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전설의 시작(1)
카트리나 에반스.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 중계권을 가진 뉴욕 지역 방송국 WOL-TV의 야구 관련 토크쇼에서 만났던 매력적인 금발의 아가씨. 그녀와의 관계는 일 회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종종 나는 그녀와 시간을 함께했었고 그것은 그녀와 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관계였다.
“진호, 나 Fox 쪽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어.”
“Fox? Fox라면 Fox Sports를 말하는 거야? 설마 전국중계?”
지난 86년 개국한 Fox TV는 지속적으로 스포츠에 관심을 쏟아왔다. 그리하여 94년에는 NFL을 96년에는 MLB의 중계권을 따내며 세를 넓혔다. 더군다나 Fox TV는 미국의 4대 지상파 중 하나로 손꼽혔다. 물론 그 자회사 중 하나인 Fox Sports는 케이블 방송이었지만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전국 보급률이 90%에 달할 만큼 거대한 채널이었다.
“아냐, 거기까진 아니고, 이번에 Fox Sports에서 대학 축구 경기 중계권까지 가져오는 바람에 기존에 중계하던 메이저리그 방송 중 일부가 FX 쪽으로 넘어가거든.”
“FX? FX면 시트콤 채널이잖아.”
“맞아. 뭐 덕분에 FX에서 지방 방송의 스포츠 캐스터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는데, 그쪽에 아는 선배가 있어서, 운 좋게 나한테도 자리가 돌아온 것 같아. 90분짜리 심야 쇼의 공동 MC 자리를 제의하더라고.”
FX 역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방송이었다. Fox Sports만큼 전국 보급률이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50%에 달하는 전국 보급률을 자랑하는 방송이었다. 지금 카트리나가 일하는 지역방송인 WOL-TV가 일본의 독립리그라면 FX는 메이저리그까진 안 되더라도 AA 리그 정도는 된다고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FX에서 쇼를 진행한다는 것은 훗날 Fox Sports 아니 어쩌면 Fox TV로까지 진출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과도 같았다. 스포츠 캐스터로서는 로열로드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15분짜리 한 꼭지짜리 프로그램 진행자에서 90분짜리 프로그램의 공동 MC라니 이만저만한 성공이 아니었다.
“축하해. FX에서 공동 MC라니. 엄청난 스텝 업이네.”
“어, 뭐 그런 셈이지. 아무래도 몇 년이나 살아온 뉴욕을 떠나서 캘리포니아로 가야 하는 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런 큰 성공을 눈앞에 둔 것 치고는 카트리나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아마 23살의 강진호였다면 그렇게 망설이는 그녀를 잡았을 것이다. 23살은 사랑과 육욕을 구분하기 너무 어린 나이였고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나이였다.
“리나, 이건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어. 네가 항상 이야기했었잖아. CNN의 한나 스톰처럼 되고 싶다고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거야.”
그리고 어리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꿈꿔온 미래와 데이트한 지 3개월 된 남자를 같은 저울대에 놓는 것은 그저 한순간의 충동이며 호르몬의 장난일 뿐이었다.
“역시 그렇겠지?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겠지?”
“그래, 뭐 캘리포니아면 조금 멀긴 한데, 그래도 시즌 중에도 일고여덟 번은 가는 곳이잖아. 종종 찾아갈 테니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카트리나는 결코 멍청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이것이 공허한 약속이었으며 실질적인 관계의 종결선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것이 그녀 자신에게도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 역시도. 그렇기에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잘 관리된 매끈한 몸이 나에게 안겨 왔다. 그 마지막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
6월 5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불같이 타올랐던 나의 방망이는 7월 한 달간 조금 잠잠했다. 지금은 팀 동료가 된 노모에게 홈런을 하나 뽑아내긴 했지만, 시즌 20홈런도 가능하리라 예상됐던 6월의 페이스를 생각한다면 분명 아쉬운 성적이었다.
-프로야구팀 A 코치 ‘강진호 선수 부진의 원인은 그의 버릇이 메이저리그 각 팀에 노출된 탓.’-
-대학야구팀 K 감독 ‘아직 어린 선수라 체력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딱히 초조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었다. 아니 심지어 기계라 해도 기름칠하고 닦고 조일 시간은 필요한 법이었다. 그보다 약한 인간의 몸이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최상이 아닌 상태를 제법 잘 넘겼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홈런이 끊긴 만큼 장타율은 제법 손해를 봤지만, 그래도 타율만큼은 제법 선방하여 2할 8푼대를 유지했고, 도루 역시 37개나 성공시키며 헨더슨과 토니 워맥, 그리고 크레이그 비지오에 이어 리그 4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게다가 장타율 역시 지난 다저스전에서 타격 자세를 바꾼 이후 8월 들어 꾸준히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안타 수가 조금 줄어들기는 했지만, OPS로 표현되는 타자로서의 생산성만큼은 분명 증가하고 있었다.
현재 내셔널리그 신인왕의 유력한 후보는 시카고 컵스의 케리 우드(22경기 10승 4패 ERA 3.17),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의 일루수 토드 헬튼(0.318/0.381/0.527, 17홈런) 그리고 나였다. 그 밑으로 애리조나의 트레비스 리나 애틀랜타의 케리 라이튼버그 등의 선수들이 따라오고 있긴 했지만, 8월도 태반이 지나간 지금 시점에서는 그들이 남은 기간 배리 본즈나 페드로 마르티네즈급의 활약을 보이지 않는 이상 신인왕은 우드와 헬튼 그리고 나 셋 중의 하나가 타는 것이 확정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생에 한 번밖에 도전할 수 없는 그 영광을 남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Kang이 침착하게 공을 골라내며 1루에 안착합니다.]
[6경기 연속 출루입니다. 밥 월콧, 조금 아쉬운 결과네요. 차라리 수비를 믿고 조금 더 과감하게 승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Kang 같은 경우 루상에서 굉장히 뛰어난 주자거든요. 저렇게 허무하게 출루를 허용해선 안 되는 타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올 시즌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참가하는 신생구단답게 그 전력이 매우 처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상당한 돈을 투자한 덕분에 타선은 나쁘지 않았지만, 특별한 에이스가 없는 투수진은 부실했고 신생팀 특유의 경험 부족은 그들에게 지구 꼴찌라는 성적을 선물했다.
시애틀에서 신생팀 특별지명으로 애리조나에 입단한 오늘의 선발투수 밥 월콧 역시 그리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다. 물론 한 명의 야구선수로서는 메이저리그에 올라와 선발로 뛴다는 것만으로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올 시즌 그가 선발투수로 기록하고 있는 평균자책점은 무려 6.87. 애리조나의 수비가 단단하지 못한 것을 고려해도 상당히 처참한 성적이었다.
네 걸음의 리드폭. 마운드의 투수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 이길 수 있을 때 이기는 것이 진짜 프로였다.
마운드의 밥 월콧이 셋 포지션에 들어갔다. 잠깐의 정지 동작 이후 이어지는 투구 동작. 너무 정직했다. 그의 피칭 타이밍이 나에게 완벽하게 읽혔다.
[1루 주자, Kang 뜁니다. 켈리 스티넷 공을 잡아 2루에.]
“세이프.”
[Kang이 여유롭게 안착합니다. 시즌 서른여덟 번째 도루 성공. Kang, 이 페이스대로라면 50도루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제2구. 타석의 에드가르도가 거세게 배트를 휘둘렀다.
[에드가르도 쳤습니다. 우익수 방향 강한 타구. 카림 가르시아 달려갑니다.]
에드가르도의 타구가 좋지 않았다. 물론 애리조나의 우익수인 카림 가르시아의 수비범위는 리그 우익수들을 통틀어 손에 꼽힐 만큼 좁았지만 그래도 저런 공을 잡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태그업은 해볼 만하겠네.’
2루를 밟은 채 3루 코치의 사인을 기다렸다. 잠깐의 시간. 3루 코치의 손이 올라왔다. 여유로우리라 예상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유를 부릴 이유는 없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3루로 돌진했다. 그런데 3루 코치의 손동작이 조금 이상했다.
‘응?’
거칠게 풍차처럼 돌아가는 그의 오른팔. 고민이나 판단 따윈 일단 밀어두었다. 나의 몸이 왼쪽으로 틀어졌다. 홈플레이트, 자세를 잡고 공을 기다리는 포수의 모습이 보였다. 어설펐다. 그의 자세에는 적극적으로 주자를 막으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싱겁게 나의 발이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세이프!!!”
[아, 이게 뭔가요.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는 희생 플라이라니요.]
[카림 가르시아 선수 타구 처리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솔직히 저런 타구를 다이빙 캐치 한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게다가 그렇게 공을 잡았으면 그대로 송구를 해야 하는데 너무 늦었어요.]
[물론 Kang이 너무 빠르다는 점도 있긴 했습니다만, 이건 평균적인 수준의 메이저리그 외야수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플레이였습니다.]
7:3 승리. 아쉽게도 오늘 경기에서 나는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볼넷을 두 개나 골라냈고 도루 역시 하나를 기록한 만큼 충분히 내 할 몫은 다 한 경기였다.
‘어? 근데 오늘 기자가 왜 이렇게 많지?’
현재 한국에서 나의 인기는 대단했다. 물론 내가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었지만, 항상 내 경기를 따라다니는 서너 명의 한국 기자들, 그리고 부모님의 전화통화를 통해 그것을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열 명이 넘는 기자는 조금 이상했다.
“강진호 선수, 최근 부진했던 이유가 연애 때문이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터무니없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한순간 내 귀를 의심케 하는 질문이었다. 부진? 연애?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그리고 최근 나의 성적을 제대로 살펴봤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저기, 지금 혹시 제 성적이 어떤지는 알고 질문하시는 겁니까?”
“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6월에 비해 상당히 부진하고 계시더군요.”
“부진이라고요?”
“최근 뉴욕데일리에서 강진호 선수의 은밀한 데이트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기로는 강진호 선수의 부진이 그 여성과의 데이트 이후부터 시작됐다고 하는데요.”
“죄송합니다.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네요. 이건 일단 무슨 일인지 저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를 붙잡는 기자들을 뿌리치고 구단 사무실로 향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해명 인터뷰가 아니었다.
“급한 일입니다. 당장 보리스 씨 연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