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어떤 메이저리거의 일상
프레스톤의 합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팀의 전력을 상승시켰다. 역시 본래의 역사와 조금 틀어졌다고 해서 신인왕 2위, 그리고 올스타급 외야수의 자질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프레스톤의 방망이가 나날이 불을 뿜었다.
물론 나라고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연달아 벌어진 세인트루이스전과 콜로라도전에서 매우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홈에서 있었던 콜로라도와의 4연전에서는 2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쿠어스에서 홈런을 기록했던 것은 단순히 쿠어스 필드의 구장 빨 만이 아닌 콜로라도 투수와의 궁합 문제도 조금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9월 확장 로스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우리 팀의 성적은 77승 59패로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2위에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다만 최근 한 달간 30번의 경기에서 20승 10패라는 터무니 없는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1위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승차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벌어졌다. 그들은 최근 30번의 경기에서 무려 22승 8패를 기록하며 양대리그 최다승률을 기록 중인 양키스의 승률을 거의 따라잡았다.
현재 그들의 성적은 90승 46패. 이제 시즌도 9월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들의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우승은 확정적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방법은 오직 지구 우승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부, 중부, 서부지구의 2위 팀 중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는 팀에게 주어지는 한 장의 와일드카드. 바로 작년에 플로리다는 이 와일드카드로 대권을 손에 쥐었다. 어차피 단기전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야구였다. 일단 포스트 시즌에 진출만 한다면 우리라고 해서 우승 반지를 손에 끼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 당면한 과제는 다른 지구 2위 팀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잘하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되지 못했다. 지난 1달 우리가 그렇게 승리했음에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승차는 더 벌어진 것처럼 말이다.
이기기 위해선 우리의 승리뿐 아니라 경쟁팀의 패배 역시 필요했다. 전자는 우리의 힘으로 확률을 바꿀 수 있었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또한, 본래대로라면 그 두 가지는 아무런 관계성을 가지지도 못하는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9월 1일. 그 두 가지 요소가 얼굴을 맞댔다. 작년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의 우승팀이자 올 시즌 시카고 컵스와 함께 지구 1, 2위를 경쟁하는 중부지구의 패자.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원정 경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뉴욕시간으로 저녁 10시 20분 치열했던 콜로라도와의 4차전이 끝났다. 간단한 인터뷰. 라커룸에서 흙먼지만을 대충 털어내고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대기 시간 없이 미리 준비된 전용기에 올라탔다. 11시 30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내식이 제공됐다. 분명 훌륭한 셰프가 만든 것이 분명할 음식이었지만 피곤 때문인지 모레 알을 삼키는 것 같은 까끌함만이 혀끝을 맴돌았다. 맛 대신 의무감으로 그것을 꼭꼭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확실히 체력적으로 부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6월 이후 근 석 달간 거의 휴식일 없이 풀로 시즌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휴식일이 있는 경우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무려 8경기를 단 하루의 휴식일도 없이 달려온 상황이었다. 심지어 앞으로 있을 휴스턴 3연전에 모두 선발로 뛴다고 가정한다면 무려 11일간 단 하루도 쉬지 않는 강행군인 셈이다.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내 옆에 앉아있는 프레스톤 같은 경우 정말 팔팔해 보였다. 뭐 그럴 만도 했다. 녀석 같은 경우 지난 8연전 중에서 선발로 출전한 경기가 고작 세 경기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 성적만 본다면 허스키가 아닌 프레스톤이 더 많은 경기를 소화하는 것이 옳았지만, 발렌타인 감독의 똥고집은 팬들의 압박조차 쉽게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거 진짜 맛있네. 아주 살살 녹는다 녹아.”
“맛있냐?”
“어, 이거 고기에 양념을 어떻게 한 건지 기가 막히네. 너 그거 안 먹을 거야?”
“먹는다 먹어. 먹어야 살지.”
꾸역꾸역 고기를 씹어 삼켰다. 뉴욕에서 휴스턴까지 비행시간은 대략 4시간. 아직 3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야, 맥주나 한잔할까?”
“맥주?”
비행기의 냉장고에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이 갖춰져 있었다. 입맛도 없고 몸도 피곤한 상황.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은 나쁘지 않았다.
“그럼 난 오리지널 허니 브라운으로.”
“어휴, 취향 하고는. 계집애들이나 마시는 그런 술이 뭐가 좋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맥주나 가지고 와.”
프레스톤 녀석이 비행기 뒤편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옆에서 쫑알거리는 녀석이 없으니 몸이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눈이 뻑뻑했다. 잠깐 녀석이 올 때까지만 눈이라도 감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야. 일어나.”
“어, 빨리 왔네. 내 맥주는?”
“맥주는 무슨 맥주야. 휴스턴 도착했으니깐 버스로 이동하자고.”
“응? 휴스턴?”
눈 깜빡? 아니 그것도 안 되는 시간인 것 같았다. 이건 숫제 잠들었다기보다는 잠깐 기절을 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고개를 휘휘 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의 몸에서 담요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짜식이 그래도 친구라고 담요는 덮어줬나 보네.’
비행기 날개 아래, 대형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히 공항의 보안라인을 지난다든지 하는 행위는 필요 없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그대로 호텔로 직행했다.
“자, 그러면 이따 1시에 보자고.”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끝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은 새벽 5시. 미팅 전 미리 식사라도 하고 가려면 최소 12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역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12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20분 정도 꼼꼼하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 주었다. 몸 구석구석이 비명을 질러댔다. 특히 콜로라도와의 2차전, 슬라이딩 중에 살짝 부딪힌 오른쪽 허벅지가 조금 뭉치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따 오후에 마사지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식당에 내려가니 제법 많은 동료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베이컨과 빵, 그리고 오트밀을 담았다. 여전히 식욕은 없었지만, 나에게 식사란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하기 싫은 식사를 억지로 끝내니 어느새 미리 공지되어있던 1시가 다가왔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회의실에는 어제 우리와 함께 전용기로 이동했던 프런트 직원들이 각종 자료를 세팅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시리즈 첫날답게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많은 자료였다. 쓸데없을 만큼 자세한 자료들이었지만 결국 오늘 경기를 포함한 이번 시리즈 전체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었다. 그다지 맑지 않은 머릿속에 자료들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미팅이 끝나고 가벼운 컨디션 체크가 이어졌다. 뭉친 허벅지에 대해 미리 이야기하고 마사지를 받고 나니 어느새 오후 4시 30분. 구장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홈팀은 이미 연습을 끝낸 그라운드. 삼삼오오 짝을 지은 선수들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후 이어진 가벼운 프리 배팅. 코치들이 타격폼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흠, Kang 자세가 조금 무너지는 것 같아. 탑핸드가 조금 풀어진 느낌이야. 그거 말고는, 뭐 다리가 좀 불편하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건 괜찮은 것 같네.”
“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언제나 더 편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반면 가장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자세는 신체의 스팩을 극한까지 짜내는 자세였다. 피곤과 방심은 그렇게 짜인 자세를 망가트리는 독이었다. 감독의 말에 따라 스윙을 교정했다. 의식적으로 탑핸드를 더 강하게 감아 몸에 밀착하는 느낌을 유지했다.
“굿, 좋아. 그거야.”
프리 배팅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시합 전 훈련 자체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시즌은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무리하게 연습을 해서 체력을 뽑아내는 멍청이는 없······, 지는 않았다.
“진호!! 이리 와서 가볍게 페퍼 게임이나 몇 번 하는 거 어때?”
프레스톤이었다. 그 헨더슨조차도 티배팅을 거르고 덕아웃 벤치에 푹 파묻혀 있는 상황에서 힘이 아주 남아도는지 팔팔하게 그라운드 주변을 달린 프레스톤이 나에게 다가왔다.
“됐어. 사양할게.”
“흥, 약한 척하기는.”
“내년 이맘때 네가 어떨지 기대하지.”
그라운드 한편에서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연습을 끝낸 동료들은 팬들에게 다가가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아직 경기 시작까지 2시간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BP(Batting Practice) 티켓을 구매한 팬들은 미리 들어와 우리의 배팅 연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BP 티켓의 경우 가격이 싼 것도 아니었다. 오늘 경기의 티켓 값이 평균 15달러 정도 됐는데 BP 티켓의 경우 60달러에 육박했다. 즉 지금 저 BP 존에서 우리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은 그 비싼 가격을 내고 우리의 연습을 보고 사인받길 원하는 팬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열정적인 팬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들이 BP티켓을 샀다고 해서 우리에게 돈이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런 비싼 티켓을 구매할 만큼 우리에게 열정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프레스톤과 나 역시 그쪽으로 다가갔다. 몇몇 사람들이 야구공, 혹은 티켓을 내밀었다. 미리 준비해둔 마커로 사인해서 건넸다. 아무래도 원정 경기였던 만큼 우리에게 사인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헨더슨이나 피아자, 올레루드, 노모 같은 전국구 스타들에게 사람이 좀 몰린 정도였다.
“Kang!! Kang!! 여기!! 여기요.”
“응?”
그런데 그중 나를 절실하게 부르는 한 꼬마가 있었다. 9살? 10살 정도 됐을까? 지저분한 금발을 한 그 꼬마의 등에는 나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교포도, 홈구장도 아닌 곳에서 만나는 열혈팬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유니폼에 사인 해주면 되니?”
“네!!”
“부모님은? 왜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BP 티켓은 너무 비싸요. 형이랑 제가 1년이나 용돈을 모았는데 한 장 밖에 못 샀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바비 존스 선수는 이쪽으로 안 오는 건가요? 형이 꼭 사인받아다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이 먼 휴스턴에서 우리를 응원하는 깜찍한 꼬마 녀석들이라니. 순간 마음이 움직였다.
“음, 바비는 지금 불펜 쪽에 있는 것 같았는데, 일단 잠깐만 기다리렴.”
불펜 한구석, 어제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했던 바비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이봐 바비.”
“어? Kang 아니야. 여긴 웬일이야?”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뭐, 어린 팬들을 싫어하는 빅리거는 없었고, 그것은 바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지어 야구공이 아닌, 자신이 예비용으로 준비해둔 글러브에 사인해서 직접 아이에게 찾아갔다. 나 역시 질 수는 없었다. 라커룸에 비치해둔 예비용 배트 중 하나를 꺼내 들어 나의 이름을 멋지게 휘갈겼다.
아마 그 꼬마 팬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할 선물이 아니었을까?
오후 6시. BP 존이 폐쇄되고 일반 관중들의 입장이 시작됐다. 그리고 우리는 라커룸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가볍게 몸을 푼 덕분일까? 음식들이 조금은 먹을만했다. 약간 부족한 듯 배를 채우고 다시 그라운드로 향했다.
뻐엉!!
휴스턴 선수들이 먼저 돌아와 있는 그라운드.
그곳에는 불꽃을 집어 던지는 거인의 포효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