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도약(3)
지금까지 존 스몰츠가 세운 그리고 그가 앞으로 세울 기록들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찬화 선배와 대결할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감이 밀려왔다.
‘난 저것보다 빠른 찬화 선배의 공도 공략했어. 충분히 해볼 만해.’
옷깃을 털고 배팅 장갑을 조여 맺다. 별것 아닌 루틴이었지만 오랜 기간 해왔던 그 동작이 한순간 마음을 진정시켰다.
존 스몰츠는 최근 내가 상대했던 찬화 선배와 노모 히데오 선수를 조금씩 섞어놓은 것 같은 유형의 투수였다. 물론 스몰츠가 그 둘을 합친 것만큼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의 포심패스트볼은 강력했지만, 찬화 선배의 그것에는 조금 미치지 못했다. 또한, 스플리터 역시 대단한 공이었지만 노모의 포크볼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수준이 떨어졌다.
하지만 사실상 투 피치 투수라고 봐도 무방했던 찬화 선배와 달리 존 스몰츠에게는 완성도 높은 스플리터와 슬라이더가 있었다. 그리고 90마일 중후반에 달하는 그의 속구는 이제는 폐급이나 다름없는 노모의 속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90마일 중후반의 속구를 기반으로 두 가지의 빠른 변화구가 더해졌다. 즉, 지금 시점에서 존 스몰츠는 내가 상대해본 그 어떤 선발보다 완성도 높은 선발투수였다. 그가 96년의 사이 영상을 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게다가 작년을 기준으로 저 존 스몰츠의 슬라이더는 랜디 존슨의 그것과 함께 리그 구종 가치 1, 2위를 다퉜다. 좌투수 최고의 슬라이더가 존슨의 슬라이더라면 우투수 최고의 슬라이더는 스몰츠의 슬라이더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나마 그가 좌완투수가 아닌 우완투수라는 점 정도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야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3선발 존 스몰츠. 그의 초구가 홈플레이트를 향했다.
[초구!! 몸쪽 낮은 공. Kang이 배트를 멈춰 세웠습니다.]
“스트라잌!!”
긴가민가 하긴 했지만 그래도 살짝 빠진 공 같았는데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왔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방금 공은 억지로 쳐 내기에도 코스가 좋지 않았다. 섣불리 배트를 휘둘렀다간 병살당하기에 십상인 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존 스몰츠가 사이 영 위너라지만 의도적으로 이런 코스에 공을 넣었다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세상에 94마일짜리 공을 이런 코스로 집어넣는 투수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건 그저 존 스몰츠의 운이 나보다 좋은 것뿐이었다.
마운드의 존 스몰츠가 두 번째 공을 뿌렸다. 바깥쪽 낮은 코스. 이번에는 확실하게 빠진 공이었다.
‘쳐볼까?’
존에서 빠진 공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자신 있는 코스의 공이었다. 이대로 잡아당겨 쳐낸다면 페어볼이 될 확률도 상당했다. 잠깐의 망설임.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그래 잘 참았어.’
며칠 전 만났던 테드가 말했었다. 나의 선구안이라면 굳이 어려운 공을 치려고 하기보다 카운트의 여유가 되는 한도 내에서 끝까지 좋은 공을 기다리는 것이 더 쉽게 좋은 타자가 되는 방법이라고. 좋은 타구가 항상 안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억지로 쳐낸 공이 안타가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현명하다고 말이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3구. 바깥쪽으로 살짝 몰리긴 했지만, 치기 딱 좋은 곳으로 공이 들어왔다.
‘실투인가?’
빌어먹을. 아니었다. 슬라이더였다. 존 바깥쪽에서 존 안쪽으로 파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슬라이더. 이미 배트를 멈춰 세우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 이미 반쯤 돌아간 배트에 한층 더 힘을 줬다.
따악!!
손바닥 전체가 얼얼했다. 좋지 않은 타구. 하지만 바닥을 세게 치고 튀어나간 공이 다행히 1루 쪽 파울라인을 크게 넘어갔다. 전광판에는 89마일이라는 숫자가 크게 찍혀있었다.
‘휘유, 슬라이더가 89마일이라니.’
네 번째 공을 던질 차례. 스몰츠의 몸이 홈 대신 1루를 향했다.
“세이프!!”
헨더슨의 표정이 묘했다. 물론 언제나 투수의 신경을 박박 긁는 그였지만 지금은 숫제 당장에라도 2루로 도루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존 스몰츠도 그것을 느낀 탓일까? 갑자기 1루로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로서는 무척 좋은 일이었다.
[존 스몰츠 선수가 헨더슨 선수를 상당히 신경 쓰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지금 마스크를 쓰고 있는 하비 로페즈 선수의 수비가 수비인 만큼 그럴 수밖에요.]
[글쎄요, 물론 하비 로페즈 선수의 통산 도루 저지율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만, 커리어 첫 올스타를 수상한 작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리그 평균 정도는 되거든요. 지금은 헨더슨 선수에게 과민하게 신경쓰는 것보다 눈 앞의 Kang에게 신경을 집중하는 편이 더 좋을겁니다. 저 선수 결코 만만한 선수가 아니에요.]
4구. 낮게 깔린 공.
‘스플리터는 없다.’
헨더슨이 2루로 가는 것을 저어하는 존 스몰츠였다. 매년 30개 이상의 와일드피치와 10개 이상의 포일을 기록하는 하비 로페즈를 상대로 스플리터를 이렇게 낮게 제구할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명백했다.
따악!!
[4구째 낮게 깔린 속구!! 쳤습니다!! 좌중간으로 흐르는 빠른 타구!!]
[1루 주자, 2루에!! 2루 지나서 3루까지!! 3루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Kang의 밀어친 안타. 순식간에 노아웃 주자 1, 3루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마지막 순간 배트가 밀렸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공이었다. 중앙 담장 너머 커다란 전광판에는 98이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다.
‘아쉽네.’
조금만 더 큼지막한 타구였다면 타점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우리 팀 타자들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만큼 만들 수 있을 때 확실히 점수를 만들어 두는 편이 좋았다.
3번 타자. 에드가르도 알폰조가 타석에 들어섰다. 코너 외야수 만큼은 아니더라도 2루수나 유격수와 다르게 몸의 크기를 키우는 편이 유리한 3루수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사이즈의 에드가르도였다. 하지만 그나마 팀에서 피아자와 지금은 DL에 올라가있는 존 올러루드를 제외한다면 가장 믿을 만한 타자였다.
‘일단 1점이라도 먹고 시작해 보자고. 그러니까 제발 최소한 외야로 퍼 올리기라도 해줘.’
하지만 24살 아직 설익은 알폰조가 감당하기에 존 스몰츠의 완성도는 너무 높았다. 타자를 윽박지르는 강속구. 그리고 그 사이사이 끼어있는 슬라이더. 특히 우타자인 알폰조에게 스트라이크인 척하다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 슬라이더는 쥐약과도 같았다.
부웅
“스트라잌!!”
그리고 마지막 스플리터가 알폰조를 침몰시켰다. 앞선 나의 타석에서 폭투와 포일을 두려워한 나머지 안타를 허용했다는 것을 억지로 극복하려는 듯한 스플리터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자, 타석에 메츠의 4번 타자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들어 옵니다.]
[지금 마스크를 쓰고 있는 하비 로페즈 선수도 대단한 타격을 지닌 포수입니다만, 그래도 포수 올스타로 선정되지 못하는 건 역시 이 선수 때문이죠. 이제 고작 데뷔 7년 차. 풀타임 6년 차입니다만 벌써 그 조니 벤치나 요기 베라와 비견되고 있는 선수입니다. 지금까지 무려 972안타, 184홈런. 지금까지의 페이스대로라면 올 시즌 커리어 1,000안타 200홈런 돌파가 유력합니다. 이는 메이저리그 모든 포수를 통틀어 가장 빠른 페이스이며, 이대로라면 최초의 포수 2,500안타 400홈런을 돌파할지도 모릅니다.]
피아자라면 믿을만했다. 요즘 타격감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아자였다. 더더군다나 그는 빠른 공이 특기인 선수들을 상대로 강한 편이었고, 삼진율 역시 그리 높지 않았다. 최소한 외야 희생 플라이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따악!!
초구, 살짝 빠지는 공을 피아자가 그대로 후려쳤다. 어마어마한 대형 타구. 하지만 아쉽게도 폴대를 상당히 비껴갔다. 그리고 두 번째 공.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피아자가 억지로 밀어쳤다.
‘저 인간 너무 칠 생각이 만땅인데.’
2구 연속 파울. 설마 노아웃 1, 3루에서 시작한 이닝이 무실점으로 끝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어?’
그리고 그 순간 우리 덕아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인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나의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벤치 코치의 사인이 가리키는 지시는 명확했다.
‘더블 스틸?’
1루에 서 있는 내가 2루로 달리고, 그때 나를 잡기 위해 포수가 2루에 공을 던지면 3루의 헨더슨이 홈까지 달리는 작전. 나와 헨더슨의 발을, 그리고 포수인 하비 로페즈의 송구와 2루수인 키스 록하트의 어깨를 생각한다면 마냥 불가능한 작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고작 1회였다. 게다가 아웃 카운트는 아직 두 개나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 타석에 선 타자는 바로 그 마이크 피아자였다. 큼지막한 타구 한방이면 2점을, 외야 플라이만 나오더라도 1점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확률적으로 따진다면 지금 굳이 이런 작전을 낼 이유는 없었다.
‘투수전이 될 거로 생각하는 건가?’
더군다나 도루하기에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2개의 스트라이크가 들어간 상황. 높은 확률로 다음 공은 빠지는 공이 될 터였다.
‘아니 잠깐만. 그러면 오히려 더 확률이 높아지는 건가?’
공이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2루로 송구하기 편하다는 말과 같았다. 즉 포수는 나의 도루를 높은 확률로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설사 내가 2루에서 아웃 되더라도 3루의 헨더슨이 홈까지 들어올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만약 로페즈가 3루의 헨더슨을 의식해서 나의 도루를 저지하지 않는다면 그 나름대로 주자 1, 3루가 주자 2, 3루의 상황이 되는 만큼 특별히 나쁠 것은 없었다.
물론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페즈의 송구 이후 록하트가 공을 받아 다시 홈으로 송구하는 것이 헨더슨이 홈까지 뛰는 것보다 빠를 경우 이번 이닝 득점 찬스는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3루에 선 저 남자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자였다.
리키 헨더슨이 할 수 없는 도루라면 그건 애초에 할 수 없는 도루다.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가장 멋진 미끼 역할일 터.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기울었다.
힐끔, 나를 바라보는 존 스몰츠의 눈빛이 느껴졌다. 약간의 경계. 아직 공은 그의 글러브 안에 있었다. 세트 포지션이 시작됐다. 스몰츠의 양손이 글러브 안에 모였다. 잠깐의 정지 동작. 그리고 그의 왼 다리가 크게 솟구쳤다. 바로 지금이었다!!
스몰츠의 손에서 공이 떠나기 바로 직전.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자, 제3구!! 어? 1루 주자 달립니다!!]
[하비 로페즈, 공을 잡아 바로 2루에!!]
스몰츠의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받아 든 로페즈가 2루를 향해 강하게 공을 뿌렸다. 하지만 늦었다. 미트의 중심으로 공을 잡아내지 못했던 탓에 미트에서 공을 빼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평소처럼 몸을 날린다면 어렵지 않게 2루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로페즈가 송구를 하는 바로 그 순간 3루에서 홈을 노리던 헨더슨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 헨더슨!! 리키 헨더슨 홈으로!!]
본능처럼 몸을 날리려는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 문득 헨더슨의 말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