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도약(5)
워닝트랙의 고운 흙이 나의 좌반신을 쓸었다. 그리고 쭉 뻗은 왼손 글러브에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다.
[잡아냈습니다!! 그가 잡아냈어요. 하나님 맙소사. Kang이 앤드루 존스의 타구를 잡아냈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플레이입니다.]
[2루 주자, 자비 로페즈 3루로 달립니다.]
착지자세는 그리 좋지 못했지만, 충격은 크지 않았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 드넓은 터너필드의 외야가 펼쳐졌다. 한때는 올림픽 메인 경기장으로, 그리고 훗날에는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사용될 광활한 그라운드였다. 그리고 저 멀리 작년 내셔널리그 올스타에 빛나는 포수 자비 로페즈가 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빠르지 않았다. 홈플레이트에는 피아자가 미트를 벌린 채 앉아있었다.
‘가능해’
홈플레이트까지는 380피트. 116미터. 나의 몸이 지면을 박찼다. 왼발부터 크게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오른손 끝에 야구공의 실밥이 느껴졌다. 도움닫기를 통해 생긴 추진력, 그리고 허벅지부터 엉덩이를 거쳐 척추기립근을 타고 올라온 탄력이 온전하게 손끝에 놓인 공 하나에 집결됐다. 116미터를 3.4초 만에 주파하는 강속구. 홈플레이트 앞 6미터 지점에서 원바운드된 공이 피아자의 미트에 정확하게 꽂혔다.
[Kang 정확한 홈 송구가 자비 로페즈 선수를 3루에 묶어 놓습니다.]
[그의 송구는 이미 정평이 나 있으니까요. 자비 로페즈 선수. 무리하지 않는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엄청난 슈퍼 세이브였습니다. 이거 앤드루 존스 선수로서는 2루타를 도둑맞은 기분일 거예요.]
[바로 직전 이닝 앤드루 존스 선수가 보여줬던 호수비보다 훨씬 대단해 보이는 수비였습니다. 정말 어떻게 저렇게 공을 쫓을 수 있는지 놀랍군요.]
[글쎄요, 물론 대단한 모습이긴 했습니다만 앤드루 존스 선수의 수비장면보다 대단했다고 단언하긴 힘든 것 같습니다. 물론 모르는 분이 보시기엔 Kang의 화려한 수비장면이 더 대단해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실제는 조금 다르거든요. 앤드루 존스 선수의 경우 타구판단 능력이 워낙 탁월한 탓에 본래는 처리가 매우 어려운 공도 쉽게 처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어요. 방금 전 Kang같은 경우 반응이야 빨랐다지만 낙구 지점 예측이 조금 아쉬웠거든요. 아마 앤드루 존스 선수였다면 미리 와서 공을 잡지 않았을까 싶네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Kang의 낙구 지점 예측이 조금 틀린 점은 맞습니다만, 앤드루 존스 선수라면 미리 와서 잡았을 거라는 건 Kang의 운동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군요. 두 선수의 주력 차이를 고려한다면 앤드루 존스 선수였다면 정확한 낙구 지점에 전력으로 달려왔다고 해도 다이빙 캐치가 필요한 공이었으리라고 봅니다.]
언제나처럼 알 라이터가 등을 돌려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평소 별거 아닌 수비에 감사를 표하는 알 라이터였지만, 지금은 유독 더 진심을 담은 것 같은 인사였다. 하긴 바로 직전에 부치 허스키의 암 걸릴 것 같은 수비를 경험하고, 이런 수비를 목격했으니 항암 치료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겠지. 라이터의 인사에 나도 손을 들어 화답했다.
[자 타석에 대니 바티스타 선수가 들어오는군요. 경기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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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괴물 같은 놈이!!”
“야, 야. 놔 인마 아파.”
바티스타의 외야 플라이를 가볍게 처리하고 돌아온 덕아웃. 프레스톤 녀석이 달려들었다.
“이 자식, 이거. 메이저 조금 먼저 올라가더니 뭘 주워 먹은 거야.”
“주워 먹긴 뭘 주워 먹었다고 그래. 난 원래 태어날 때부터 이랬거든?”
“비리비리해서 마이너에서도 죽 쑤던 게 엊그제 같은데 큰소리치기는.”
“그래서 그 죽 쑤던 사람한테 중견수 자리를 뺏기셨어?”
“뺏긴 게 아니라, 내가 그 타격에 집중한다고 코너 외야수로 그냥 간 거거든?”
“그래서 타격은 좀 늘었고?”
“당연하지. 너도 매일 봤잖아. 아주 담장 밖으로 뻥뻥 날리는거.”
“연습에서 담장 밖으로 못 날리는 선수가 어딨냐? 실전에서 날려야 그게 진짜지.”
“내가 또 실전 하나는 기가 막히지. 두고 보라고. 기회만 오면 내가 아주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프레스톤과 가볍게 투닥거리는 사이 경기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선두타자인 마이크 피아자의 안타. 그리고 카를로스의 볼넷. 노아웃 1, 2루 라는 절묘한 상황에서 6번 타자인 루이스 로페즈가 타석에 들어섰다. 3: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역전을 향한 절호의 찬스가 돌아온 것이다.
“야, 어쩌면 그 기회 지금 올 것 같은데?”
오늘 발렌타인 감독은 1회부터 아주 제대로 명장놀이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대기타석에 선 남자는 부치 허스키. 현재 팀 내에서 가장 엉망진창인 컨디션을 자랑하는 코너 외야수였다.
***
꿀꺽.
프레스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애써 마른 침을 삼켜 봤지만 바싹 마른 목구멍의 까끌까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점수는 3:1. 원 아웃 주자 1, 2루. 큰 것 한방이면 그대로 경기가 뒤집히는 상황에서의 대타. 메이저 데뷔 타석 치고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다.
‘할 수 있겠지?’
바싹 마른 입안과 달리 등줄기는 마치 홍수라도 난 것처럼 축축했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 잠시 고개를 돌려 덕아웃을 바라봤다.
‘파이팅!!’
속 편한 친구놈의 태평한 응원. 뭐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덕아웃에 앉아있는 저 녀석은 고작 이런 타석 한두 번에 일희일비할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고작 3개월 사이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약간 앞서는 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손에 닿는 곳에 서 있던 친구였다. 하지만 빅리그에서의 3개월은 그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격차를 만들어버렸다. 물론 프레스톤 역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난 3개월, 그가 감내했던 훈련은 야구 배트를 손에 쥔 이래 가장 혹독했다. 단지 저 괴물의 진보가 너무 빨랐을 뿐이었다.
‘재능의 차이라 이건가?’
자라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재능이라는 이름의 벽. 메이저리그의 엄격한 잣대는 그저 천재라고 함께 뭉뚱그려지던 옥석을 엄격하게 가려냈다. 저기 저 얄미운 녀석이 진짜 다이아몬드라면 프레스톤 자신은 보석을 흉내 내던 싸구려 큐빅에 불과했다.
마운드 위, 찬란하게 빛나는 메이저 최정상의 투수가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춤을 추는 것처럼 달아나는 슬라이더. 전광판에는 89마일이라는 숫자가 크게 찍혀있었다. 터무니없는 공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일상처럼 마주치며 골라내는 공이기도 했다.
‘이래서야 큰소리친 게 너무 민망하잖아.’
프레스톤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큰소리가 온통 허풍이라는 사실을. 그저 자신과 경쟁하던 라이벌이 저만치 나갔음에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더 콧대를 세웠음을 말이다.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녀석의 모습에는 의심이 없었다. 녀석은 자신의 허풍을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저 멍청한 친구 놈은 프레스톤 자신을 마치 대단한 타자인 것처럼 취급해주고 있었다.
뻐엉!!!
“스트라잌!!!”
[존 스몰츠의 97마일 패스트 볼. 프레스톤 윌슨 속수무책으로 지켜봅니다.]
[실링이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선수입니다만, 그래도 갑작스럽게 이런 중요한 자리에 데뷔 타석을 치르는 건 조금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짜증이 났다. 데뷔 타석. 0-2로 완벽하게 제압당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에는 한점 의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위대한 야구선수라 믿어 의심치 않던 프레스톤 자신의 눈빛이었고, 아버지보다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있다 격려해주는 어머니의 눈빛이었으며 1라운드로 지목됐음을 알렸을 때, 네가 해낼 줄 알았다며 미소 짓던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젠장, 그래 봐야 아버지 이름값 때문에 1라운드로 지목된 머저리에 불과한데 말이지.’
딱!!
[빗맞은 공, 1루 파울라인을 크게 벗어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짜증 나는 것은 그런 눈빛들이 말하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리 연마하고 닦아내도 결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한순간도 포기할 수 없었던 프레스톤 윌슨이라는 머저리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투수 제 4구. 셋 포지션!!]
‘에이, 모르겠다. 저만한 투수가 이제 막 마이너에서 올라온 애송이를 잡는데 도망가겠어?’
휘둘렀다. 휘두르고 또 휘둘렀으며 다시 휘둘렀다. 물집은 굳은살이 됐고 굳은살은 다시 깎여나갔으며 그렇게 깎여나간 자리에 다시 물집이 생기길 수십 차례.
마침내 굴절률 2.1의 싸구려 큐빅이 크게 빛났다.
[프레스톤 윌슨. 그대로 받아쳤습니다. 좌측 폴대 쪽 큽니다. 큼지막한 타구.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갔습니다.]
[프레스톤 윌슨!! 데뷔 타석 대타 석 점 홈런. 프레스톤 윌슨이 홈런으로 메이저리그 데뷔를 신고합니다.]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없고, 큐빅은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아름답게 세공된 큐빅은 투박한 다이아몬드보다 아름다운 법이었다. 프레스톤이 크게 가슴을 펴고 베이스를 돌았다.
***
스윙을 끝낸 녀석의 뒷발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순간 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마치 베이브 루스, 아니 브라이스 하퍼를 연상케 하는 압도적인 폭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폭력이 담겨있었기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스윙이었다.
‘저 괴물 같은 놈이!! 아무리 성공이 확정된 인간이라고 해도 그렇지. 대뜸 데뷔 타석 홈런이라니.’
기분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이단 옆차기로 격렬하게 환영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룰은 룰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베이스러닝을 끝낸 녀석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뭐 녀석 역시 당연하다는 것처럼 씩씩하게 덕아웃으로 돌아와 허공을 향해 자연스럽게 하이파이브를 날려댔다.
그리고 잠시 후, 피아자가 먼저 달려갔다.
“루키, 잘했어. 안 그래도 무릎 때문에 뛰기 힘들었는데, 아주 선배를 공경할 줄을 아는구만.”
“하하, 제가 좀 그런 경향이 있죠.”
망할 놈, 피아자는 나도 아직 어려운데 넉살도 좋았다. 서둘러 달려가 녀석의 몸을 구석구석 두들겨 주기 시작했다. 그간 녀석이 나를 두들겼던 것들에 이자를 담뿍 담아서 말이다.
“축하한다!! 데.뷔.전. 홈런.”
“컥, 야. 야. 그만. 그만. 뼈 맞았어. 아 나 뼈 맞았다고.”
올 시즌 우리 팀은 아주 약간의 플러스알파만 더해진다면 충분히 포스트 시즌을 노릴만한 전력이었다. 물론 저 괴물딱지들이 모여있는 브레이브스를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저 브레이브스를 제외한다면 내셔널리그의 그 어떤 팀도 우리보다 낫다고 확언하긴 힘들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노리는 것은 각 지구의 우승팀들을 제외한 전체 승률 1위. 바로 와일드카드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떤 뼈 맞은 얼간이가 뉴욕 메츠의 전력에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