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44화 (44/210)

# 44화.

불꽃을 던지는 거인(1)

오랜 세월, 스카우트들 사이에는 정설처럼 내려오는 격언이 있었다.

‘키가 6피트 6인치(198cm) 이상인 투수는 정상적인 작동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오랜 격언은 지금에 와선 그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메이저리그에는 정상적인 작동을 넘어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작성하고 있는 거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랜디 존슨

불꽃을 던지는 사나이. 그랬다. 그의 ‘왼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최고 102마일의 강속구는 불꽃 그 자체였다.

“진짜 크네.”

“그러게.”

“좋겠네.”

“뭐가? 아, 경기 출전하는 거?”

“어.”

“부럽냐?”

“당연하지.”

나를 바라보는 프레스톤의 얼굴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것은 어쩌면 지난날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던지는 것을 지켜보던 나의 얼굴과 닮아있었는지도 몰랐다.

“하긴, 나도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던지는 거 그냥 구경만 하는데 경기 뛰는 선수들 부러워 죽겠더라.”

“에이, 페드로가 작년 사이 영 위너이긴 하지만 그래도 랜디랑 비교할 거리는 아니지.”

“비교할 거리가 아니기는. 네가 페드로 던지는 걸 직접 보면 그딴 소리는 절대 안 나온다.”

“글쎄다. 지금 저 양반 던지는 거 보니깐 어떤 걸 보더라도 그런 소리가 술술 나올 것 같은데.”

2미터가 넘는 거인이 던지는 강속구에는 속도 이상의 위압감이 실려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그가 던지는 공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속도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휴스턴은 전광판에 투수의 구속을 표시해주지 않았다.

[자, 8월의 마지막 시리즈죠? 치열했던 98시즌도 어느덧 슬슬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2위의 뉴욕 메츠와 중부지구 2위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맞대결입니다. 시즌 막판 와일드카드 경쟁이 한창인 만큼 양 팀 모두 매우 중요한 경기입니다. 특히 애스트로스의 경우 시카고 컵스와 승차가 고작 1경기 차이인 만큼 이번 시리즈만 잘 치러낸다면 중부지구 1위로 부상할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자 오늘 휴스턴의 선발투수는 랜디 존슨, 95년의 사이 영 위너 출신입니다. 지난달 말, 논 웨이버 트레이드 마감 직전에 시애틀에서 휴스턴으로 트레이드된 랜디 존슨 선수. 휴스턴에서 지금까지 총 5경기 37이닝 동안 삼진 45개, 볼넷 11개. 3점의 실점으로 5승. 평균자책점은 0.73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트레이드 전, 시애틀에서 23경기 4.2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조금 부진했습니다만 휴스턴에서 완벽하게 부활한 모습입니다.]

[그에 맞서는 뉴욕 메츠의 선발은 노모 히데오 선수로군요. 마찬가지로 다저스에서 논 웨이버 트레이드 마감을 이틀 앞두고 메츠로 넘어왔습니다. 최근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만, 그래도 오늘 몸 상태가 괜찮다는 관계자의 이야기가 있는 만큼 어느 정도는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경기가 시작됐다. 2번과 3번을 오가던 나의 타순은 서서히 3번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대신 2번 자리를 차지한 타자는 팀의 주전 유격수인 레이 오도네즈였다. 2할 초반대의 타율과 0.6이 채 되지 않는 OPS로 타격만 본다면 절대 메이저에서 뛸 만한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지 스미스 이후 최고의 유격수 수비로 칭해지는 화려한 수비 덕에 그는 오늘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리키 헨더슨이 타석에 섰다.

올 시즌 지금까지 그가 선발로 출전한 경기는 109경기.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많았다. 물론 헨더슨 자신은 항상 더 많은 경기에 출전하는 것을 원했지만, 그 터프한 정신상태와 달리 그의 몸은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랜디 존슨이 던졌고 리키 헨더슨이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어림없는 스윙이었다. 랜디 존슨의 속구보다 한참 늦은 스윙. 하지만 진짜 문제는 스윙의 질이 아니었다.

‘헨더슨씨 정말 피곤한가 본데.’

피로의 진짜 문제점은 단순한 육체 능력의 저하가 아니었다. 인간의 정신은 신체에 귀속되기 마련이었다. 피로는 인간의 두뇌를 둔화시킨다. 지금 헨더슨은 동체 시력과 판단력 모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만약 지금 그의 컨디션이 최상이었다면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헨더슨이 허무하게 삼진으로 물러났다.

대기타석으로 나가기 위해 방망이를 챙겨 들었다. 타석에서 물러나 걸어오는 헨더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체력의 한계. 어쩌면 나이의 한계를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선수가 세월에 밀려나는 것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젠장, 키만 큰 멀대 같던 애송이 자식이 많이도 성장했네.”

“괜찮아요?”

“삼진으로 물러났는데 괜찮겠냐? 뭐, 그래도 이제 1회니깐. 저 애송이 빠른 건 여전한데, 타이밍도 좋아졌어.”

내가 잘못 봤다. 이 순간에도 헨더슨은 삼진에 분해하며 다음 타석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가 헨더슨 씨 몫까지 제대로 날려드릴 테니 벤치에서 잘 지켜보세요.”

“내 몫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서 네 몫이나 잘 해결해. 삼진당하고 돌아와서 질질 짜지 말고.”

대기타석에서 배트를 움켜쥐었다. 한층 더 가까운 곳에서 랜디 존슨이 공을 던지고 있었다. 타석의 레이 오도네즈가 그 거인을 공략하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어림없었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랜디 존슨의 공이 브래드 아스머스의 미트에 틀어박혔다.

뻐엉!!

어마어마한 포구음.

“스트라잌!! 아웃!!!”

[랜디 존슨!! 2타자 연속 삼진.]

[오늘 랜디 존슨 선수의 컨디션이 굉장히 좋군요. 공이 아주 시원하게 뻗어 들어갑니다.]

[확실히 시즌 초 시애틀에서의 랜디 존슨과 이곳 휴스턴에서의 랜디 존슨은 전혀 다른 투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자 이제 타석에는 메츠의 3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이 선수도 무시할만한 선수가 아니죠. 올 5월 콜업 된 이후 벌써 9홈런 41도루를 기록 중입니다.]

[켄 그리피에 필적하는 재능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는 선수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성적만 봐서는 아직 부족하지만 말이죠.]

1회 초. 투아웃. 주자 없음. 타석을 향해 걸어갔다. 18.44m. 마운드와 타석의 거리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달랐다.

‘마운드가 이렇게 가까웠나?’

단순히 마운드에 선 투수의 키 때문일 것이다. 평소 크다고 생각하는 투수들보다도 한 뼘 이상 더 거대한 랜디 존슨의 키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적절히 다리를 벌리고 배트를 움켜쥐었다.

마운드의 랜디 존슨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가볍게 들린 오른발. 등 뒤로 숨겨져 있던 그의 왼팔이 마치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맹렬하게 날아드는 공.

돌아가던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초구, 참아냅니다. 볼!!]

[저 선수 선구안이 상당히 좋네요. 공을 정확하게 골라냈어요.]

[올 시즌 주로 테이블 세터로 뛰었는데도 볼넷 개수가 상당합니다.]

운이 좋았다. 몸쪽 너무 깊숙이 파고드는 빠른 공이었던 터라 쳐봤자 재미가 없겠다 싶었는데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우선 1-0. 나에게 유리하게 승부가 시작된 셈이었다.

[자, 랜디 2구.]

마찬가지로 몸쪽 빠른 공. 빠르게 배트를 돌렸다.

티익

하지만 늦었다. 게다가 내 생각보다 공이 더 높았다. 방망이를 스친 볼이 포수의 미트에 박혀 들었다. 파울팁. 볼카운트는 1-1. 아직 2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었다.

랜디 존슨의 피칭 타이밍은 빨랐다. 나로서는 그 장단에 맞춰줄 수 없었다. 잠시 타석을 벗어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더럽게 빠르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충분히 만나봤다. 하지만 그중 그 어떤 투수도 눈앞의 저 랜디만큼 빠르지 않았다. 심지어 눈앞의 저 투수는 좌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슬라이더를 안 던졌구나.’

속구만으로도 이렇게 골이 아픈데 그보다 더 골치 아픈 슬라이더가 남아 있었다. 92마일의 슬라이더라고 했던가? 메이저리그 속구 평균구속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야말로 휘어 들어오는 속구라고 부를만했다.

타석에 다시 섰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랜디가 공을 뿌렸다. 이번에도 역시 속구였다.

‘나쁘지 않아.’

하지만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집요하게 몸쪽으로 붙여 들어오던 공이 제법 여유로운 코스로 파고들었다. 나의 배트가 그 공을 강타했다.

따악!!

한순간 손바닥이 마비되는 것 같은 묵직함이 전해졌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배트가 밀렸다. 3루 파울라인을 너머 크게 떠오른 공. 3루수인 빌 스피어스가 매섭게 타구를 쫓았지만, 다행히 타구는 그의 글러브를 넘어 내야 관중석으로 떨어졌다.

볼카운트는 이제 1-2.

랜디 존슨이 4번째 공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슬라이더다.’

나의 머리통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날아드는 92마일의 빠른 공이었다. 선수 생명이 아닌 생명 그 자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빠른 공.

‘빈볼이 아니야. 슬라이더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할 슬라이더야.’

머리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타석에 올라오기 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해둔 공이었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감이 나의 몸을 위축시켰다.

끝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랜디 존슨 1회 초 3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이닝을 끝냅니다. 대단한 피칭이었습니다.]

덕아웃으로 돌아와 공수교대를 위해 글러브를 챙기는 사이 헨더슨이 말을 걸어왔다.

“대단했지?”

“네. 정말 터무니없네요. 이건 뭐 꼬챙이 하나 들고 풍차로 달려드는 돈키호테가 된 기분이에요.”

“쟨 옛날부터 저랬어. 그래도 어릴 땐 흥분도 잘하고, 제구도 좀 날려서 상대할 만했는데, 요즘은 거의 뭐 괴물이지. 게다가 오늘은 유독 더 잘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릴 때요?”

“어, 89년인가? 그땐 내가 아주 제대로 괴롭혀줬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래서 오늘 저렇게 기합이 들어간 건가?”

“괴롭혀요? 저 랜디 존슨을요?”

마치 학창시절 같은 반 친구를 놀려줬다는 수준으로 가볍게 이야기하는 헨더슨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운드의 빅유닛이라면 그 이야기는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어, 아마 그때 내가 4타석 4볼넷 5도루 4득점을 했던가? 그랬을걸.”

“잠깐만요. 4타석 4볼넷 5도루 4득점이요?”

“어. 그때 저 녀석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하는 게 참 재밌었는데 말이지.”

랜디 존슨이 젖먹던 힘까지 짜내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4타석 4볼넷 5도루 4득점이라니. 이건 어떤 의미에서 4타수 4안타보다도 더 충격적인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농락의 흔적이었다.

“자, 잡담은 이정도로 하고, 일하러 나가보자고.”

“그렇죠. 오늘 저희 열심히 일해야 하는 날이죠.”

지난 7월 말 트레이드 이후 노모 히데오의 성적은 4경기 4선발 등판 4패 19.2이닝 19피안타 16실점 17볼넷 3피홈런 ERA 7.32으로 최악이라고 할 만한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최악인 것은 그 와중에 삼진은 24개나 잡아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프런트는 저런 터무니없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노모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마운드에 노모 히데오가 올라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