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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41화 (41/210)

# 41화.

전설의 시작(2)

야구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나의 성적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화가 났다. 또한, 그런 인간들에게 휘둘려야 하는 나의 현실은 화를 넘어 분노의 감정까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인터넷은커녕 TV 중계조차 태평양 해저 광케이블 대신 비싼 위성 송수신으로 처리하는 시대였다. 나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전적으로 몇몇 TV와 뉴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젠장,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다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 나에 관한 이야기는 그냥 이 인간들이 펜대를 어떻게 굴리느냐에 따라서 180도 다르게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는 거잖아.’

21세기 사람임을 자부하는 나였지만 그래도 1976년생에 태어난 나에게 90년대는 아득히 머나먼 옛날이라기보다 21세기에 한없이 가까운 시대였다. 그렇기에 돌아온 이후에도 이 시대의 한국 사회를 특별히 깊숙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 돌이켜보건대 90년대의 한국은 불과 몇십 년 후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버젓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우선 성(性)적인 부분에서 한국은 아직 지극히 보수적이었다. 일례로 특별한 판례이긴 하지만 1998년 올해 고등법원에서는 여고생 강간범에게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내린 적이 있었다. 강간범이 피해 당사자도 아닌 피해자의 부모로부터 ‘딸이 자란 뒤 결혼시키겠다.’는 합의를 받아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공인(公人)에게 요구되던 책임감 역시 특별했다. 98년 현재 메이저리그 선수는 공인(公人)이었고 대중들에게 환호를 받는 만큼 사생활까지도 특별한 책임감을 가져야 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찬화 선배가 일본인과 결혼한다는 이야기가 퍼졌을 때 그가 받았던 비난은 상당했다. 찬화 선배의 에이전트에서는 이에 대해 그녀가 재일교포 3세이며 한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사로 널리 알리고 그것이 대단한 미담임을 홍보해야 할 정도였다.

1998년. 이 시대에 메이저리거라는 공인(公人)이 금발의 여성과 자유롭게 성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언론의 뭇매를 맞더라도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처음 나의 이야기를 들은 보리스는 대체 어째서 나의 연애가 문제가 되는지를 되물었다. 하지만 나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한인 커뮤니티의 폐쇄성은 유명한 것이었고, 더불어 보리스는 해외 각국의 보수적인 사회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미국 내 한인 사회의 폐쇄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다만 그것은 그저 소수커뮤니티의 특성 정도로 생각했지, 한국 정도로 발달한 국가의 사회 분위기 자체가 그럴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제 불찰이군요.”

“아뇨. 어쨌든 아무래도 젊은 세대나 서양 쪽 문화를 많이 접한 세대들은 조금 다릅니다만 4, 50대 어르신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쪽 시장의 수익이 워낙 매력적이니 지금 그런 것을 포기하긴 힘들고 그렇다면 이건 이대로 내버려 둘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조금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습니다. 역시 반박기사를 내야 할 것 같은데, 실례지만 혹시 그 여성분과 아직도 만남을 이어가고 계십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우리 쪽 기자들을 통해 열애 자체를 부정하는 기사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적에 관해선 진호 씨가 얼마나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끙, 눈이 달렸으면 진호 씨의 성적을 보고 부진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을 텐데. 참.”

“열애를 부정한다 라······.”

“네, 그리고 그 여성분께도 따로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그쪽에서 긍정해버린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테니깐요. 물론 직접 이야기하기 곤란하시다면 저희 쪽에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한국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그쪽에서 가벼운 만남이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최악의 경우 국가대표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 같군요.”

젠장, 물론 그럴 확률은 희박했다. 하지만 기자들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여론이라는 것이 달아오른다면, 이런 사적인 문제에도 이미 확정된 국가대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또한, 화가 났다. 이미 헤어진 여인에게 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와의 지난 만남을 없었던 것이라 해달라고 해야 하는 비루함이라니.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보리스는 알지 못하는, 하지만 나는 알고 있는 저 미래. 세상이 어떻게 변했고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생각이 닿았다.

***

“아자!! 선발이다.”

“좋으냐?”

“당연하지. 그간 너무 감질났어. 이번에 아주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

애리조나와의 2차전. 프레스톤의 첫 선발 출전이 결정됐다. 뭐, 발렌타인 감독으로서도 프런트에게 이정도로 꼬장을 부렸으면 충분히 부린 셈이었다. 게다가 최근 팬들의 반응 역시 심상치 않았다. 대타로 나왔던 프레스톤이 제대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모르겠지만, 데뷔 타석에서 대뜸 홈런을 날린 이후 가끔 대타로 출전했을 때마다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는 프레스톤을 출전시키지 않는 것은 발렌타인 감독에게도 제법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 선발투수는 오마 달. 93년 다저스에서 데뷔해서 96년 몬트리올로 트레이드 됐고, 역시 이번 신생팀 특별지명으로 애리조나에 자리 잡은 선발투수였다. 한가지 특별한 점은 데뷔 이후 5년간 꾸준히 불펜투수. 특히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로 뛰어온 그가 애리조나에서 갑자기 선발투수로 보직을 변경했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단순히 특이한 일이 아닌 특별한 일이 된 까닭은 그 와중에 그가 선발로서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애리조나의 처참한 수비진을 등에 업고 그가 기록하고 있는 ERA는 무려 2.97. 그의 커리어하이 성적인 92년의 평균자책점보다 0.4점이나 낮은 점수였다.

한 팀의 에이스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점수였지만, 그래도 어제의 선발이었던 밥 윌콧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기량의 소유자임은 확실했다.

[뉴욕 메츠, 그리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2차전. 오늘 다이아몬드백스의 마운드에는 그들의 에이스. 오마 달 선수가 올라와 있습니다.]

[지난 볼티모어전에서 7이닝 1실점의 놀라운 활약을 선보이며 팀에 승리를 안겨줬던 오마 달 선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애리조나는 그날 승리 이후 단 한번도 승리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 과연 오늘 그가 애리조나의 연패를 끊을 수 있을까요?]

[오마 달 선수야말로 작년 말에 있었던 신생팀 특별지명에서 애리조나가 거둔 최대의 수확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사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몬트리올의 팬이 아니라면 오마 달이라는 선수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았을 겁니다.]

[상당수의 전문가들 역시 애리조나의 선택에 의구심을 표했었습니다만, 애리조나의 스카우팅 디렉터 돈 미첼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이번 시즌을 통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오프 시즌 동안 새롭게 장착한 체인지업이 정말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죠?]

[네, 그렇습니다. 올 시즌 우타자들을 상대로 정말 쏠쏠하게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오늘 타순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외야에 프레스톤을 기용한 것처럼, 내야 역시 가장 많은 출전을 하고 있던 3루수 에드가르도 프랑코와 2루수 카를로스 베르가를 대신해 토니 필립스와 맷 프랑코를 투입한 탓이었다.

‘3번이라.’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생각하기에 3번은 특별했다. 1998년. 아직 많은 사람들이 4번 타자가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였지만, 이미 이곳 미국에서는 가장 특별한 타자에게 3번을 주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이 드문드문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그런 생각으로 나에게 3번을 준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최근 늘어나는 타구의 비거리가 그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지금 우리 팀의 2번 타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헨더슨을 진루시키는 진루타라면, 3번 타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를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외야로 향하는 안타였으니 말이다.

언제나처럼 헨더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며칠 전 따로 하루를 쉬었던 만큼 생생한 얼굴이었다. 언제나 경기를 뛰고 싶어 하는 헨더슨이었지만 8월도 끝이 보이는 지금 시점에서 종종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제법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특유의 납작 엎드린 것 같은 타격 자세. 마운드에 선 오마 달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헨더슨의 배트가 돌아갔다. 그만큼 좋은 공이었다는 이야기일까? 항상 신중하게 공을 지켜보는 헨더슨답지 않은 과감함이었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잘 맞은 타구가 좌익수 정면으로 향했다.

아웃!!

아쉬운 표정의 헨더슨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번 타자인 토니 필립스가 타석에 섰다. 올해 팀에서 내야의 유틸리티로 활약 중인 그는 헨더슨과 동갑으로 17년째 메이저리그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선수생활 내내 특별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적은 없었지만 괜찮은 수비와 부족한 공격력으로 오클랜드와 디트로이트에서 제법 길게 선수생활을 했고, 30대 이후로는 이팀 저팀을 오가며 선수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수비가 되는 내야 유틸은 어느 팀에서나 수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산증인이랄까?

부웅!!

“스트라잌!! 아웃!!”

[5구째, 체인지업에 토니 필리스의 배트가 헛돌아갑니다.]

물론 0.211이라는 타율이 증명하듯 타석에서는 그리 기대를 걸 수 없는 타자였지만 말이다.

[이어지는 3번 타자. Kang, Kang입니다.]

[이번 시즌 3번으로 출전하는 것은 처음이로군요. 아무래도 Kang의 빠른 발을 생각한다면 테이블 세터로 활용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깐요. 오늘 라인업 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군요.]

1회 초 투아웃 주자 없음. 부담 따윈 전혀 생기지 않는 홀가분한 상황이었다. 마운드의 평범한 투수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바깥쪽으로 날아드는 공. 최근 워낙 대단한 투수들의 공을 많이 봐서였을까? 평범한 공이었다. 나의 배트가 세차게 돌았다.

부웅

“스트라잌!!”

허공을 가로지른 배트가 처량했다. 슬라이더였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헛스윙 때문이 아니었다. 최근 이름값 높은 투수들을 상대로 제법 괜찮은 모습을 몇 번 보였다고 그새 교만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두 자리 승리를 거두고 있는 평자책 2점대의 투수가 만만한 투수일 리 만무했다.

툭툭

잠시 배팅 박스 밖으로 나가 가볍게 옷깃을 털었다. 배팅 장갑을 조여 맺고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다시 배팅 박스로 돌아갔다. 마운드에는 그냥 평범한 투수가 아닌 애리조나의 에이스 오마 달이 서 있었다.

오마 달의 와인드업. 그의 손끝에서 빠른 공이 튀어나왔다. 바깥쪽 꽉찬 코스? 아니었다. 이건 존을 벗어난 공이었다.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제3구. 바깥쪽 코스. 하지만 이질적이었다.

‘커브다.’

무리하지 않았다. 반쯤 돌아가던 배트를 멈춰 세웠다. 나의 판단으로는 존 밖으로 빠진 공이었다.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2-1. 타자에게 굉장히 유리한 카운트였다. 2-1에서는 누구나 3할 타자가 되는 법이었다. 이제 투수의 공이 어떻게 오건 가장 좋은 공만을 노리며 침착하게 볼을 골라낼 수 있었다,

제4구. 이번에도 역시 바깥쪽 낮은 곳 깊숙하게 오마 달의 공이 파고들었다.

‘살짝 빠질 것 같은데. 이건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면 밖으로 나가겠네.’

당연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나의 잠재의식인지 아니면 본능인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속삭이곤 한다.

‘휘둘러.’

이성이 설득했다.

‘이 공은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1-3이 될 확률이 높은 공이다.’

그리고 본능이 소리쳤다.

‘더 세게,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스윙으로 그대로 날려버려!!’

그리고 나의 배트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궤적으로 돌아갔다.

따악!!

[4번째, 바깥쪽 낮은 코스. 쳤습니다!!! 오른쪽으로 향하는 큼지막한 타구. 넘어가나요?]

상쾌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굳이 전력으로 달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넘어갔습니다!! 홈런, 홈런입니다. 메츠의 Kang이 시즌 일곱 번째 홈런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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