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불꽃을 던지는 거인(2)
노모 히데오, 태평양을 건너온 토네이도.
그가 자신의 이마에 찐득하게 흐르는 땀을 훔쳤다.
‘젠장.’
그는 마치 만화의 주인공과도 같은 인간이었다.
무명의 어린 시절, 그리고 약체 고교의 유일한 에이스. 고시엔에 나가지 못했음에도 기적적으로 가고 싶어 하던 프로팀의 지명. 하지만 자신의 투구폼 수정 요구를 거절하고 사회인 야구에 진출하여 올림픽에 참가. 그리고 대폭발.
올림픽 이후 그를 외면했던 수많은 일본의 프로 구단들은 앞다투어 노모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 8개 구단 동시 지명. 89년의 그 사건은 그야말로 일본 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89년의 그 드래프트에 훌륭한 선수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 ‘미스터 컨트롤’ 고미야마 사토루, ‘괴짜’ 신조 츠요시까지 훗날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하며 15년 이상 현역으로 활약한 NPB의 올스타급 선수들이 모두 노모와 같은 89년 드래프트 출신들이었다.
하지만 그 찬란했던 89년 드래프트조차도 그에게는 그저 통과점일 뿐이었다. 데뷔 첫해 트리플 크라운, 최다 탈삼진, 신인왕, MVP, 그리고 사와무라상까지.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위기는 존재했다. 5년간의 혹사로 인한 어깨 부상. 그리고 소속구단이었던 긴테쓰 버팔로스와의 갈등. 노모는 임의탈퇴라는 터무니없는 수단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진출 당했다. 긴테쓰에게 임의탈퇴를 당한 그는 더이상 NPB에서 뛸 수 없었고 그에게 남은 선택은 오직 메이저리그뿐이었다.
‘미국에 와라. 너라면 가능하다.’
그리고 로켓의 그 이야기처럼 그는 가능했다. 1995년. 그는 내셔널리그 탈삼진왕과 함께 생애 두 번째 신인상을 차지했다.
작년 하반기. 스캇 로렌의 타구에 맞아 망가진 팔꿈치는 수술을 통해 뼛조각을 제거했음에도 완전치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믿고 있었다. 투수가 되기에 작은 사이즈를 토네이도 폼으로 극복한 것처럼, 프로에 가지 못할 위기를 올림픽으로 극복한 것처럼, 더는 일본에서 뛰지 못하는 위기를 메이저리그 진출로 극복한 것처럼. 지금 이 위기도 결국 극복해낼 것이라고.
따악!!
[강한 타구!! 1, 2루 간을 뚫어냅니다. 크레이그 비지오. 2루까지. 2루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침착하게 포크볼을 골라내던 비지오 선수, 노모 선수의 몸쪽 빠른 공을 매우 정확하게 밀어쳤습니다,]
잠시 허리를 굽혀 로진백을 매만졌다. 홈플레이트 너머 피아자가 건네준 공이 무겁다. 마이크 피아자. 처음 메츠행이 결정됐을 때 그때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었다. 노모 자신이 찬란하게 빛났던 95년부터 97년까지 그와 호흡을 함께 했던 포수는 피아자였다. 그는 피아자와 함께하는 것이 위기 극복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한 달간 노모 히데오가 기록한 성적은 ERA 7.82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노모 자신도 어떻게 자신이 아직도 메이저리그의 마운드 위에 설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지금 그는 결코 메이저리그에서 뛸만한 수준의 선수가 아니었다.
마운드의 노모가 공을 뿌렸다. 빌 스피어스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부웅!!
“스트라잌!!”
포크볼이었다. 늙고 병든 사자의 마지막 남은 어금니.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는 가운데 삼진 하나만큼은 그래도 괜찮게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최후의 보루.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 이었다. 기본적으로 포크볼은 헛스윙을 유도해내는 구종이었지 스트라이크 존에 욱여넣는 공이 아니었다. 거듭해서 포크볼만을 던진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뻐엉!!
[아, 히데오 노모. 빌 스피어스를 볼넷으로 출루시킵니다.]
[노아웃 주자 1, 2루. 타석에 데이브 클라크가 들어오네요.]
노모에게는 이제 도저히 헤쳐나갈 방법도 자신도 남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쩌면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등판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홈플레이트 너머 피아자가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챘다. 평소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래도 마운드에서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게 공격적인 노모였다. 지금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노모 히데오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았다.
“잠깐만요.”
피아자가 심판에게 타임을 요청했다. 그가 잠시 마스크를 벗어들고 마운드로 향했다. 노모의 눈길이 흔들렸다.
“이봐, 히데오.”
“어.”
“우리 팀에 센터 라인은 메이저리그 최강이야. 저기 레이 오도네즈 보이지. 비록 타격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망할 놈이지만, 타석에서 까먹는 것 이상을 필드에서 보여주는 대단한 놈이야. 아마 조금 전 그 타구도 2, 3루간으로 날아갔다면 저 녀석 글러브에 박혔을 거야. 그리고 저기 좀 봐봐.”
피아자의 손이 진호를 향했다. 노아웃 1, 2루의 상황. 한가롭게 외야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21살밖에 안 된 어린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녀석이야. 젠장 난 저 나이 때 더블A에서 한참 박박 굴렀는데 말이지. 뭐 재능이 넘치는 게 재수 없긴 해도 대단한 녀석이야.”
“······.”
“그러니깐 겁먹지 말고 팍팍 던지라고. 넌 토네이도잖아.”
피아자의 두툼한 손바닥이 노모의 어깨를 두들겼다. 노모가 조금은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자는 씨익 웃으며 내려갔고, 노모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옷깃으로 닦아냈다.
‘이 친구야,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
노모가 글러브 속 공인구를 매만졌다. 일본에서 사용하던 미즈노사의 통일구와 비교해 더 도드라진 실밥과 진흙을 발랐음에도 더 매끄러운 표면이 느껴졌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피아자가 헬멧을 다시 썼다. 그의 미트가 요구하는 공은 몸쪽 높은 코스 패스트볼. 조금 전 포크볼을 남발했던 만큼 타자의 의식은 포크볼로 향해있을 터. 나쁘지 않은 한 수였다.
노모의 속구가 메이저리그 평균수준만 됐다면 말이다.
따악!!
데이브 클라크의 배트가 정확히 노모의 공을 후려쳤다. 높게 떠오른 타구가 내야를 넘어 외야로 향했다. 아득한 절망감이 노모를 덮쳐왔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기분이었다. 그가 긴테쓰 버팔로를 떠나는 결정적인 이유를 만들어 주었던 감독 스즈키 케이시의 저주가 귓가에 들려왔다.
‘메이저요? 큭, 그 녀석 인생 최대의 장대한 마스터베이션일 뿐입니다.’
노모가 고개를 떨군 그 시점. 그라운드에 어떤 회색 유니폼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홈플레이트에 앉아 외야를 지켜보는 피아자의 눈이 커졌다. 벌써 몇 번이나 본 광경이지만 볼 때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타자의 방망이에서 공이 출발하는 그 순간, 저 루키는 이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피아자의 시선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노모 역시 등을 돌렸다.
[Kang 빠릅니다!! 빨라요!!]
애스트로돔이 좌우로 325ft 중앙 400ft의 메이저리그 규정 최소치를 충족하는 작은 구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터무니없는 질주, 그리고 터무니없는 수비였다. 심지어 더 놀라운 것은 진호가 공을 받을 때 스텝까지 고려하며 공을 받아냈다는 점이었다. 글러브를 낀 왼손과 같은 쪽 발이 아닌 반대 발을 앞으로 내밂으로써 공을 받고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 없이 곧장 송구가 이어졌다.
[어? Kang 공을 잡아 그대로 3루에!!]
도움닫기조차 하지 않는 다이렉트송구. 하지만 그 속도는 어지간한 외야수들이 세 걸음 이상 도움닫기를 해서 던지는 송구에 버금갔다.
2루에 있던 크레이그 비지오가 3루로 달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호타준족으로 유명했고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3루 태그업 정도는 가능한 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불행은 지금 메츠의 중견수가 진호라는 점, 그리고 타구가 상당히 좌측으로 쏠린 타구였다는 점이었다.
“아웃!!”
심판의 두 팔이 올라왔다.
한순간 노아웃 1, 2루의 위기가 투아웃 1루로 변했다. 노모가 감사의 마음을 진호에게 표했다. 저 어린 천재가 노모를 향해 씨익 웃었다.
노모는 불현듯 진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상 한국인들과 친해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특수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죽인 사람들의 후손에게 그것은 조상이 저지른 악업일 뿐이지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후손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이어지는 4번 타자. 제프 배그웰. 특유의 기마 자세로 타석에 서 있던 그가 노모가 던진 87마일 포심을 그대로 후려쳤다. 번개처럼 돌아간 배트.
이번에도 역시 진호가 움직였다. 어느새 펜스 가까운 곳까지 달려 든 진호. 그의 몸이 마치 조던처럼 떠올랐다.
아웃, 아웃이었다.
***
입에서 단내가 올라왔다. 1회 말. 예상처럼 노모는 많은 타구를 허용했고 나는 정말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했다. 뭐 그래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상대 팀의 상위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체력이야 우리의 공격 타이밍에 회복시키면 그만이었지만 점수는 그럴 수 없었으니 말이다.
“강?”
덕아웃에 앉아 스포츠드링크와 당분을 섭취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노모였다. 그날 등판한 선발투수가 말을 걸어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노모는 나와 특별히 이야기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고맙다고 인사 하려는 건가?’
뭐 이번 수비이닝 때 내가 보여준 모습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했다.
“아, 노모 씨 무슨 일입니까?”
“대단한 수비였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뭐, 중견수인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노모가 나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것은 몰락한 슈퍼스타 노모 히데오의 진솔한 자기 고백이었다. 뜻밖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저기 저 피아자나, 혹은 팀의 에이스인 알 라이터라면 모를까, 이제 막 빅리그에 올라온 루키인 나에게 털어놓기에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
“승승장구해온 강이라면 조금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은 팔꿈치 수술 이후 떨어진 기량에 대한 한탄으로 끝났다. 내 옆에 앉아 이야기를 늘어놓은 노모 히데오는 멀리서 뉴스로만 접했던 노모 히데오와는 사뭇 달랐다. ‘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 라고 호기 넘치는 이야기를 하던 영웅은 없었다. 여기에 있는 것은 부상으로 인해 하락한 기량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야구가 끝난 것이 아닌지를 고민하는 야구선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지난 생에서 무릎부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재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쓸쓸하게 웃는 노모 히데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조금 많은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노모 히데오는 부활한다. 그는 마치 만화의 주인공처럼 일어서고, 또다시 자신을 버렸던 이들을 후회하게 한다.
“구속이 떨어졌다면 그걸 대체할만한 무기를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노모 씨의 포크볼은 아직 메이저에서 통하는 공이잖습니까. 그런 무기를 하나만 더 만들어낸다면, 그러니깐 예컨대 슬라이더 같은 공을 완성도 있게 구사할 수 있게 된다면 충분히 이전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슬라이더라······. 그렇군요.”
뭐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게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었지만, 노모에게는 그저 위로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렇게 지독하게 흔들리는 순간, 누군가 응원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말이다.
“강, 고맙습니다.”
“이런 거로 고맙기는요. 동료 사이인데요. 뭘.”
노모 히데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뭐 나쁜 일은 아니었다. 투수는 그날그날의 정신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는 인간들이었고 노모가 조금이라도 더 사람 같은 플레이를 해주면 해줄수록 0에 수렴하는 승리 확률이 조금은 올라갈 테니 말이다.
뻐엉!!
마운드에 선 괴물이 여전히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92마일의 빠른 공이 나의 머리로 향하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정말 오금이 저리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부딪히고 싶었다.
‘아직 아니야.’
한 번의 경험. 머릿속에 새겨진 그 생생한 기억들을 토대로 타석에 선 나를 상상했다. 마운드의 랜디가 공을 던질 때마다, 내 머릿속의 나는 배트를 휘둘렀다.
그렇게 여덟 번. 마침내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