 사이 영에 빛나는 리그 최강의 3선발이로군요.]
[리그 최강의 3선발이라니. 참 재밌는 말입니다. 솔직히 저런 선수가 3선발로 있다는 것 자체가 브레이브스가 얼마나 막강한 팀인지를 알려주는 일인 것 같네요.]
[다만 오늘만큼은 메츠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플로리다에서 건너온 32세의 좌완투수. 올 시즌 리그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활약을 선보이고 있는 에이스 투수. 알 라이터가 등판합니다.]
[아, 마운드에 존 스몰츠 선수가 올라오네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3선발. 존 스몰츠.
최소한 지금까지 내가 직접 상대해 본 투수 중에서 이보다 대단한 족적을 남긴 투수는 없었다. 사이 영 위너. 그리고 메이저에서 무려 21시즌을 뛰며 213승 154세이브 3084 삼진을 기록한 대투수.
타석에 선 리키 헨더슨의 표정이 신중했다.
뻐엉!!
얼마 전 다저 스타디움의 찬화 선배를 떠오르게 하는 불같은 강속구. 세차게 돌아가던 헨더슨의 배트가 멈췄다. 볼이었다.
‘94마일.’
지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이곳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홈구장 전광판에 존 스몰츠가 던진 포심의 구속이 표기됐다. 얼마 전 찬화 선배가 보여줬던 강속구만큼은 아니었지만 1회 초 선발 투수의 초구라고 보기엔 터무니없이 빠른 공이었다.
헨더슨과 스몰츠의 승부가 이어졌다. 파울, 볼, 파울. 파울, 파울 그리고 볼. 오늘 헨더슨의 몸 상태가 굉장히 좋아 보였다. 볼카운트 2-2에서 저런 아슬아슬한 공을 그냥 보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확신이 없이는 힘든 일이었다.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볼넷!! 메츠의 1번 타자 리키 헨더슨이 결국 볼넷으로 출루하네요.]
[선두타자 볼넷입니다. 스몰츠 선수 표정이 좋지 않네요.]
[공을 8개나 던졌는데 결국 볼넷이에요. 그것도 리그에서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 중인 리키 헨더슨을 상대로 내준 볼넷입니다. 선발투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껄끄러울 수밖에 없죠.]
헨더슨이 출루했다. 이제 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