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미친 개(2)
9월도 어느새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시즌이 끝나가는 상황에서 이미 양대리그 승률 1위를 확정 짓고 포스트 시즌을 대비한다는 의미였을까? 애틀랜타의 라인업이 조금 허술했다. 물론 그렇게 허술해진 타선이라고 해도 우리 팀의 주전 라인업에 못지않다는 점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라는 팀이 얼마나 터무니 없이 강한 팀인지를 알려주고 있었지만 말이다.
‘쟤들이 지금 원정만 8경기째지?’
오늘 경기는 우리의 홈 경기였다. 물론 홈 경기라고 해도 체력적으로 크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역시 어젯밤까지 원정 경기를 뛰다 오늘 새벽에야 뉴욕에 도착했다. 피곤하기는 피차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홈경기였다. 호의적인 관중들이 보내주는 심리적인 지원. 그리고 많은 연습으로 익숙해진 잔디의 질감, 외야의 넓이. 하다못해 펜스의 높이까지, 작지만 분명히 우리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요소들이 산재해있었다.
1회 초.
애틀랜타의 공격으로 시작된 경기. 마운드의 릭 리드가 오늘따라 빼어난 구위를 뽐냈다. 오늘 우리의 선발투수인 릭 리드는 1996년 31살의 나이에 마이너 계약으로 메츠와 계약한 투수였다. 그는 96년 한 해 동안 마이너에서 커브를 갈고닦았고 작년 그 커브를 활용, 기대 이상의 성적을 보이며 선발진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올해도 평균자책점 3.46의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며 올 시즌 우리 팀 투수 중 유일하게 올스타에까지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알 라이터와 함께 자기 밥값을 해주는 둘밖에 안 되는 선발투수였다.
높게 날아드는 평범한 외야 플라이를 가볍게 잡아냈다. 1회 초 세 번째 아웃 카운트. 공수 교대였다. 헨더슨의 부상 이후 나는 1번과 3번을 오갔는데, 오늘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1번이었다. 상대 투수를 가장 먼저 체험해볼 수 있는 자리. 나를 바라보는 프레스톤의 표정이 요상했다.
“왜?”
“그냥, 뭔가 감회가 새로워서. 생각해보면 올해 초만 하더라도 빅리그 갈 수는 있을지 고민했는데, 지금 봐봐. 어릴 때부터 TV에서나 보던 매덕스를 상대하게 생겼잖아.”
“싱겁기는. 얼마 전에 랜디 존슨도 상대해봤잖아. 뭐 너야 멋지게 삼진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말이야.”
“그거야 갑자기 대타로 들어가서 몸이 덜 풀려서 그런거고. 게다가 랜디 존슨이랑 매덕스가 비교나 되냐?”
물론 충분히 비교할만한 투수들이었다.
“비교 못 할 것도 없지. 랜디 존슨도 사이 영 위너잖아.”
“그거야 그렇다만 사이 영 하나 받은 투수랑 4년 연속 사이 영 받은 투수를 같게 보긴 힘들지. 기자 놈들 연속 수상은 어지간히 압도적으로 잘하지 않으면 안 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야 그런데, 뭐 랜디 존슨도 앞으로 4년 연속 사이 영 받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잖냐.”
“에이, 랜디 존슨 나이가 몇인데 사이 영은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젓는 프레스톤을 뒤로하고 타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보는 마운드에는 라이브 볼 시대 가장 위대한 투수라는 거창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체구의 한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180이 살짝 넘어 보이는 키에 살짝 배가 튀어나온 그리 건장해 보이지는 않는 체격. 겉보기에 매덕스는 위대한 투수라기보다는 그냥 약간 지적으로 생긴 동네 아저씨 같았다.
[1회 말. 선두타자로 Kang이 타석에 들어왔습니다. 최근 타격감이 굉장히 좋은 선수인데요. 과연 오늘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군요.]
[개인적으로는 조금 고전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저 선수 기록을 보면 강속구에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여줬거든요. 매덕스 같은 노련한 기교파 투수를 상대하기에는 아무래도 경험적인 부분에서 좀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운드의 매덕스가 로진백을 매만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난 랜디 존슨의 공도 공략한 사람이야.’
매덕스의 이름값이 높다고 하지만 랜디 존슨 역시 결코 만만한 투수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좌타자인 나에게 랜디 존슨이야말로 매덕스보다 훨씬 공략하기 힘든 투수였을 것이다. 침착하게 좋은 공을 골라 쳐낸다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렉 매덕스의 양손이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렉 매덕스, 초구 와인드업.]
그의 오른손을 떠난 공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투심?’
랜디 존슨의 사기적인 슬라이더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위협이었다. 하지만 미리 공부해둔 자료대로라면 이것은 실투가 아닌 몸쪽 투심일 확률이 높았다. 나의 배트가 세차게 돌아갔다.
부웅!!
“스트라잌!!”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크게 벗어난 매덕스의 공에 나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이게 투심이라고?’
어지간한 투수들의 슬라이더에 필적하는 움직임이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무브먼트. 하지만 놀랄 틈도 없었다. 포수에게 공을 건네받은 매덕스가 그대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한 박자, 아니 두세 박자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나의 타이밍이 흐트러졌다.
‘큭, 빨라!!’
게다가 투구 동작도 종전과 달랐다. 종전보다 확연히 빠른 타이밍으로 매덕스의 공이 날아들었다. 이것은 단순히 구속이 빠른 것과는 다른 빠름이었다. 게다가 코스와 구종 역시 절묘했다. 타자가 가장 빠르게 느끼는 몸쪽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 볼. 전광판에 88마일이라는 숫자가 새겨졌다. 하지만 내가 느낀 구속은 그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빨랐다.
‘타격은 타이밍이고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다.’라는 워런 스판의 유명한 이야기를 마운드의 매덕스가 그대로 실현했다. 만약 밖에서 지켜보는 상황이었다면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칠만한 상황이었다. 물론 당하는 처지이었던 만큼 무릎을 치는 대신 속으로 욕을 내뱉었지만 말이다.
‘젠장.’
서둘러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버버 하는 사이 어느새 카운트는 0-2로 몰려버렸다. 그 어떤 위대한 타자도 1할대 타자로 둔갑하는 극도로 불리한 카운트. 가슴이 쿵쾅거렸다. 애써 침착하게 루틴대로 옷깃을 정리하고 장갑을 동여 맺다. 마음이 조금은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가보자.’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의 매덕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볼카운트 0-2. 그렉 매덕스 3구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바깥쪽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공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투심 패스트볼이 당연했다. 볼카운트 0-2라는 것은 어지간한 공이라면 타자가 배트를 내밀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문득 어디선가 들었던 매덕스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볼카운트 0-2에서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오는데 그게 파워 피처가 아니면 대체 뭐가 파워 피처라는 거냐.’
최고 90마일짜리 속구를 던지는 파워 피처. 모순적인 이야기였지만 그렇기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였다.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따악!!
너무 상념이 길어진 탓일까? 스윙이 조금 늦어졌다. 하지만 타구는 나쁘지 않았다. 강하게 바닥을 찍은 타구가 투수의 좌측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발이 느린 타자라면 1루까지 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타구였다. 하지만 공을 친 직후 1루까지 도착하는 것으로 한정했을 때 나는 리그의 그 어떤 타자들보다 뛰어났다. 나라면 충분히 1루까지 살아나갈 수 있었다.
마운드에 선 투수가 매덕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마운드의 매덕스가 몸이 오른쪽으로 크게 반 바퀴 회전시키며 글러브를 낀 왼손을 쭉 뻗었다. 무릎 높이로 빠르게 통과하는 나의 타구가 그의 글러브에 가로막혔다.
[매덕스, 그대로 백핸드 캐치!! 잡아냈습니다. 공을 뽑아 1루로. 1루에서!!]
“아웃!!”
[아웃입니다. 그렉 매덕스. 매덕스가 Kang을 1루에서 잡아 내는군요. 놀라운 수비였습니다.]
[과연 1990년 이후 7년 연속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투수다운 수비였습니다. Kang의 빠른 발도 매덕스의 수비를 이겨내지는 못하는군요.]
아웃이었다. 최선을 다해 달려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공을 던진 직후에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인지. 그렉 매덕스. 정말 터무니없는 반응속도였다. 1루에서 우리 덕아웃으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마운드에서 보내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의 눈이 마운드로 향했다.
‘뭐지?’
공을 던지는 내내 완벽하게 포커페이스를 지키던 매덕스는 없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매덕스의 얼굴에 어렴풋이 감정이 느껴졌다. 다만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돌아온 덕아웃. 프레스톤이 대기타석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까웠어.”
“그러게. 설마 저걸 저렇게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그렉 매덕스니깐.”
덕아웃 난간에 기댄 채 매덕스의 피칭을 지켜보았다.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는 그의 피칭은 영상, 혹은 글로 읽었던 내용 그 이상의 정보들을 나에게 전해줬다.
‘원하는 때 원하는 스피드로 공을 넣을 수 있다는 게 저런 이야기였구나.’
단순히 공의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 문구가 진짜 의미했던 것은 앞서 내가 당했던 그의 피칭 타이밍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매덕스는 여러 가지 다른 타이밍으로 투구 동작을 가져가고 있었다. 앞서 내가 직접 당하지 않았다면 눈으로 보고 믿기 힘든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투수가 타자의 타이밍을 저런 식으로 뺏을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이것은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연습을 통해 몇 개의 투구 동작을 사용할 수는 있었다. 실제로 와인드업 포지션에서 사용하는 정상피칭과 세트 포지션에서 사용하는 슬라이드 스텝, 두 가지를 갖추고 있는 투수의 숫자는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 경우 슬라이드 스텝에서 구위와 제구가 어느 정도 저하되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런데 매덕스의 경우 내가 확인한 것만 무려 네 가지로 조금씩 다른 타이밍을 가져가고 있었음에도 구위나 제구의 변화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1회 말. 프레스톤의 시원한 스윙 삼진으로 우리의 공격이 막을 내렸다.
경기는 계속됐지만 양팀 모두 좀처럼 점수는 나지 않았다. 릭 리드는 마치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좋은 공을 뿌려댔다. 그리고 그에 더해서 운도 제법 따랐다.
[잘 맞은 타구, 중견수 Kang이 잡아냅니다.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한 선수예요.]
[1회 말, 매덕스에게 안타를 도둑맞은 것을 화풀이라도 하는 것같습니다.]
[내가 안타를 못 쳤으니 너희도 못 친다 이거로군요. 애틀랜타에게는 무척이나 손해를 보는 장사가 되겠군요. 안타 1개를 뺏은 대신 3개를 빼앗긴 셈이니 말입니다.]
이 경기 들어 벌써 세 번째, 잘 맞은 타구가 나의 글러브에 들어왔다. 그리 어려운 수비도 아니었다. 지금 내 자리에 프레스톤이 서 있었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만한 공들이었다.
팽팽한 시소게임.
그리고 4회 말. 나의 두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