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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47화 (47/210)

# 47화.

불꽃을 던지는 거인(4)

홈플레이트를 향해 미끄러지는 나의 몸을 아스머스가 슬쩍 막아섰다. 공조차 아직 소유하지 않고 있는 상황, 홈플레이트 전체를 막아서는 명백한 진루 방해였다. 하지만 이것은 홈플레이트를 앞에 둔 주자와 포수 사이에 종종 벌어지는 싸움이기도 했다. 아크로바틱한 동작으로 피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싸움을 피하는 주자에게 몸을 사리는 포수는 없었다.

[아, 저건 아니죠. 저건 아닙니다. 저렇게 홈플레이트를 완전히 막아서서는 안 돼요.]

[맞습니다. 물론 홈에서 포수와 주자가 싸우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홈을 완전히 막아서는 건 위험합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한쪽은 열어 줘야 해요.]

‘홈플레이트를 완전히 막아서는 포수라면 주자의 스파이크에 찍혀도 할 말이 없는 법이랬지.’

물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나를 만만히 보는 아스머스의 행동은 괘씸했지만 그렇다고 동업자 정신을 버리고 상대방을 완전히 보낼 수는 없었다. 그간 부지런히 증량했지만 혹독한 시즌 탓에 나의 무게는 여전히 182lb(82.5kg)에 불과했다. 190lb(86kg)의 무게에 각종 보호 장비로 무장한 포수를 무너트리기에는 조금 부족한 체구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게를 보충해줄만한 속도가 있었다. 안전장비로 보호받는 포수를 향해 지금껏 달려온 나의 운동에너지가 그대로 직격했다.

뻐억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거친 충돌이 발생했다. 튕겨 나오느냐, 아니면 무너트리고 발을 밀어 넣느냐의 싸움. 아스머스는 노련했다. 그는 나와의 충돌을 부드럽게 흡수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크게 밀려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약간의 밀림으로 충분했다. 약간이지만 아스머스가 꽉 막고 있던 홈플레이트가 드러났다. 나의 오른손이 그 홈플레이트를 쓸었다. 그리고 조금 늦게 아스머스의 미트가 나의 몸 위에 닿았다.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메츠의 Kang이 점수를 만들어 냅니다.]

[내야안타, 도루, 그리고 단타로 홈까지 들어간 Kang. 피아자 선수의 안타도 안타지만, 이 득점은 거의 대부분 Kang이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예요. 뉴욕 메츠가 국제 드래프트라는 복권에 제대로 당첨된 것 같습니다. 공, 수, 주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군요.]

돌아온 덕아웃. 헨더슨이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때 뛰기 쉽지?”

“네, 생각보다 훨씬 쉬운데요?”

“그렇다니깐. 저 녀석 저거 키만 멀대처럼 크고 공만 좀 빠르지 별거 아니라니까. 오늘 좀 이상하게 더 잘 던지기는 하는데, 네 덕분에 페이스가 흐트러졌으니 이제는 좀 기대해볼 만하겠네.”

천하의 랜디 존슨이 별것 아니라니. 천상천하 유아독존. 스스로 ‘I'm the greatest of all time.’이라 칭하는 리키 헨더슨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헨더슨의 이야기와 달리 랜디 존슨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를 덕아웃으로 돌려보낸 그는 이어지는 존 올러루드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기량을 과시했다.

경기가 이어졌다.

노모 히데오가 분전했다. 물론 분전했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보여준 결과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4.1이닝 5피안타 2볼넷 2실점. 잔루 1, 2루. 물론 행운도 어느 정도 따랐다.

5회 말, 삼진 하나를 잡아낸 이후 연속 안타를 허용한 노모가 강판당했다.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그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홈구장인 애스트로돔의 냉방시스템은 고장 없이 실내 온도를 27도로 맞춰주고 있었던 만큼, 저 땀은 순수하게 그가 흘린 긴장과 노력의 증거였다.

노모의 뒤를 이어 리고 벨트란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는 올 시즌 팀에서 가장 약한 불펜 중 하나였다. 평균자책점은 3.72로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이는 상당히 운이 따른 결과였다. 아마도 FIP(수비무관자책점)으로 환산한다면 그렉 맥마이클 다음으로 나쁜 성적이 나오지 않을까?

게다가 그 운이 따른 평균자책점 역시 팀에서 5번째에 불과했다. 올 시즌 메츠의 불펜진은 부실한 선발진과 달리 매우 튼튼했다. 즉 그가 마운드를 이었다는 말은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반쯤은 승부를 포기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역시나 다를까, 리고 벨트란이 안타를 허용하며 2루 주자를 홈으로 들여보내며 상대에게 세 번째 득점을 헌납했다. 3:1 상황. 휴스턴의 후속 타자가 병살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6회. 역시 랜디 존슨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타순은 9번. 조금 전 교체됐던 투수 리고 벨트란의 차례였다. 하지만 리고 벨트란은 일찌감치 어깨에 아이싱을 감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투수를 타석에 올리는 건 소중한 아웃 카운트 하나를 그대로 버리는 일이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타자가 배트를 뽑아 들었다.

“다녀올게.”

“그래, 이왕이면 그라운드를 한 바퀴 빙 돌아서 돌아와라.”

“뭐 그런 당연한 말을.”

프레스톤이었다. 최근의 폼만 본다면 프레스톤은 팀에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타자였다. 최근 이주 가량으로 기간을 한정했을 때 그보다 확실히 낫다고 할만한 타자는 피아자가 유일했다. 피아자에 이어 가장 좋은 타격을 보여주고 있는 올러루드와 나조차도 비율 스탯에서는 프레스톤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이는 프레스톤의 타석수가 워낙 적은 탓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참작한다고 해도 그가 화끈한 방망이를 자랑 중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다.

[6회 초, 메츠의 공격. 9번 타자 투수 리고 벨트란을 대신해 프레스톤 윌슨, 프레스톤 윌슨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이달 초 콜업 이후 타석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그 많지 않은 타석 속에서 2개나 되는 홈런을 기록한 프레스톤 선수. 과연 랜디 존슨 선수를 상대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겠지만, 프레스톤은 분명 대단한 녀석이었다. 본래 역사에서 녀석은 데뷔 첫해 신인왕 2위를 기록했으며 이후 28살 시즌까지 5년 동안 139개의 홈런과 101개의 도루 0.269/0.337/0.491의 성적을 낸 올스타급 중견수로 활약했다. 특히 2000년에는 30-30클럽에 가입했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오직 23명밖에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타자라 해도 결국 1루에 나갈 확률은 3번 중 한 번에 불과했고,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는 랜디 존슨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프레스톤이 시원하게 방망이를 돌리고 돌아왔다. 털썩, 벤치에 주저앉은 프레스톤. 나의 손바닥이 녀석의 등을 두들겼다.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녀석의 자세는 궁상맞았지만, 그 얼굴과 눈빛만큼은 살아있었다.

그리고 타석에 헨더슨이 들어갔다. 이번 경기 3번째 타석. 헨더슨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뭐 저 양반이야 자신감 하나만큼은 우주 최고일 테니깐.’

***

랜디 존슨은 기억하고 있었다. 89년 있었던 그 최악의 만남을.

88년 확장 로스터로 메이저리그를 경험했던 랜디 존슨이 처음 풀시즌을 치뤘던 89년. 존슨은 처음 리키 헨더슨을 만났다.

‘그 녀석 진짜 재수 없어.’

‘1루에 내보내면 내가 하는 이야기 이해할 거다.’

당시 시애틀의 베테랑이던 제리가 헨더슨을 보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바로 1회 말, 존슨은 제리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볼카운트 3-2 풀카운트에서 몸쪽 아슬아슬한 공을 골라내며 출루한 헨더슨은 2번 타자를 향해 던진 1구에 2루를 밟았고, 2구에 3루를 밟았다. 그리고 3구째, 존슨의 오른쪽으로 흐르는 내야 땅볼에 헨더슨은 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악몽은 시작됐다.

3회 말. 3-2 풀카운트에서 또다시 6구째 볼넷 출루. 마찬가지로 1구째에 헨더슨은 2루를 밟았고 내야수의 키를 살짝 넘어가는 단타에 홈으로 들어왔다.

5회 말. 스트레이트 볼넷. 이번에도 녀석은 2루로 도루했고 이어지는 두 타자를 잡아냈음에도 마크 맥과이어의 2루타에 또다시 득점을 허용했다.

그리고 6회 말. 3-2 풀카운트. 존 안으로 들어간 공을 파울로 만든 헨더슨은 7구째 볼을 또다시 골라내며 볼넷으로 출루했고 역시 도루에 성공했으며 후속 타자의 안타에 또다시 홈으로 들어왔다.

4타석 0타수 4볼넷 5도루 4득점. 그날 랜디 존슨에게 리키 헨더슨은 악마였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긴 세월만큼 참 많은 대결이 있었다. 둘은 80번에 가깝게 부딪혔고 헨더슨이 랜디에게 뽑아낸 안타는 6개에 불과했다. 1할 초반대의 타율. 얼핏 본다면 랜디의 완승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타율은 0.111에 불과했지만, 출루율은 0.385. 어떤 1번 타자가 특정 투수에게 출루율이 4할에 육박한다는 것은 그가 그 투수에게 완승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저 망할 인간은 자신의 공에 제대로 배트를 휘두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쉬운 공을 던질 수는 없지.’

다 늙어빠진 호랑이처럼 보였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그는 여전히 매년 두 자릿수의 홈런을 기록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간략한 스트라이드, 그리고 능형근을 최대한 활용하는 깊숙한 테이크 백이 이어졌다. 활처럼 당겨졌던 왼팔이 쏜살처럼 튀어나갔고 그 손끝에 있던 누런 공이 100마일의 속도로 튀어나갔다.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로 들어간 빠른 공. 늙어버린 헨더슨의 배트는 반응하지 못했다.

“스트라잌!!”

제2구. 이번에도 역시 바깥쪽 빠른 공이었다. 마찬가지로 헨더슨은 반응하지 못했다.

‘좋았어. 일단 카운트 두 개 잡고 시작이야.’

아니었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랜디 존슨의 이마에 세로 주름이 생겼다. 타석의 헨더슨은 여전히 몸을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존슨이 세 번째 공을 던졌다. 그리고 헨더슨의 배트가 돌아갔다.

티익!!

39살. 헨더슨의 배트가 터무니없이 밀려났다. 포수 등 뒤로 떨어지는 파울. 랜디 존슨은 헨더슨의 기량이 생각보다 더 많이 떨어졌음을 느꼈다.

제4구가 과감했다. 낮은 코스로 들어간 슬라이더. 헨더슨이 배트를 내밀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바깥쪽 공을 안 잡아주는 거야.’

볼카운트 2-2. 아직 유리한 것은 존슨 자신이었다. 다섯 번째 공이 존슨의 손을 출발했다.

몸쪽으로 붙은 100마일 빠른 공이었다. 늙어빠진 영감의 반응이라고 믿기 힘든 속도로 헨더슨의 배트가 튀어나왔다. 다행히 타구가 향한 곳은 3루 쪽 파울라인 밖이었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2-2. 6번째 선택은 높은 코스 슬라이더였다. 존 밖에서 안으로 흐르는 슬라이더. 볼넷을 노리고 있을 헨더슨이 속아 넘어갈 만한 공이었다.

그리고 헨더슨이 웃었다.

***

맙소사. 랜디 존슨을 상대로 통산 타율 0.111밖에 되지 않던 헨더슨이 안타를 기록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만큼 깜짝 놀랄만한 결과였다. 게다가 심지어 2루타였다. 1아웃 주자 2루. 그리고 2번 타자인 레이 오도네즈가 타석에 들어섰다.

‘일단 헨더슨 씨가 2루에 있으니깐 병살을 당할 위험은 적어. 그렇다면 어찌 됐건 나한테까지 타격 찬스가 온다는 이야기인데. 큰 거 한방이면 동점이라 이거네.’

그리고 기대하지 않던 일이 벌어졌다.

[레이 오도네즈, 레이 오도네즈가 볼넷을 골라냅니다.]

[이렇게 되면 원 아웃 주자 1,2루 상황이로군요. 타석에는 3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앞선 타석에서 내야안타로 출루에 성공해 득점까지 만들어냈던 Kang. 과연 이번 타석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원 아웃, 주자 1, 2루의 역전 찬스.

잘 차려진 밥상이 내 앞에 대령 됐다. 이제 남은 것은 밥상을 엎지 않고 잘 떠먹는 일뿐이었다. 배팅 장갑을 조여 맨 내가 타석에 들어왔다. 마운드에는 딱딱한 인상의 빅 유닛이, 그리고 그 너머 2루에는 싱글생글 웃고 있는 헨더슨이 보였다. 헨더슨은 입도 뻥긋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건네고자 하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난 할 만큼 했어. 이제 남은 건 네 몫이다. 어디 한 번 실력 발휘 좀 해 보라고.’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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