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도약(4)
‘너 벤트 레그 슬라이딩을 해야 할 타이밍에도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경향이 있더라고.’
물론 언제나 가장 빠르게 2루로 들어가는 방법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0.1초의 시간이 꼭 필요한가를 따진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지금 이 작전의 우선순위는 내가 2루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역할은 헨더슨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홈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우선이었다.
벤트 레그 슬라이딩.
달리던 속도 그대로 오른쪽 앞발 끝을 하늘로 향하게 한 채 2루를 향해 미끄러졌다. 헨더슨에게 경기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지적받긴 했지만, 연습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2루 베이스를 밟은 채 공을 받으려던 2루수 키스 록하트가 나의 슬라이딩을 피해 몸을 띄웠다. 글러브로 공을 받은 록하트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간의 딜레이.
주자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세이프!!!”
[더블 스틸!! 1회 초, 메츠의 작전이 멋지게 성공합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서는 정말 뼈아픈 순간이네요. 하비 로페즈 선수의 판단이 참 아쉽습니다. 3루에 주자가 리키 헨더슨이거든요. 너무 뻔한 수였는데 그대로 넘어가 버리네요. 게다가 기왕 2루로 공을 던질 거면 Kang이라도 확실히 잡아야 했는데 그것도 아니란 말이죠. 득점권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고 또다시 득점권에 주자를 보낸 꼴이 돼버렸습니다.]
[저 역시 하비 로페즈 선수의 판단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보기엔 하비 로페즈 선수가 어떻게 했더라도 Kang을 잡아내기는 힘들었을 것 같군요. 여기 1루의 Kang을 보시면 스타트가 정말 완벽합니다. 마운드의 존 스몰츠 선수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었어요.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스몰츠 선수의 공이 스플리터였단 말이죠. 여기 이 부분에서 로페즈 선수가 공을 한 번에 뽑지 못하는 바로 이 순간, 이미 2루 도루는 확정된 거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약 잘못됐다면 상당 기간 구설에 오를만한 과감한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츠의 테이블 세터들이 그 작전을 아주 멋지게 해내면서, 1:0. 뉴욕 메츠가 한 점을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원 아웃 주자 2루. 타석에는 마이크 피아자. 그리고 볼카운트는 1-2입니다.]
사람들의 환영 속에서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헨더슨이 나에게 엄지를 내밀었다.
‘그 와중에 내가 2루수 포구를 방해하는 것까지 봤단 말이야?’
마지막까지 혀를 내두르게 하는 헨더슨이었다.
1회 추가점은 없었다. 나를 2루에 둔 존 스몰츠는 세트 포지션 대신 다시 와인드업 포지션을 취했고 한층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슬라이더에 피아자는 내야 땅볼로 5번 타자인 카를로스는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결과적으로 바비 발렌타인의 작전은 적절한 명장의 개입으로 기록됐다.
***
90년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한 선발진으로 이름 높았다. 91년 이후 작년까지 애틀랜타의 3인방에게서 사이 영을 뺏어온 투수는 오직 하나. 내가 덕아웃에서 지켜봤던 괴물 중의 괴물. 페드로 마르티네즈 뿐이었다.
덕분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애틀랜타가 선발진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에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애틀랜타가 군림하는 것은 그렉 매덕스, 탐 글래빈, 존 스몰츠로 이어지는 트로이카의 눈부신 활약이 주요했다. 하지만
따악!!
[치퍼 존스 쳤습니다!! 우중간을 가로지르는 큼지막한 타구.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갔습니다.]
[1회 말, 치퍼 존스의 역전 홈런. 브레이브스가 2:1로 경기를 앞서 나갑니다.]
1998시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타선은 내셔널리그를 통틀어 4번째로 높은 타율과 출루율, 2번째로 높은 장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단순히 수치로만 환산했을 때 브레이브스의 타선은 콜로라도에 이어 내셔널리그에서 두 번째로 강한 타선이었고, 구장의 파크팩터를 적용했을 때 그들의 방망이는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뜨거웠다.
그리고 그중에 그가 있었다.
***
사실 한국에 있던 시절 난 좋은 의미에서 경쟁력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난 모든 부분에서 최고였으니까. 하지만 한 차원 수준 높은 이곳 미국에서는 그 측정할 필요 없던 압도적인 능력들도 줄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줄 세워진 능력들 중 내가 가장 경쟁력 있는 부분은 다름 아닌 수비였다.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우중간, 우중간. 중견수 슈퍼 캐치!!!]
[맙소사, 저 선수, 또 저런 공을 잡아내네요. 정말 수비 하나만큼은 역대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때?”
“뭐가?”
“쟤 말이야 쟤, 저거 보니까 막 피가 끓지 않아?”
“뭐라는 거야 이 멍청이가, 피가 끓으면 사람 죽거든?”
옆에 앉은 프레스톤의 이야기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하지만 그 퉁명스러운 대답과 달리 그의 말처럼 나는 마치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앤드루 존스
1996년 19살의 나이에 확장 로스터로 데뷔. 월드 시리즈 1차전 연타석 홈런 기록(1952년 미키 맨틀의 최연소 월드 시리즈 홈런 기록을 44년만에 경신). 1997년 풀시즌 1년 차 0.231/0.329/0.416 신인왕 투표 5위. 2008년 부상으로 폭망할 때까지 연평균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뛰어난 공격력.
하지만 그를 진정 위대하게 하는 것은 그 타격이 아니었다. 98년 이후 10년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퍼포먼스라 일컬어지는 중견수 수비.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양대리그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가장 높은 dWAR을 기록한 것은 중견수인 앤드루 존스였다. dWAR의 가중치는 포수 12.5 유격수 7.5 중견수 2.5로 똑같은 수비력을 보였다고 가정할 때 포수는 중견수보다 WAR 1을 더 가산받는다. 따라서 중견수가 dWAR에서 1위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엄청난 일을 무려10년동안이나 쉬지않고 해냈다.
또한 중견수 수비로만 한정했을 때, 그의 dWAR은 자신 다음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대린 어스태드의 3배였다. 이것은 쉽게 말해 그가 10년간 보여준 퍼포먼스가 다른 골드 글러브 급 중견수가 30년간 보여준 퍼포먼스에 필적한다는 의미였다.
비록 이른 나이에 부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은퇴한 덕분에 명예의 전당을 투표가 아닌 베테랑 위원회의 결정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분명 필드에서의 앤드루 존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중견수였다.
‘만약 내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런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늘 생각했었지.’
만약 이대로 역사에 변화가 없다면, 저 앤드루 존스야말로 앞으로 10년간 내가 목표로 삼아야 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진짜, 세상이 넓긴 넓네. 처음 널 봤을 때도 뭐 이런 괴물딱지가 다 있나 했는데, 저기 하나 또 있네.”
“너 설마 지금 앤드루 존스의 수비가 나랑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글쎄, 나도 네가 더 낫다고 말해주고 싶긴 한데, 솔직히 지금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봐서는 막상막하는 될 것 같은데? 뭐 순간적인 속도나 움직임은 네가 더 나은 것 같기도 한데, 저 친구 타구판단이 너무 기가 막히네.”
“막상막하라 이 말이지······.”
나의 자존심을 배려한 듯 프레스톤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사실 그의 말에 내가 자존심을 상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저 풀 타임 2년차의 외야수였지만 그는 무려 앤드루 존스였다.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와 비교됐던 것이 절대 모욕이 아니었듯 외야수가 수비에서 앤드루 존스와 비교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내가 더 낫다는 걸 보여줘야겠네. 다녀올 테니까, 벤치 잘 데우고 있으라고.”
“뭐, 인마?”
프레스톤을 가볍게 놀려주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오늘 우리 에이스인 알 라이터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물론 애틀랜타의 타자들이 강력한것도 주요 원인이긴 했지만 그보다 알 라이터의 공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 더 컸다. 평소 지저분하기로 소문난 그의 컷패스트볼이 오늘 영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렇게.
[몸쪽 커터!! 자비 로페즈가 받아 칩니다!! 우측방면 커다란 타구. 부치 허스키 달려보지만 안타!! 안타입니다.]
[부치 허스키 공을 잡아 2루에!! 그 사이 자비 로페즈 1루 지나 2루로!! 2루에서, 2루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기본적으로 알 라이터의 공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2루타까지 내줄만한 공은 아니었다. 타격에서 보여주던 부치 허스키의 슬럼프가 이제는 수비까지 옮겨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은 단타, 아니 어쩌면 외야 플라이로 막아냈을지도 모르는 타구였다.
하지만 마운드의 알 라이터는 허스키를 향해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젠장. 속도 좋지.’
물론 어쩔 수 없는 실수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좋은 투수의 자세인 건 옳았다. 하지만 에이스라면 가끔은 화내고 다그쳐야 하는 타이밍이 존재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부치 허스키의 플레이는 그래야만 하는 안일한 플레이였다.
[타석에 6번 타자, 앤드루 존스가 들어옵니다. 바로 직전 수비에서 슈퍼 세이브를 보여주었던 앤드루 존스. 수비에서의 좋은 느낌을 타석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지 기대 되는군요.]
[보통 수비에서 저런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건 컨디션이 좋다는 이야기이고, 그 말은 타석에서의 성적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저 선수 같은 경우 수비에서 워낙 저런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지라 이게 컨디션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하하하.]
프레스톤에게 내 수비가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큰 소리 치고 나오긴 했지만 사실 수비라는 것은 타격처럼 나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타격이 1:1 승부라면 수비는 사냥꾼의 사냥처럼 오랜 시간의 기다림 속에서 생겨나는 한 번의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알 라이터의 포심에 앤드루 존스의 배트가 허공을 휘저었다.
“스트라잌!!”
자세를 낮추고 타석을 노려보았다. 반응속도는 높여주지만, 판단능력은 저하되지 않는 수준의 적절한 긴장감이 전신을 맴돌았다. 2구째. 알 라이터의 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퍼엉!!
볼이었다. 잠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근육을 이완시켰다. 홈플레이트 너머 피아자가 던져준 공을 알 라이터가 받아들었다. 나의 자세가 다시 낮아졌다. 제3구째. 알 라이터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그리고 앤드루 존스의 배트가 돌아갔다.
‘우측 후방!!’
타격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큰 타구였다. 그대로 등을 돌린 나의 몸이 우측 후방으로 쏘아졌다. 전력을 다한 질주에 전신의 근육이 맹렬히 산소를 요구했고, 그에 맞춰 심장이 크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아직, 아직이다.’
뒤를 돌아 공을 살필 시간이 없었다. 푸른 잔디 너머 붉은빛의 워닝 트랙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 내 키보다 높은 초록빛의 펜스가 서 있었다. 달리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하늘 높은 곳 하얀 점 하나가 포착됐다.
‘젠장!!’
타구는 내 예상보다 더 우측으로 치우쳐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에 왼쪽 다리가 비명을 내지른다. 아직이었다. 아직도 조금 부족했다. 안전하게 바닥을 두들긴 공을 잡아야 했을까? 아니었다.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나의 몸이 붕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