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불꽃을 던지는 거인(3)
4회 초 2아웃 주자 없음.
오늘의 랜디 존슨은 굉장했다. 11명의 타자를 상대로 7개의 삼진. 그리고 출루 없음. 앞선 타자들의 타석에서 그가 던지는 모든 공을 통해 이미지 트레이닝을 진행해봤지만, 내 머릿속에서조차 그 타율은 3할이 채 되지 못했다.
랜디 존슨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의 공이 까다로운 이유는 많았다. 구속과 구위로 대변되는 공 자체의 대단함. 100마일이 넘어가는 공을 몸쪽으로 붙여버리는 터프함.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나에게 가장 낯선 것은 그의 신장 그 자체였다. 팔길이만 무려 96.52cm. 쓰리 쿼터에서 출발하는 그의 공은 좌타석에서 봤을 때 흡사 1루에서 날아드는 공 같았다.
더더군다나 큰 키와 긴 팔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릴리즈 포인트(공을 손에서 놓는 지점)가 다른 투수들보다 훨씬 타석 가까운 곳에서 형성된다는 뜻이었다. 즉 메이저리그의 평균적인 투수들과 비교했을 때 랜디 존슨의 공은 약 2, 3마일가량 더 빠르게 느껴졌다.
간결한 하체 동작. 그리고 그에 비해 과도할 만큼 큼지막한 테이크 백. 랜디 존슨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몸쪽 높은 코스 깊숙하게 찔러오는 빠른 공이었다. 나의 몸이 황급하게 뒤로 빠졌다.
뻐엉!!
‘저 인간이?’
물론 판정은 볼이었다. 마운드의 랜디 존슨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어때 겁나지? 그러니깐 순순히 물러나라고.’
솔직히 겁이 났다. 100마일짜리 공이 머리 근처로 날아드는 광경은 섬뜩했다. 나는 야구를 하는 것인지 목숨을 걸고 러시안룰렛을 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뱃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것이 오기였는지, 아니면 투쟁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를 노려보는 랜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졌다.
제2구. 또다시 랜디 존슨이 왼손이 불을 뿜었다. 마찬가지로 몸쪽으로 딱 붙은 공이었다. 나의 머리를 박살 낼 것처럼 달려드는 빠른 공. 하지만 달랐다.
‘슬라이더야.’
몸쪽으로 딱 붙어 날아드는 공이었다. 높은 확률로 이대로 휘어져 존을 통과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를 압박하는 위협구를 이겨내며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슬라이더가 마치 마법처럼 존 밖으로 빠졌다. 터무니없는,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가 대단하다고 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나의 머리를 부술 듯 달려들던 슬라이더가 바깥쪽 존 밖까지 빠져나가다니.
잠시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 밖으로 물러났다.
‘말도 안 돼.’
평소대로 옷깃을 털고 배팅 장갑을 조여맺다. 하지만 쿵쾅대는 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몸쪽 꽉 찬 슬라이더가 바깥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백이면 백.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홈플레이트의 너비는 무려 17인치. 그 어떤 변화구라고 해도 그렇게 극심한 변화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공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선구안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겁먹었구나.’
몸쪽 공을 너무 의식했다. 게다가 직전 공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너무 강하게 새겨졌다. 본래는 그보다 떨어진 코스로 날아든 공을 더 깊숙하게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했다. 나의 뇌와 눈이 나를 속인 것이다.
‘젠장.’
답이 나오지 않은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답이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랜디 존슨. 선수생활 말년까지 좌타자를 상대로 피안타율 0.199를 유지했던 저 괴물의 공이 나의 머리를 향해 달려드는 이미지는 여전히 나의 눈 속에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볼카운트 1-1 내가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마운드의 랜디가 나를 보는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그리고 그 눈빛만큼이나 강력한 제3구가 날아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은 나에게 가깝게 붙지 않는다. 침착하게 끝까지 공을 확인하고 그 방향을 예측하자. 배트가 조금 늦더라도 난 충분히 공을 쳐 낼 수 있다.’
랜디 존슨의 속구에 맞춰진 반 박자 빠른 레그킥. 나의 무게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배트에 힘이 실렸다. 몸쪽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빠른 공. 내 머리 뒤편에서 날아드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 공을 향해 나의 배트가 강하게 뻗어 나갔다.
따악!!
배트의 스윗스팟을 상당히 벗어난 위치. 랜디 존슨이 던진 속구의 상단에 나의 배트가 명중했다.
강하게 바닥을 찍고 3루 쪽으로 굴러가는 타구. 휴스턴의 3루수 빌 스피어스가 서둘러 달려 나왔다. 하지만 타구의 위치와 세기가 절묘했다.
[Kang 쳤습니다!!!]
[빌 스피어스 달려 나옵니다만, 아 늦었습니다. Kang 이미 1루에 들어왔습니다.]
[저 선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빠릅니다. 랩타임을 한번 재보고 싶을 정도에요. 제가 보기엔 3.6초? 3.7초? 물론 좌타자가 1루까지 도착하는 시간에서 매우 유리하긴 합니다만, 하여간 지금 리그에서 가장 빠른 선수 중 하나임은 분명할 것 같습니다.]
[자, 오늘 메츠의 첫 안타이자 첫 출루입니다. 2아웃 주자 1루. 타석에는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옵니다.]
슬쩍 나를 바라보는 랜디 존슨의 눈빛이 매서웠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은 눈빛. 하지만 과정이 어찌 됐건 이번 타석에서 승리한 것은 나였다. 그렇게 노려봐서 어쩔 거냐는 마음을 담뿍 담아 시선을 마주쳐 주었다.
잠깐의 눈싸움. 하지만 투수를 계속 바라볼 수 있는 나와 달리, 그가 지금 상대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닌 타석의 타자였다. 랜디 존슨의 시선이 돌아갔다. 별것 아닌 일이었음에도 약간의 승리감이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경기가 이어졌다.
좌완 강속구 투수. 도루하기에 여러모로 좋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난 리그에서 네 번째로 많은 도루를 기록 중인 주자였다. 1루 베이스로부터 네 걸음. 나의 리드가 과감했다.
또다시 랜디 존슨의 시선이 나에게 머물렀다.
‘그렇게 쳐다봐서 뭐 어쩔 건데.’
경기 초반, 메이저리그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이름에 위축됐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그라운드에 있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위협구를 던지는 성질 더러운 투수와 그런 투수의 성질머리에 대거리 질을 하는 한 성질 하는 주자뿐이었다.
랜디 존슨이 정지 동작에 들어갔다.
‘견제? 피칭?’
지금까지 루상에 나간 타자가 하나도 없었기에 랜디 존슨의 견제 동작을 직접 눈에 새기지 못한 상황이었다. 물론 영상자료로 몇 번 보긴 했지만 VOD 급 조악한 화질의 영상으로 보는 것과 직접 눈으로 살펴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방심할 수 없었다. 1루 쪽을 향해 몸의 중심이 옮겨갔다. 그리고 랜디 존슨의 오른쪽 다리가 슬쩍 올라왔다.
‘견제다!!’
1루 베이스. 나의 리터치가 빨랐다.
“세이프.”
전설적인 좌완 강속구 투수. 분명 그의 견제구는 빨랐다.
‘쉬운데?’
하지만 동시에 정직했다. 2루까지 가는 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직전 타석, 외야 플라이로 물러났던 마이크 피아자 선수입니다만 랜디 존슨 선수, 방심해선 안 됩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피아자 선수 랜디 존슨 선수와의 상대전적은 상당히 훌륭하거든요.]
[어디 보자, 아 지금까지 총 15타석 14타수 4안타 0.286의 타율을 기록 중이로군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랜디 존슨 선수의 경우 지금까지 피안타율이 2할 1푼이 채 되지 않습니다.]
4걸음의 리드폭을 그대로 유지했다. 바짝 낮춰진 자세. 나의 왼발에 힘이 실렸다.
[랜디 존슨 제1구!!]
랜디 존슨의 글러브가 그의 얼굴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그의 왼손이 글러브에서 빠져나온 바로 그 순간 나의 질주가 시작됐다.
[1루 주자 2루로!!! 2루에서!!]
좌완투수 게다가 100마일에 달하는 속구를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연평균 150개 남짓한 안타만을 허용하는 랜디 존슨이 매년 30개 이상의 도루를 허용하고 도루 저지율이 리그 평균을 밑도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랜디 존슨의 견제 동작과 투구 동작은 너무 크게 차이 났다. 따라서 아무리 간결한 투구 동작과 강속구가 있다고 한들, 충분히 빠른 발을 가진 주자가 제대로 타이밍만 뺏는다면 도루에 실패하려 해도 실패할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헨더슨이 한 경기에서 그렇게 무식하리만큼 많은 도루를 뺏을 만했다.
쭉 뻗은 나의 왼발이 2루에 닿았다.
“세이프!!”
게다가 공을 던지기 직전 나의 도루를 눈치챈 탓인지 제구 또한 흔들렸다. 터무니없이 존을 벗어난 공. 볼카운트 1-0으로 시작하게 된 피아자의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2아웃 주자 2루. 볼카운트는 1-0. 안타 하나면 득점이 가능한 위치에 주자가 들어갔습니다.]
‘3루까지 뛰어볼까?’
문득 헨더슨이 자랑처럼 이야기하던 ‘그 기록’을 한번 재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볼넷으로 출루한 것이 아닌 내야안타로 출루한 것이긴 했지만 여기서 2루 도루와 3루 도루를 연달아 성공한다면 저 랜디 존슨의 멘탈을 흔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조금 욕심이 났다.
네 걸음. 나의 리드폭이 넓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는 랜디 존슨의 날카로운 시선. 이번에는 그 시선에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냥 평소 헨더슨이 종종 보여주는 특유의 그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랜디 존슨의 시선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역시 리키 헨더슨.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확실하게 도발됐다.
‘아니야, 이쯤 해두자.’
나의 주루가 전성기 헨더슨보다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타석에 선 타자는 마이크 피아자였다. 뉴욕 메츠의 역사를 새로 쓴 위대한 타자이자 빠른 공을 공략하는 능력만큼은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는 최강의 패스트볼 킬러.
타석의 피아자가 타격 자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볼카운트 1-0 상황. 두 번째 공이 랜디 존슨의 손을 출발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빠른 공.
피아자의 배트가 그대로 랜디 존슨의 공을 두들겼다.
[높게 뜬 파울 타구. 1루 내야 관중석 한 가운데 떨어집니다.]
볼카운트 1-1.
[제3구, 낮은 코스!!]
무릎보다 살짝 높은 곳으로 휘어 들어가는 빠른 슬라이더. 왼손 타자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통하는 슬라이더였지만 그것이 오른손 타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제대로 들어가는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는 우타자라 해도 결코 상대하기 쉬운 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운드의 랜디 존슨은 나의 도발에 마음이 흔들린 상황이었고 타석에 선 타자는 평범한 오른손 타자가 아니었다.
[마이크 피아자!!! 때려냈습니다!! 강한 타구!! 2, 3루 간을 뚫어냅니다.]
피아자의 배트가 랜디 존슨의 공을 때리는 그 순간 나의 몸은 이미 3루를 향하고 있었다. 3루 코치의 팔이 세차게 돌았다. 사실 피아자의 타구가 유격수의 글러브를 비켜나간 그 순간부터 나의 질주는 정해져 있었다.
‘들어간다!!’
홈을 향한 빠른 질주. 브래드 아스머스가 홈플레이트를 반쯤 가린 채 공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5-11(180cm)에 190lb(86kg)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체구였지만 포수의 장구들로 단단하게 감싼 몸은 상당히 단단해 보였다. 아직 아스머스의 미트에 공은 도착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겠어.’
쭉 뻗은 왼발. 나의 몸이 미끄러지듯 바닥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