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미친 개(3)
오늘 그렉 매덕스의 공은 전반적으로 84마일에서 88마일 사이의 구속을 보여주고 있었다. 구속만 놓고 본다면 결코 대단한 투수라고 말하기 힘든 구속이었다.
최근 노모 히데오가 두들겨 맞는 가장 큰 이유가 떨어진 속구의 위력 때문이었는데, 그 떨어진 속구의 구속이 87마일 전후로 오늘 매덕스가 보여주는 구속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타자들이 매덕스의 공을 공략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제구력
그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매덕스의 제구력을 예로 들곤 했다. 물론 직접 확인한 그의 제구력은 대단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6개로 분할해서 사용하는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절묘한 코스로 공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마이크 피아자나 존 올러루드 같이 방망이 하나만큼은 메이저 최고 수준의 기량으로 인정받는 타자들을 꽁꽁 묶어두기에 평균 86마일은 너무 느렸다.
답은 간단했다.
그의 공은 구속(Real Velocity)이 느린 대신 체감 속도(Perceived Velocity)와 효과 속도(Effective Velocity)가 매우 뛰어났다. 그는 투구 동작에서 의도적으로 완급을 조절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터무니없이 정교한 제구력이 빛을 발했다. 그는 그런 완급조절에도 불구하고 로케이션(공의 도착지점)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공이 도착하는 시간은 고작 0.4초에 불과했다. 이 말은 즉 타자가 제대로 공을 쳐 내기 위해서는 마운드의 투수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이 아닌 그가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타격 자세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괜찮아. 애초에 강속구를 던지지 못하니깐 저렇게라도 꾀를 낸 거잖아. 할 수 있어. 난 그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도 공략한 사람이라고.’
타석에 서기 무섭게 마운드의 매덕스가 공을 뿌렸다. 몸쪽 꽉 찬 높은 코스로 날아오는 공이었다. 속구 구속이 80마일 중반밖에 되지 않는 투수답게 느리게 느껴지는 공. 나의 배트가 세차게 돌아갔다.
부웅
“스트라잌!!”
젠장, 느리게 느껴지는 공이 아니었다. 진짜 느린 공이었다.
[초구, 체인지업. Kang의 배트가 헛돌았습니다.]
[타자의 허를 찌르는 기습적인 체인지업이었습니다.]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수직으로 훅하고 떨어지는 그 체인지업에 배트가 닿지 못했다. 볼카운트 0-1.
앞선 타석에서의 교훈은 잊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버버 하는 사이 나의 타격 타이밍을 뺏길 수는 없었다. 빠르게 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했다.
특별히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덕스의 타이밍을 한번 끊어줄 필요가 있었다. 타석 밖에서 느긋하게 몸을 정돈했다.
‘칠 수 있어.’
평소의 루틴을 실행하고 타석에 들어왔다. 마운드에 선 매덕스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제2구. 매덕스의 손에서 공이 출발했다. 바깥 코스. 느린 공이었다. 이미 한 차례 목격했던 체인지업. 또 당할 수는 없었다. 머릿속으로 예상되는 공의 궤적을 따라 나의 배트가 세차게 움직였다.
따악!!
매덕스의 공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늦었다. 빗맞은 타구가 3루 파울 라인을 넘어갔다. 분명 앞서 한번 봤던 공이었음에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바깥 쪽 공이라서 그런 걸까?’
그럴 수도 있었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교정하려고 노력한다 해도 인간은 자기 눈에 가깝게 오는 공을 더 빠르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스윙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바깥쪽 코스의 공은 몸쪽 코스 공보다 더 느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더해 제대로 쳐내고자 했던 나의 욕심. 만약 내가 조금 더 침착하게 끝까지 공을 기다렸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볼카운트 0-2. 고개를 흔들고 크게 호흡했다. 문득 나의 시야에 내야와 외야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관중석의 수많은 홈 팬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동양에서 온 데뷔 1년 차 루키의 유니폼을 입고 나온 수많은 남녀노소도 존재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이역만리 타향의 사람들이 저토록 열렬하게 나를 응원해주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조금은 차갑게 식었다.
‘아!!’
그리고 기억났다. 훗날 공공연하게 알려진 매덕스의 필승 공식. 몸쪽 체인지업, 바깥쪽 체인지업. 그리고
‘몸쪽 빠른 공.’
타자들이 알고도 공략하지 못했다는 바로 그 패턴이었다. 물론 무조건 몸쪽 빠른 공이 들어온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볼카운트는 0-2. 이미 이전 타석에서 똑같은 카운트에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다 타격을 허용했던 매덕스였다. 공 하나 정도는 나를 낚기 위해 빼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매덕스지.’
각오를 굳히고 다시 타석에 섰다. 매덕스가 다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렉 매덕스 제3구!!]
매덕스의 투구 동작에 맞춰 나의 오른발이 슬쩍 올라왔다. 몸쪽 높은 코스. 86마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빠른 공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의 배트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따악!!
‘젠장, 이 인간 진짜 더럽네.’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은 맞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깊숙하게 파고들어 왔다. 아슬아슬하게 걸쳤다기보다는 살짝 존 밖으로 삐져 나간 공. 게다가 나의 타격 메커니즘 상 몸쪽 높은 코스는 영 껄끄러운 코스였다.
[빗맞은 타구!! 1루 파울라인을 따라 흐릅니다.]
1루 파울라인을 따라 흐르는 공을 잡기 위해 달려 나오는 1루수 안드레스 갈라라가. 그리고 공을 던진 매덕스가 놀라운 속도로 1루를 향해 달렸다.
‘살 수 있어.’
양 손의 얼얼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방망이를 내던진 나의 몸이 1루를 향해 질주했다. 크게 펌핑된 허벅지가 대지를 박찼고, 안드레스는 공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1루 베이스까지 남은 거리는 약 10미터. 이미 매덕스는 1루 베이스를 밟은 채 글러브를 벌리고 서 있었다.
세 걸음. 매덕스의 눈동자에 공을 쥐고 돌아서는 안드레스가 들어왔다. 두 걸음. 아직이었다. 아직 공은 매덕스의 글러브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걸음. 매덕스의 글러브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뻐억!!
나의 발이 1루 베이스를 밟았다. 그리고 그 직후 매덕스의 글러브에 야구공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1루 베이스를 지나 달려오던 속도를 죽이고 1루심을 바라보았다. 물론 내가 생각 느끼기에 나의 발이 더 빨랐다. 하지만 1루 베이스를 커버하고 있는 것은 그 매덕스였다. 종종 박빙의 상황에서 심판은 더 위대한 선수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잠깐의 정적.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아웃!!”
[1루에서 아웃, 아웃입니다. 4회 초, 안드레스와 매덕스가 Kang을 잡아냅니다.]
[정말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이건 안드레스 선수의 플레이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저기서 굴러오는 공을 글러브로 포구한 뒤에 송구했다면 이건 무조건 늦는 거였거든요.]
[Kang의 주력에 대해 모르는 선수들은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안드레스 선수로서도 조금 모험을 하더라도 Kang을 잡아낼 가능성이 있는 쪽을 선택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분했다. 그리고 짜증이 났다. 분명 나의 발이 1루 베이스를 밟은 타이밍이 매덕스의 글러브에 공이 들어오는 것보다 빨랐다. 하지만 지금 메이저리그는 챌린지(비디오 판독 요구)룰도 도입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판이 아웃을 외친다면 그것은 번복될 수 없는 아웃이었다.
그대로 경기가 흘러갔다.
6회 말, 1아웃 상황. 전광판의 점수는 2:0 물론 우리가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투수 릭 리드를 대신해 맷 프랑코가 타석에 섰다.
[1아웃 주자 없는 상황. 대타자로 맷 프랑코가 타석에 나왔습니다.]
내야 유틸리티로, 그리고 인터리그 원정 경기에서 아메리칸리그 룰에 따라 지명타자가 필요할 때에 출전했던 맷 프랑코였다. 비록 수비는 엉망이었지만 타격 하나는 나쁘지 않았다.
따악!!
그리고 그 나쁘지 않은 타격이 터졌다. 몸쪽으로 파고드는 매덕스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친 프랑코. 담장을 직격 하는 2루타였다. 덕아웃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발이 느린 프랑코를 대신해 루이스 로페즈가 대주자로 들어갔다.
1아웃 주자 2루. 나의 세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이닝 이터로 유명한 매덕스였다. 게다가 오늘 역시 공격적인 피칭으로 투구 수 역시 많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지쳤어.’
조금 전 프랑코에게 던진 몸쪽 공에는 앞서 보여주던 날카로움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올 시즌 그가 등판한 경기는 무려 32경기. 오늘까지 포함한다면 33경기였다. 이번 시즌 지금까지 소화한 이닝만 하더라도 243.2이닝. 지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게다가 앞선 두 타석을 경험하고, 다른 타자들의 타석을 눈이 빠지게 지켜봤다. 이번 타석 무조건 2루에 서 있는 로페즈를 홈으로 불러들인다. 그렇게 이번 경기에서 승리하고 와일드카드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마음속 깊이 단단한 각오를 붙들고 타석에 섰다.
지친 것이 확실했음에도 그의 딜리버리는 여전히 훌륭했다. 종잡을 수 없는 타이밍. 그의 손에서 공이 출발했다.
‘투심.’
확연하게 줄어든 구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무브먼트였지만 그래도 앞서 보여주던 날카로운 투심과 비교한다면 확실하게 조금 밋밋했다. 그리고 나로서는 그 공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따악!!
강하게 돌아간 배트가 그의 투심을 후려쳤다. 2루수의 키를 살짝 넘어가는 안타. 배트의 중심에 완벽하게 맞추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만든 그 어떤 타구보다 질 좋은 타구였다. 2루의 로페즈는 이미 3루를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달려나간 2루수 키스 록하트가 공을 잡았다. 하지만 이미 나의 발은 1루 베이스를 밟고 있었고, 로페즈 역시 홈을 향해 몸을 날린 상황이었다.
“세이프!!”
6회 말. 드디어 1점을 따라잡았다.
게다가 아직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원 아웃 주자 1루. 나의 발이 또다시 2루를 훔쳐냈다. 그리고 레이 오도네즈가 또다시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프레스톤.
그 역시 매덕스의 초구를 과감하게 공략했다. 녀석의 눈에도 구위가 떨어진 매덕스의 공이 먹잇감으로 보인 것이 틀림없었다.
[높게 뜬 타구. 좌익수 정면으로!!]
“아웃!!”
[아웃입니다.]
그러나 운이 부족했다. 괜찮았다. 이제 멀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더 나간다면 우리는 역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이 부족한 것은 프레스톤만이 아니었다. 8회, 나의 네 번째 타석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 팀에 추가점은 없었다.
8회 말, 2 아웃 주자 2루. 루상에는 단타로 출루해 도루를 성공시킨 카를로스가 서 있었다. 앞선 세 번째 타석과 비교했을 때 아웃 카운트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크게 다를 것 없는 상황. 동점을 만들어낼 찬스였다.
그때 매덕스가 포수를 향해 손짓했다.
[어! 무슨 일이죠? 매덕스 선수. 에디 페레즈 선수를 마운드로 불러냅니다. 설마 부상인가요?]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편안합니다만, 무슨 일일까요.]
글러브로 얼굴을 가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매덕스와 페레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나의 할 일을 하면 됐다. 타석 밖으로 잠시 물러나 허공에 배트를 휘둘렀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스윙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아, 페레즈 선수 돌아 옵니다. 투수 교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마운드의 매덕스가 정지 동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응?’
저 멀리 나의 배트가 닿지 않을 곳, 페레즈가 서 있었다.
[고의사구!! 고의사구입니다. 매덕스가 여기서 고의사구를 선택합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1루는 어차피 비어있고 다음 타자는 앞선 세 타석을 모두 삼진으로 물러났던 레이 오도네즈 선수거든요.]
마운드의 매덕스의 얼굴에 감정이 엿보였다. 여전히 알아보기 힘든 표정이었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승리자의 표정이었다.
***
-뉴욕 메츠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1차전. 브레이브스의 2:1 승리.-
-매덕스 9이닝 1실점 완투승 시즌 18번째 승리 수확.-
-Kang 4타석 3타수 1안타 1볼넷.-
-매덕스조차 피해 가는 강진호의 화끈한 불방망이. 과연 포스트 시즌에서도 볼 수 있을까?-