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48화 (48/210)

# 48화.

미친 개(1)

랜디 존슨의 신경이 2루에 향해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오늘 유달리 잘 들어가던 존슨의 공들이 존 밖으로 삐져나갔다. 앞서 레이 오도네즈가 볼넷으로 출루한 것은 이 덕분이었으리라.

연달아 빠져나간 두 개의 공. 랜디 존슨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제3구.

전신의 신경이 곤두섰다. 2구 연속 볼. 그리고 1아웃 주자 1, 2루. 마운드에 선 투수는 리그 최강의 파이어 볼러인 랜디 존슨. 상식적으로 봤을 때 지금은 조금 무리해서라도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올 확률이 높았다.

‘온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예감은 단순히 그런 이론과 합리를 통해 도출된 예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직감이자 본능이었다. 그것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번 공은 존 복판을 통과하는 빠른 공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순간 은근히 나를 자극하던 근육의 욱신거림 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오른 다리. 182lb(82.5kg)의 체중 이동이 자연스럽게 배트의 운동에너지로 전환됐다. 배트의 각도 역시 완벽했다. 왼쪽 겨드랑이가 몸에 딱 밀착된 채 배트가 돌아갔다. 마지막 순간 탑핸드를 감아올리는 타이밍까지 완벽했다. 끝까지 돌아간 배트를 나의 양손이 단단히 잡고 있었다. 급하게 달릴 필요는 없었다. 애스트로돔 우중간 외야 관중석에 나의 10호 홈런이 틀어박혔다.

[홈런!! 홈런입니다. 6회 말. 3:1 상황에서 Kang의 역전 쓰리런이 터졌습니다.]

[저 빠른 공을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대로 잡아당겨 버리네요. 대단합니다.]

[3:1로 끌려가던 뉴욕 메츠. 6회 말 뉴욕 메츠가 4:3으로 다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앞서가기 시작합니다.]

***

-강진호 최고 시속 163Km/h 메이저리그 좌완 특급 랜디 존슨 격추!!-

-95년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 메이저리그 최고의 탈삼진왕 랜디 존슨. 강진호의 홈런에 무릎을 꿇다.-

-강진호 시즌을 한 달 남기고 두 자릿수 홈런 기록!! 팀 내 4위. 뉴욕 현지에서 대체 불가의 자원으로 평가받다.-

-FOX-Sports의 캐스터 블레이저 曰 ‘막판 페이스가 올라오고 있는 만큼 어쩌면 15홈런도 가능할 것이다.’-

-톱스타 K양 강진호에게 관심을 드러내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동양인 타자 강진호. 두 자릿수 홈런으로 신인왕을 목전에 두다!!-

그 랜디 존슨을 상대로 홈런을 친 것 치고는 나를 따라다니는 언론들의 호들갑은 그리 심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이 21세기가 아닌 1998년이기 때문이었다.

훗날의 사람들은 90년대 가장 위대한 투수들로 매덕스, 로켓맨, 페드로, 그리고 랜디 존슨을 꼽았지만 아쉽게도 이 시기 랜디 존슨에 대한 평가는 매덕스나 로켓의 그것에 감히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92년부터 95년까지 4년 연속 사이 영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운 매덕스나 80년대 후반부터 10년 이상 꾸준히 리그 최정상의 투수로 활약해온 로켓과 비교하기에 랜디 존슨이 가지고 있는 95년 단 하나의 사이 영은 초라했다. 게다가 98년 랜디 존슨의 나이는 이미 34살. 일반적으로 볼 때 투수로서 황혼기에 접어드는 나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랜디 존슨이 자신의 말년을 그렇게 불태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엄밀히 말해 이 시기의 랜디 존슨은 톰 글래빈, 존 스몰츠, 커트 실링 등과 함께 이인자 그룹에 속하는 투수였다.

‘어찌 됐건 랜디 존슨은 랜디 존슨이지.’

하지만 실제 랜디 존슨의 기량은 98년 하반기부터 절정에 이르렀다고 봄이 타당했다. 따라서 그런 괴물을 상대로 3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커다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나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기본적으로 타격이란 아주 사소한 오류만으로도 완전히 망가질 수 있는 정밀 기계와도 같았다. 인간이 시속 150km/h로 날아오는 공을 그 작은 배트로 정확하게 때려낸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그렇기에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극적인 발전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바로 타격이었다.

물론 나의 타격이 좋아진 것이 단순히 자신감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랜디 존슨과의 승부 이후 스윙에 한층 더 힘이 붙은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그저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 성적으로 증명 됐다.

[Kang!! 홈런, 홈런입니다. 7회 말, 메츠가 7:5로 경기를 앞서나갑니다.]

[벌써 두 경기 연속 홈런. 저 선수 스윙이 많이 좋아졌어요.]

[본래도 스윙이 나쁘지 않던 선수였는데, 최근 보면 배트 스피드가 더 빨라진 것 같습니다. 움직임이 아주 파워풀해요.]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성적이 올라간 것과 달리 팀의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9월 확장 로스터를 통해 옥타비오를 비롯한 팀의 유망주들이 다수 메이저로 올라왔지만, 그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간 꾸준한 트레이드를 통해 메츠의 팜이 황폐해진 탓이었다. 실제로 시즌 초만 하더라도 팀에서 BA 리포트 100위 안에 들어가던 선수는 나를 포함해 여섯이었지만 그중 현재까지 팀에 남은 것은 나와 프레스톤뿐이었다. 그나마 몇몇 선수들이 빅리그로 콜업 된 이후 마이너에서 함께 생활했던 옥타비오 도텔이 BA 리포트 100위권에 잠깐 이름을 올리긴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의 실링은 메이저의 준수한 불펜 정도에 불과했다. 플로어가 메이저 백업 수준이라 평가받는 프레스톤이나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잠재력인 것이다.

물론 그렇게 수준 차가 난다고 하더라도 팀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면 백업 멤버들을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팀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중부지구의 경우 컵스가 6연패를 기록해준 덕분에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서부지구에서 우리와 와일드카드 경쟁을 하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달랐다. 그들의 9월 성적은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는 눈앞의 1승, 1승을 놓칠 수 없었고, 덕분에 9월 선수단의 숫자가 늘었음에도 주전 선수들의 출전시간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한창 타격감이 올라온 나 개인에게는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팀 성적이라는 측면으로 봤을 때는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목표가 보일 때야, 젖먹던 힘을 짜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선수들은 철인이 아니었고, 결국 무리한 출전은 경기력의 저하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아니, 사실 경기력의 저하만 가지고 온다면 다행이었다.

“으아악!!!”

[헨더슨 선수!! 갑자기 무슨 일이죠?]

[아, 허벅지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부상? 부상인가요?]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으로 햄스트링이 올라온 것 같습니다. 부디 큰 부상이 아니었으면 하는데요.]

경기 도중 외야 수비를 하던 리키 헨더슨이 허벅지를 잡고 쓰러졌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헨더슨. 한창 팔팔하던 20대 때도 연간 150경기 이상 뛰지 않았던 헨더슨이었다. 시즌 중반에는 체력관리를 받았지만, 막판 포스트 시즌 진출이 달린 상황에서 연달아 출전한 경기가 그의 늙은 햄스트링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아예 시즌 아웃이면 곤란한데.’

매일 잘난 척에 나를 제외한다면 딱히 친하게 지내는 동료도 없는, 팀과 잘 융합되지 못하는 헨더슨이었지만 그가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 작지 않았다. 지금 당장 와일드카드를 놓고 경쟁하는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그 이후,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을 때 라인업에 헨더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그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헨더슨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프레스톤이었다. 좌익수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타석에서의 성적이 발군이었던 만큼 당연한 선택이었다.

-시합 중 부상 리키 헨더슨. 15일, DL에 오르다.-

정밀 진단 이후 팀 주치의가 헨더슨에게 15일간의 휴식을 지시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허벅지 근육에 심각한 상처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염증이었다. 다만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회복속도가 한창때의 청년들보다 늦었다. 회복 기간까지 생각한다면 남은 정규시즌 경기 대부분을 불참해야 했지만, 와일드카드를 얻는 데 성공한다면 포스트 시즌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는 있는 기간이었다.

막상막하의 승률 경쟁이 이어졌다. 우리가 삽질하는 날에 컵스가 승리하고, 컵스가 삽질하는 날에는 우리가 승리하며 엎치락뒤치락하기를 몇 번. 나는 2개의 홈런과 6개의 도루를 추가했고 프레스톤의 성적은 2할 7푼대에 안착했다.

***

“아아, 아아악!!! 아파요. 아파.”

“조금만 더 참아. 확실하게 풀어 주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한다. 그나저나 이거 근육에 피로가 너무 심한데? 아무리 시즌 막판이라지만 코너 외야수도 아니고, 중견수를 더블 헤더에 다 내보낼 줄이야.”

“지금 1승이 아쉬운 상황이니깐요. 게다가 요즘 제가 좀 잘나가잖아요.”

마사지 오일을 듬뿍 바른 가리비아의 손바닥이 나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사정없이 쥐어짰다. 눈물이 핑 도는 통증.

“잘나갈 때일수록 조심해야 해. 누적되는 피로는 일종의 마일리지야. 아무리 열심히 마사지로 근육을 풀어줘 봤자 확실하게 쉬어주지 않으면 한 번에 돌아온다.”

“이제 시즌도 슬슬 끝나가잖아요. 남은 며칠 빡세게 달리고 휴식기에 충분히 쉬어주면 되겠죠.”

나의 몸을 주무르는 가리비아의 손가락에 한층 더 힘이 실렸다. 통증, 그리고 시원함. 마침내 마사지가 끝났다. 효과는 확실했다. 혹사로 인해 물먹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 봐야 경기 한 번 뛰고 나면 다시 원상복구 되는 가벼움이지만 말이지.’

“이제 6경기 남았지? 뭐 와일드카드로 진출해서 끝까지 간다고 하면 최대 23경기가 더 남은 셈이네.”

“그렇죠? 리그 1위는 애틀랜타일 테니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5전 3선승 디비전에, 챔피언십 5경기. 그리고 월드시리즈 7경기니깐요.”

“어휴, 네 몸만 생각했을 땐 좀 꾀도 부리면서 몸 좀 사려가면서 했으면 한다만. 그럴 생각은 없지?”

“당연하죠.”

“그래, 그러니깐 태업하라고까진 안 할 테니, 제발 과격하게 다이빙만 좀 덜 해가면서 해라. 응?”

“알았어요.”

가리비아의 걱정 가득한 잔소리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렇게 답했다고 해서 내가 경기에서 몸을 사릴 리 없다는 사실 정도는 가리비아도 잘 알고 있었다.

시즌 막판, 우리의 와일드카드 진출을 좌우할만한 경기가 다가왔다.

상대는 양대리그 승률 1위로 무적의 포스를 자랑하고 있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들의 에이스. 라이브 볼 시대 최고의 투수라 불리는 그렉 매덕스. 일명 마스터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