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전설의 시작(3)
일단 기본적으로 나는 카트리나와의 연애를 비밀에 부치지 않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1998년 뉴욕에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은 그들의 유명세에 따라 화제가 될 수는 있어도 잘못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와 카트리나는 뉴욕에서 제법 유명한 얼굴들이었다. 즉 카트리나 본인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할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의미였다.
“무슨 말씀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고, 10,000Km나 떨어진 한국 쪽에는 기자들만 적절히 통제하면 되는 일입니다. 물론 몇몇 기자들의 돌출된 행동이 있을 수도 있긴 합니다만, 다수의 언론을 먼저 장악한다면 걱정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보리스가 틀렸다. 당장 내년만 되더라도 한국은 초고속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며 그것을 시작으로 시민 개개인이 정보의 공급자가 되는 세상이 찾아온다. 정보를 공급하는 공급자와 소비하는 소비자가 더이상 구분되지 않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통제된 언론은 풀리고, '강진호'라는 공인(公人)의 사생활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쉽게 퍼진다. 그리고 내가 계속 유명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면 그들 중 나의 과거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거론하는 이들 역시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알려진 사실들이 공식적인 나의 입장표명과 충돌한다면 그 여론이 좋은 방향으로 흐를 리는 만무했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입방아가 나의 인생, 나의 커리어를 결정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악플이 어느 유명한 여배우의 커리어를 망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삶을 끝냈던 것처럼 많은 타인의 목소리를 완벽히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기자들의 기사 내용에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핑계 대기는.’
쓴웃음이 밀려왔다. 그랬다. 이것은 나 자신조차 속일 수 없는 비루한 핑계였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10.000Km 떨어진 이곳의 소식은 인터넷이 보급되고, 유튜브가 찍어댄다고 해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제어를 벗어날 만큼 인터넷이 보급될 때 즈음이면 한국의 사회 분위기도 많이 완화되어 나의 사생활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큼 성숙해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내 감정의 문제였다.
나는 카트리나에게 쪽팔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내려진 감정적인 결론은 현실을 왜곡했으며 나의 이성을 설득하기 위한 허접한 변명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보리스가 옳았다.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감정이 외치는 소리를 무시한 채로 무조건 정답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전 여친에게 쪽팔리고 싶지 않다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수컷의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보리스의 정답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해답이 나에게 존재했다.
“미국 병으로 갑시다.”
“네?”
***
[완벽하게 빠지는 공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넘겨버리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최고의 출발이었다. 좋은 성적은 항상 필요했지만, 오늘 경기 이후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면, 오늘은 특별히 더 좋은 성적이 필요했다.
Man of the Match
이날의 선수. 별것 아닌 타이틀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욕심이 났다. 그리고 지금 홈런은 그 욕심에 충분한 실현 가능성을 불어넣었다. 야구에서 같은 수준의 활약을 보인다면 결국 모든 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홈런이었으니 말이다.
“이거, 시작부터 아주 제대로 해냈네.”
“뭐, 내가 이정도지.”
“잘난 척은.”
“잘난 척이 아니라 실제로 잘난 거야.”
천천히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돌아온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대기타석에 서 있던 프레스톤이었다. 오늘 첫 선발 출전으로 들뜬 모습이 역력한 녀석이 나의 농담에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본래라면 여기서 한 번 더 치고 들어와야 했는데 최근 이상하게 나의 농담에 태클을 걸고 들어오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두고 보라고. 내가 아주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래, 제발 부탁한다.”
프레스톤이 활약해주는 것은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Man of the Match는 승리 팀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에게 돌아오는 법이었고, 프레스톤이 활약한다는 것은 우리 팀이 승리할 확률이 그만큼 커진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어지는 후속 타자가 오마 달의 초구를 공략했다.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 오마 달이 나의 홈런으로 흔들린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타석에 선 타자가 최근 흔들렸던 자신의 감각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2루 베이스에 선 피아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이크 피아자 선수, 타구 각이 조금 아쉽네요. 조금만 더 위로 퍼 올렸더라면 넘어가는 공이었을 텐데 말이죠.]
[자, 이어지는 후속 타자. 메츠의 레전드, 무키 윌슨의 아들이죠? 프레스톤 윌슨입니다. 메이저리그 선발 출전은 오늘 경기가 처음이로군요.]
[이 선수도 상당히 훌륭합니다. 93년 드래프트 전체 4순위로 입단해서 한때 BA리포트 탑 10에도 올랐던 선수입니다. 포텐셜에 비해 성장 속도가 더뎠던지라 마이너에서 조금 오래 머물기는 했습니다만, 이번 달 빅리그에 콜업된 이후 상당히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레스톤이 타석에 들어섰다. 유명한 흑인 영화배우를 닮은 잘생긴 얼굴 탓일 것이었을까? 척 하고 배트를 들어 슬쩍 어깨 위로 넘기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자, 오마 달, 초구.]
[바깥쪽 크게 빠지는 공!! 윌슨이 잘 참아 냅니다.]
[홈런에 2루타를 연달아 맞은 탓일까요? 오마 달 선수, 조금 흔들리는 것 같군요. 아 포수 켈리 스티넷이 올라갑니다.]
[아무래도 선발로 뛰던 선수가 아닌지라 이런 상황을 수습하는 경험은 부족할 겁니다. 불펜이라면 홈런에 2루타를 맞고 흔들리는 순간에 이미 강판이었을 테니깐 말이죠. 하지만 이제 고작 1회입니다. 아직 남은 경기는 길어요.]
[1회, 아웃 카운트를 하나 남겨둔 가운데, 주자는 2루. 마운드를 방문했던 켈리 스티넷이 돌아왔습니다. 경기 재개됩니다.]
느낌이 좋았다. 이대로 프레스톤이 안타를 만들어 준다면, 상대방의 가장 강력한 투수인 오마 달이 스스로 무너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프레스톤은 그런 나의 기대를 120%로 충족시켜주었다. 내가 위기감을 느낄 만큼 멋지게 말이다.
따악!!
홈런이었다. 우측 담장을 크게 넘어가는 2점 홈런.
‘저 괴물 같은 놈이!!’
데뷔 타석에서 홈런을 치더니, 이번엔 선발 출장 첫 타석에서 또 홈런을 날려버렸다. 이건 눈에 띄지 않으려야 띄지 않을 수 없는 활약이었다. 타고난 주인공 체질이랄까? 홈플레이트를 밟고 돌아온 녀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어때, 콧대는 좀 납작해졌나?”
“글쎄, 워낙에 높은 콧대라 이정도는 티도 안 나는 것 같은데.”
거짓말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던 나의 콧대에 붉은 실금이 생겨났다.
‘활약해줬으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선을 혼자 다 가져가면 곤란하지. 난 오늘 누구보다 눈에 띄어야 한다고.’
이어지는 6번 타자 레이 오도네즈가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마운드를 내려오는 오마 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수월하게 잡은 뒤 홈런, 이루타. 그리고 또 홈런이라는 결과표를 받아든 투수의 표정이 좋을 수는 없었다.
“자, 나가자고.”
프레스톤의 몸에서 활력이 넘쳐 흘렀다. 그러고 보니 8월 메이저에 콜업된 이후 녀석은 반강제적으로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더블A에서 쌓았던 피로는 이 긴 휴식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터. 5개월간의 쉴 새 없는 일정 덕분에 모든 팀원의 최대 체력이 7, 80%로 줄어든 상태임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프레스톤이야말로 현재 우리 팀에서 가장 강력한 타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그의 이 홈런은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
.
.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1회 초 2점 홈런을 뽑아내는데, 모든 힘을 사용한 프레스톤은 이어지는 3번의 타석에서 거짓말처럼 3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반면 나는 도루 하나와 안타 하나를 더 추가했다. 그렇게 메츠는 7:2로 승리했다.
***
-패기 넘치는 X세대 청년 강진호를 만나다.-
요즘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이 있다.
‘X 세대.’
본 기자가 만난 강진호는 그 X 세대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 청년이었다. 그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질서에 과감하게 ‘왜’라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젊은이였다.
“최근 한국에서 강진호 선수의 성적 부진이 연애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본 기자는 그가 연애 사실을 숨기거나, 혹은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제 성적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이버메트릭스에 따르면 제 성적은 오히려 꾸준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세이버메트릭스라는 생소한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랬다. 그가 보는 야구는 우리 기성세대가 보고 있는 야구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타율, 그리고 타점과 득점이 아닌 BABIP이라는 생소한 수치를 이야기했고, RC라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용어를 꺼내 들었다. 그나마 알아들을 만한 것은 OPS였는데 그는 그것 조차도 한 번 더 가공해서 사용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세상의 야구에서 그의 성적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최근 그의 기록을 살펴보면 홈런이나 타점 득점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선수에 선정되는 일이 매우 잦았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인터뷰가 있었던 날에도 그는 이날의 선수에 선정됐다.)
*세이버메트릭스 :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최근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방법론으로 선수 개개인의 성적을 일일이 숫자로 환산하여 만들어낸 야구 공식의 일종.
또한, 그는 자신의 연애에 대해 태연하게 긍정했다. 아니 오히려 되물었다.
“프로야구 선수는 연애하면 안 되는 겁니까?”
그 순간 본 기자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혀왔다. 물론 프로 선수가 성적에 지장을 주는 것은 잘못이었다. 하지만 꾸준히 성적을 향상시키는 와중에 연애나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과연 잘못일까? 혹자는 그 시간에 훈련에 매진하는 것이 진정한 프로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는 적절한 휴식이 포함되지 않은 훈련은 선수의 몸을 해친다는 놀라운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강진호.
그는 자신만만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백인과 흑인들 투성이인 이 곳에서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연애까지 즐기는 대범함을 보였다. 어쩌면 그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강진호는 우리 기성세대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분명 이질적인 존재다. 본 기자는 아직도 X 세대들이 이야기하는 그 힙합이라는 노래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힙합이라는 것이 노래가 아닌 것은 아니듯, 강진호의 야구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야구이지만 분명 야구였다.
그의 건승을 기원해본다.
***
폭탄과도 같았던 인터뷰 이후, 다행스럽게도 걱정했던 것처럼 국가대표를 좌우할 만큼 커다란 반발은 없었다. 98년의 대한민국인들에게 미국에서 유행하는, 미국에서 정설로 받아지는, 미국의 여성과 당당하게 연애하는 같은 미국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이야기는 효과적이었다. 물론, 보리스가 꾸준히 관리해온 기자들이 매우 우호적으로 기사를 작성해준 점도 컸다.
다만 전체적인 여론과 상관없이 일가친척 어르신들의 꾸중 섞인 전화를 거의 매일 들어야만 했다. 함부로 서양 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분들부터 연애는 미국 여자랑 하더라도 결혼은 꼭 한국 여자랑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어른들과 한창 일에 집중할 시기에 여자에 정신 팔아서 어디 쓰겠냐 꾸중하는 어르신들까지. 심지어 우리 부모님께도 아들을 똑바로 단도리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어왔다고 했다. 이걸 참 오지랖이라고 불러야 할지, 정이라고 불러야 할지.
또한, 전해 듣기로는 내가 말한 세이버메트릭스의 기본적인 몇 가지 개념들이 상당히 큰 화제가 됐다고 했다. 물론 여전히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진리는 투승타타였고 나는 하락하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변명이나 하는 멍청한 녀석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난 세이버메트릭스를 가장 먼저 공론화시킨 인물이 된 셈이었다.
아, 물론 이런 골치 아픈 일들을 치르는 만큼 단순히 카트리나에게 쪽팔리지 않는 것 말고도 꽤 괜찮은 선물이 따라왔다.
“으흥, 진호, 거기서 혼자 뭐하고 있는 거에요?”
“아, 미안. 셀레나.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야.”
이번에 우리 홈 경기에 시구를 했던 재즈 뮤지션 셀레나. 백인과 흑인의 혼혈로 뚜렷한 이목구비와 흑인 특유의 매끈한 살결을 자랑하는 그녀가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셀레나에게서 느껴지는 묵직한 중량감이 나의 날개뼈를 자극했다.
아 물론 그 선물이 셀레나는 아니었다. 나에게 주어진 진정한 선물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렇게 마음껏 연애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체였다.
‘그러니깐 데릭 지터가 전 여친들로 올스타를 만들 수 있다고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